이원조의 고향이야기를 읽다(글/한경희_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1. 한학과 불문학의 만남
어린시절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여천 이원조(黎川, 1909~1953)에게 성리학적 세계관은 내면의 규율로 자리 잡혀 있었다. 이육사를 비롯한 여섯 형제들이 조부가 열어둔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던 방식은 매우 전통적인 독서법이었다. 사서삼경을 외우고 시험까지 치면서 동양의 역사와 문화를 내면 깊숙이 체화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문화적인 풍토에도 불구하고 이원조는 서구 근대의 낯선 문화에 대해서도 열린 사고를 소유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한 그는 ‘그저 내키는 대로’ 선택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따르면 프랑스문학이 사회와 인간의 관계에서 불거지는 모순에 비교적 진솔했던 것이 마음에 들었을 수 있다. 식민지민으로서 겪는 수모와 모순이 제국주의 이론을 통해 해명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단순히 문학을 인간정서의 차원에 국한시키는 일도 극복하고 싶어하였다.
이원조에게 문학적인 사명은 단순히 문학평론가의 길에만 있지는 않았다. 문학평론을 통해 작가들의 창작관과 세계관을 조명하고 바람직한 문학작품을 평가해서 문학사적으로 정리하는 일을 하고자 했다. 그에게 좋은 문학이란 도덕적인 가치관을 지녀야 하고 올바른 시대정신을 아우르는 일이었음을 그의 평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유년시절 고향마을의 낙동강
이원조는 낙동강을 소재로 잊지 못할 유년의 추억을 담아냈는데 이 글을 통해 고향에 관한 생각이 잘 드러난다. 이원조의 유년에서 원촌체험은 대단히 인상적인 세계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중심에 낙동강이 놓여 있다. 열다섯이 되도록 원촌에서 살았으며 그 시간까지 낙동강은 특별한 체험공간이면서 고향을 떠올릴 때 중요한 상징이 되어 있었다.
당시 소년의 눈에 비친 낙동강은 여름이란 계절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다. 여름철 홍수가 지고 큰물이 일면 물에 불은 목재가 떠내려가는가 하면 뗏목도 물결에 휩싸여 둥둥 떠가는 걸 보았던 것이다. 어린 소년의 눈에 큰물이 쓸고 가는 나무나 뗏목은 낯선 풍경이기도 하겠지만 위협적인 강의 속성을 알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물에 불은 목재가 쓸려 내려온 것인지 알 길이 없으나 홍수로 불어난 낙동강은 그 자체로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다른 지역 구경을 한 적이 없는 소년의 마음에는 끝이 어디인지 모를 강물의 흐름을 보며 머나먼 길을 막연히 떠올렸을지 모를 일이다.
이 홍수풍경이 소년 이원조에게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그의 솔직한 이야기에서 잘 보인다. 회상에 따르면 그는 악이 센 소년이었고 무엇이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투정부리고 보채는 보통의 아이였다. 그러다 매를 맞게 되면 하루 종일 발버둥 치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런 일을 두고 고집이 세다고 스스로를 말한 것 같다. 이쯤 되면 작은아버지나 형님들이 소년 이원조를 달래다가 지치게 되는데 그 막바지에 이르러 ‘낙동강에 띄워 김해 명지도로 보낸다.’고 하면 더 이상 울지 못했다고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유년기란 부모님에게 어리광이 심하여 하고 싶은 일을 절대 양보하지 않고 투정을 부려서라도 기어코 하고 마는 철없는 시절이다. 소년 이원조 역시 별 다를 것이 없이 평범하게 자랐다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고집 피우는 일이 생기면 작은아버지나 형님들이 말 안 듣는 소년에게 낙동강에 띄워서 명지도(김해)로 보내버린다고 한다. 이럴 때마다 소년은 고집 피우던 울음까지 완전히 멈추며 어른들의 말을 따를 정도로 낙동강이란 존재는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는 미지의 명지도가 두려워 고집을 포기했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 시절을 회상하는 시점에서 김해 명지도로 흘러가는 것조차 아름다운 시간으로 바뀌게 된다. 추억의 시간으로 들어온 과거의 사건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시간적인 거리감에서 확보되는 정서이다. 아름다움의 비밀이 우리에게 고향의 향수를 피워낸다면 더욱 추억은 아름다워져야 한다.
적극적으로 유년체험을 밝혀둔 글을 통해 고향에 대한 인상을 들여다본다. 낙동강 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왕모산은 고려의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 온 역사를 담은 산 이름이다. 이곳엔 몽진의 역사로 왕모당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에게 절벽이 있는 왕모산은 두렵고 위협적인 위엄이 있는 세계였으며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은 고향산천의 아름다운 풍경이 영원할 것으로 보였다.
<향토유정기>에는 어린 소년의 행복한 추억이 잘 살아있다. 이원조 스스로 ‘슬픈 행복’이라고 표현한 유년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분명 행복한 내용이다. 왜 이원조는 슬픈 행복이라고 했을까. 그리고 굳이 어린 날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담고 있다는 것을 반어법으로 표현했을까. 고향에 대한 이원조의 심사를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린 날 떠나와서 여전히 가지 못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참외서리를 하며 놀던 추억이 아주 아름답다. 고향은 정신적인 은신처인가. 그러나 그 행복한 소년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는 현실은 매우 암담하고 답답했던 까닭으로 슬픔과 행복의 역설을 사용했을 것 같다.
문명 발상지에는 큰 강이 흘러가는데 이것은 토지가 비옥한 것과 관련이 있다. 원촌마을 역시 큰물이 들어 강물이 한 번씩 범람하면 농작물 피해가 엄청나지만 그 어려운 시기를 넘긴 다음해의 밭은 거름이 풍부하여 비옥하게 변화한다. 이런 자연의 순환을 잘 활용해서 원촌사람들은 지혜롭게 살았을 것이다. 이곳 마을 역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며 만든 기름진 토지를 중심으로 모여 살았지만 마을 분위기나 사람들의 의식은 비리(卑俚)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육사 시인의 수필에서 등장하지만 진성이씨 집성촌으로 이뤄진 마을의 ‘엄격한 규모’가 소년들을 성장시켰다.
이원조가 묘사해둔 원촌의 풍경을 보면 활모양의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호위하며 이어져 있고 산기슭에 백여 호의 가구가 마을을 이뤄 살았다. 마을 앞으로 뽕나무밭, 조밭, 담배밭이 펼쳐져 있고 그와 나란히 느티나무 방죽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특히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령이 백년을 넘어서 하늘 높이 솟은 몸이며 짙은 그늘은 한여름에도 햇살 하나 들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였다. 마을사람들은 그 나무를 당나무라 불렀고 여름날 소년들은 느티나무 그늘 아래 책도 읽고 놀이도 하였다. 해질 무렵 방죽 앞으로 자란 잔디밭은 일몰의 햇살을 받아 비단물결처럼 아름다웠고 그 풍경 아래 말달리기 놀이를 즐겼다. 옷고름을 풀어 말고삐로 하고 업힌 사람은 말을 탄 사람이 되고 말이 된 아이가 말울음 소리를 내면서 마부까지 끼워 달음박질치는 놀이를 즐겼다.
자라서도 산보다 물을 더 좋아하게 된 이원조에게 유년의 낙동강은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방죽 아래 자갈밭에서 이상한 돌 줍기를 하면서 차돌과 인석을 주웠던 기억이며, 늦은 봄만 되면 강가에서 놀았던 소년시절에는 사발무지를 만들어 숭어새끼를 잡으러 다녔다. 미끼로 쓸 번데기를 얻으러 극성을 떨어가며 마을로 다니기도 했던 것이다. 숭어 잡는 재미에 빠져 책을 소홀히 한 대가로 맞은 종아리는 태형으로 치면 10년형 정도를 때운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야단도 많이 듣고 더러 종아리를 맞았던 모양이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보리밭이나 뽕나무밭으로 슬쩍 나와서 동네 꼬마들이 모이는 곳은 ‘붉은바위’ 소였다. 멱을 하루에 여덟 차례 이상을 감았는데 이렇게 멱을 감으면 시장기가 빨리 왔지만 밥 먹으러 집에 들어가면 나오기 어려웠으니 소년들은 끼니를 대신할 참외서리를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참외서리를 하느라 벗어놓은 옷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는 한기가 들 정도가 되었는데 그때 소년들이 제일 싫어하는 마을어른 한 분이 칡넝쿨로 아이들 옷을 묶어 들고 나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놀란 아이들은 물속으로 숨어들거나 뒷산 바위틈으로 도망을 갔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모두 잡히고 말았다. 옷을 입지 않았으니 힘껏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의 집들이 총총히 연결되어 있었으니 집집마다 참외 서리한 소년들이 있었을 것이고 이들은 그날 모두 집으로 불려가서 매를 맞았다. 그리고 10년이 훌쩍 지나 마을 소식을 접했는데 물이 크게 불어나 느티나무 방죽의 절반이 떠내려갔고 추억의 ‘붉은바위’ 소도 흐지부지 사라졌던 모양이다.
고향이야기를 보면 이원조의 소년시절은 즐겁기 그지없다. 소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연의 혜택과 어른들의 보호가 잘 느껴진다. 어른들의 엄격함은 두려울 정도로 불편했으나 아이들의 잘잘못을 몸소 배울 수 있는 중심이 되었다. 또래 아이들끼리 어울린 흥성스러움도 고향추억에서 아주 소중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바위 소 주변에는 분명 수중식물들이 잘 자라서 물놀이하는 구심점 역할을 했을 것이다. 소년들끼리 부끄러울 것 없이 옷을 다 벗고 헤엄을 치다 바위에 걸터앉아 쉬거나, 다양한 물놀이를 즐기면서 원촌마을의 낙동강과 추억을 함께 했을 것이다.
3. 멋과 여유를 즐기는 미감의 소유자
<시춘보>(待春譜)라는 글에는 이원조의 정서와 문장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표현이 가득하다. 매우 유려한 문장은 부드러운 심성에서 나오는 것이었다고 본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하는 자하문 언덕 위의 집은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계절이 늘 볼품이 없었는데 눈이 내려 온통 세상이 하얗게 변하고 소나무 위에 앉은 눈이나 그 눈이 내린 가지를 떠나는 새소리나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어 감탄하는 이원조의 내면이 보인다. 여유로운 일상을 담고 있는 사소한 생활상을 보면 이원조의 생애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에게도 순간적인 여유가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매일 출근시간에 지각을 하고 퇴근시간엔 친구를 만나서 늦게까지 어울리다 늦은 귀가를 한다. 아내의 잔소리를 걱정하면서 늦은 밤 택시를 타면 푹신한 의자가 주는 감촉이 너무 좋아 하루의 피로를 잊을 만하다고 한다.
북악산의 가을 단풍이 짧게 저물고 겨울 내내 헐벗은 산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섰는데 그러다가 눈이 내리는 날이면 북악산은 새 단장을 곱게 하게 된다. 이원조는 북악산을 완악하다며 크게 좋아한 산이 아니었는데 눈이 내릴 때면 북악산의 풍모를 즐겼다. 이런 날은 밤을 새워가며 새 솜을 누벼 만든 두루마기가 젖어도 그림 같은 산길 걷기를 즐겨하였다.
“소나무가지마다 소담스럽게 쌓인 눈, 그 눈이 무거워 라고 소나무가지는 휘여도 지고 굽어도 졌습니다. 이런 때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튀기는 산새가 푸두둑하고 깃을 치면 쌓였던 눈은 또 솨르르 또다시 기도합니다. 이런 산길은 十里를 뻗혀도 싫지 않겠습니다.”
소복이 내린 눈을 받치고 있는 소나무가지가 휘청거리고 그 소리에 놀란 산새가 후드득 날아오르는 소담스런 오솔길을 즐기며 걸었던 것인데 이런 길은 십리를 걸어도 좋다고 소회를 밝히고 있다.
한 시대의 작가가 소유한 시대정신만큼 서정적인 시대분위기를 이원조의 수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시간관념에 철저하고 바쁜 약속과 업무를 깔끔하게 흐트러짐 없이 처리하는 신문기자의 이미지와는 거리 먼 작가의 생활상이 보인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작가들은 매우 주관적인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보니 시간적인 여유가 넉넉하게 나타난다. 물리적인 시간에 매이지 않고 정서적인 시간과 내면의지에 더욱 무게중심을 둔 생활이 바로 예술가들의 일반적인 면모이다. 물론 이원조는 겸사로 언제나 회사에 지각한다는 인사말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지만 일상생활 속의 여유가 글을 쓸 수 있는 정신적인 바탕임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꽃에 대한 관심이나 사랑이 잘 드러나는 글은 바쁜 일상에 쫓겨 이웃에 맡긴 화분을 찾아오지 못하는 이야기로 알 수 있다. 화초를 가꿀 때 식물의 생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한데 꽃을 즐기는 것은 쉬운 일이나 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영춘과 양아옥이란 두 그루의 꽃나무 화분이 깨질세라 이사하면서 이웃에 맡겨 두었다. 그러나 이웃집도 바쁜 사람들이라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되찾은 영춘은 겨우 생명이 붙어 있었다. 영춘을 화단을 만들어 심고 대두비료, 비료수 등으로 날마다 정성을 들여 가꾸었으나 오히려 뿌리까지 썩어갔다. 사실상 영춘은 대충 물만 주면 잘 자라는 화초였으나 몰랐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렇게 알뜰하게 보살피지 않았으나 겨울을 잘 지내고 살아났다.
또 양아옥은 아옥을 닮아서 부르는 이름으로 이름 자체가 그리 아름답지 않으나 꽃 색깔이 어떤 붉은색보다 진하고 고와서 이원조는 특별히 이 꽃을 아꼈다고 한다. 그래서 꽃이 얼마나 오래 피는지 어떻게 관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꽃이 한번 피어나면 4-5일 지속되고 꽃이 시들 때 가위로 시든 꽃을 잘라내면 다음날 다른 순에서 꽃송이가 새로 맺혀 피어나면서 봄, 여름, 가을에 걸쳐 핀다고 한다.
이원조는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술에 얽힌 이야기를 풀면서 연암 박지원의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연암이 북경 술집에서 독한 중국술을 큰 술잔에 쏟아 붓듯이 마시는 것을 묘사하면서 술과 관련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술과 화초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는 실제 목도한 것을 쓴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찾아간 식당에서 주인은 고무나무 화분만을 골라 맥주를 주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이원조는 사람도 술을 즐기는 부류가 따로 있듯이 식물도 술을 먹을 줄 아는 종류가 있나 보다하고 쓴웃음을 지을 일이라고 썼다.
화초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나는 글을 통해 일상 속에서 이원조의 면모를 생각할 수 있다. 잘 자라지 못하는 화초에 숭늉, 맥주 등 특별한 비료를 주면서 키우는 이야기는 재미를 자아낸다. 과학적으로 실현가능한 이야기인지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를 일이지만 화초를 두고 보이는 정성의 지극함만은 진실하게 보인다. 집 이름을 자정향관이라고 정했으나 자정향을 못 구하고 있었는데 김남천이 고향에서 자정향(紫丁香:라일락) 두 포기를 가져와 하나를 주려했으나 아직 겨울이 지나지 않아 다음해 봄에 옮겨심기로 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석암(石巖:철쭉) 한 분을 낮에는 남창에 밤에는 머리맡에 두면서 돌보나 싱싱하지 못하다고 하자 김남천은 숭늉을 식혀서 물 대신 주라고 한다. 시키는 대로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는데 봄이 지나고 아주 싱싱해졌다는 것이다.
가을날의 독서 이야기는 가을을 맞은 소회를 담은 것으로 읽는 글과 보는 글이 다른 것을 이르는 대목에서 독서의 다양한 맛을 느끼게 한다. 독서의 전통세계를 생각하게 하는 수필이다. 더구나 구양수의 글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가을밤을 잘 전해준다. 어느 날 구양수가 촛불을 밝히고 심지를 돋우어 글을 읽으려 하는데 문 밖에서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몰려오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동자를 시켜 확인하자 사람은 없고 숲속에서 나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 정취를 구양수는 가을소리라고 한 <추성부>(秋聲賦) 작품에서 잘 보여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율독은 아주 일반적이었다.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글은 없지 않으나 제대로 소리를 돋우어 격에 맞춰 시원하게 읽을 책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원조는 율독의 대상으로 <<장자>>의 제물편 한 대목을 가리키면서 소리 높여 읽고 싶어 하였다. 가을밤 등촉 아래 소리 내어 읽는 독서를 그리워하며 가을달을 쳐다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4. 고향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작가든 평론가든 누구든 고향의 정서와 고향의 풍물은 개인의 삶을 조화롭게 만들어준다. 고향을 떠나 살면 그 공간적인 거리에서 그리움이 확장되고 깊어지는 것이고, 고향에 머문다면 생활 안에서 구체적인 일상으로 놓여있어서 고향이 주는 공간의 정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고향의 산과 들, 햇살과 바람이 나무와 풀들을 자라나게 하고 그 풍경 속에 어우러진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간다. 이원조의 수필에서 읽었듯이 타향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그는 그리움의 진원지 고향을 떠올리며 여유를 회복하고 있었다. 그 곡진한 그리움을 통해 유년의 고향이 새롭게 호출되어 원촌마을을 새롭게 생각할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이치를 서서히 깨달아가면서 마음속에 변하지 않는 터전으로 고향이 있음을 다행이라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원조의 유년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