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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둘 젊은 총각이 만드는 옻칠다구 -솔밤도요 정현진 도공의 작업실을 찾아서(글/사진/피재현_시인, 노암공방 대표)

여행길에서 만난 옻칠 도자기
혼자 여행하는 것을 즐겼던 때가 있었다. 찾아지지 않는 고독의 뿌리를 더듬으며 다니던 산길과 궁색한 시골 터미널, 기차역, 후미진 골목들… 어느 때부턴가 혼자 다니는 여행이 그만 싫어졌다. 내가 여행에서 찾고자 하는 대답을 얻은 것도 아닌데…….
그 후로는 여행까지는 아닌, 혼자만의 외출을 자주 한다. 주로 서울을 가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 촌놈이기 때문이다. 서울은 그다지 혼자라는 느낌 없이 다닐 수 있는 곳이다. 예술의 전당을 비롯해서 인사동 청담동의 갤러리, 현대미술관과 코엑스 전시몰, 그리고 지하철과 연이어 있는 대형 서점들, 씨네큐브 같은 예술전용관, 대학로의 소극장, 황학동과 청계천의 중고서점 등등이 내 나들이 코스인데 새로운 예술의 흐름을 곁눈질하기도 하고 흩어져 있는 박물들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한다. 하루나 이틀 정도의 나들이로는 서울만 한 데가 없다.

2010년 여름, 나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백수가 되었다. 8월 무덥던 어느 날 나는 인사동을 걷고 있었다. 몇몇 갤러리를 거쳐 중국산 골동품이 즐비한 거리를 걷다가 통인가게에 들러 더위를 잠시 피하기로 했다. 통인으로 들어가는 문에 <옻칠다구전>이라는 전시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어? 다구(茶具)면 도자기인데 도자기에도 옻칠을 하는구나.’하는 생각과 동시에 어느새 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지하 전시실로 내려서고 있었다.
짙은 암갈색과 먹색의 탕관, 다기세트, 물 항아리, 차 단지들이 전시된 방에서 나는 더위를 식혔다. 전시실을 나올 무렵 펼쳐 본 도록에서 작가의 작업실이 안동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뿐이었다.

솔밤도요 정현진 작가
그러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그의 작품을 지난 4월 열린 안동도자기협회전에서 다시 만났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걸어다녔던 인사동 길에서 만난 생경한 옻칠 도자기와의 조우는 투박하게 생긴 그의 물 항아리만큼이나 질박한 기쁨이 있었다.
그해 여름처럼 더운 날,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11번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던 그 길을 따라 풍산방향으로 가다가 솔밤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들어가는 첫 동네. 다리 이름의 근원지인 솔밤마을(서후면 교리)이다. 공방은 20여 호가 모여 있는 동네 한가운데 쯤, 얕은 산자락 아래에 있었다.

정현진. 올해 나이 서른두 살.
그 나이가 어려보일 만큼 내가 나이를 먹었을 테지만 매끈한 젊은이가 삽지껄에 나와 섰다.
그의 작업실은 그가 어려서 놀던 마당이다. 엄마가 사는 집 마당 한켠에 조립식 판넬건물 두 동이 들어섰다. 드럼통을 잘라 만든 솥을 걸고 감자를 삶았던 자리, 동네 아이들과 자치기를 하고 놀았던 자리. 그는 대학공부를 마치고 잠시 떠돌던 객지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와 빚을 얻었다. 2008년 봄의 일이다.
평생 도자기와 함께 살아가겠다 마음먹은 터였고 다행히 고향집에 어머니와 누나가 살고 있었다. 가마가 들어서 있는 작업실 20여 평과 건조실 10평, 두 동으로 되어 있는 곳이 요즘 한창 각광받고 있는 옻칠 도예가 정현진의 작업실이다.

고1때 취미생으로 도예를 만나다
그는 고등학교 때 이미 도자기를 접했다. 도예가 정태호 선생의 취미생으로 처음 도자기를 접한 그는 흙의 질감과 손끝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조형성에 매료되어 대학에서 도자기를 전공하기로 맘먹었다. 그렇게 학교를 마치고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 할 시점,
안산, 여주, 경주, 청송 등지의 도요를 전전하며 길을 찾았지만 마땅치 않았다. 자신의 작품을 할 공간이 필요했고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 모르는 먼 길의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때 그는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작업실을 짓고 그가 한 일은 미니어처 작업과 야생화 화분을 만드는 일이었다. 덜컥 빚을 얻어 작업실을 짓고 가마를 들였으니 매달 갚아야 할 돈이 만만치 않았다. 한 개에 몇천 원씩 하는 야생화 화분을 하루 종일 만들었다. 팔 다리가 아파오고 이 일을 계속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날로 쌓여갔다. 그래서 도자기를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해서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직장을 구하기도 했다.
예술가로서의 이상은 멀리 있었고 현실은 턱 밑이었다. 그러던 그가 마음을 다잡았다. 대학 졸업작품을 준비하면서 경험했던 옻칠을 떠올렸다. 도자기의 예술성에 옻칠의 다양한 기능까지 더할 수 있는 작업, 그는 다시 흙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에 내놓은 것이 2010년의 대구박람회 출품과 서울에서의 개인전이었다.

무모함과 성공 사이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옻칠을 한 다구는 차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제는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구매자가 생겼다. 작업실을 지을 때 얻은 빚도 갚고 이제 조금 안정이 되어가는 느낌이라고 한다.
“옻은 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아주 훌륭한 소재입니다. 항암효과를 비롯하여 다양한 병증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어요. 동의보감에도 장(腸)을 잘 통하게 하고 기생충을 죽이며 피로를 다스린다고 적혀 있어요. 그 뿐이 아닙니다. 옻칠은 천연 칠재료로 제품의 내구성을 강화시켜 주고 살균 항균 효과가 뛰어나 위생적이기까지 합니다.”
나는 옻칠은 주로 나무에 하는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옻에 대한 그의 예찬이 이어진다.
“경남 의창 다호리와 전남 광산 신창리 유적에서는 기원 전후에 제작된 칠기제품이 발굴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칠공예 역사가 적어도 기원전 1세기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그의 작업은 주로 판작업으로 이루어진다. 흙을 쳐서 판을 만들고 그 판을 밀어서 흙이 터지는 느낌을 만들고 이것을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손물레에서 다시 핀칭(pinching)기법으로 성형을 한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빚어 하는 작업이라 정형적이지 않고 매순간 흙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다. 흙 속에는 물이 고여 있고 흙을 바닥에 내리치면 이 물성들이 고스란히 살아나 가뭄에 말라터진 논바닥처럼, 때로는 화석의 자연스러운 트임처럼 되살아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릇에 다시 옻칠을 하고 말리기를 거듭한다.
옻이 올라 고생을 하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책을 보고 공부를 하면서, 명장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렇게 한 장르를 새로 개척해가는 재미, 그의 외소한 풍채에서 의외의 여유와 너그러움이 묻어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챘다. 그는 작업의 묘미를 맛 본 것이다.

“외롭지 않으세요?”
“외롭지 않으세요?” 나도 작업실을 갖고 있는 터라 앞뒤 없이 이렇게 불쑥 묻는다. 그도 작업실에 틀어 박혀 살아가는지라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챈다.
“전에는 지인들을 불러 음악을 듣거나 음식을 장만해서 술 한 잔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제가 주로 나가는 편이예요. 외롭다가도 사람들이 많이 오면 작업을 할 수가 없고, 모순같지만 사람이 간사해서 잘 조절이 안 되더라구요.”
그는 아직 총각이다. 김영목 화가나 배수봉 화가, 임정혁 씨 등과 가끔 술 한 잔 하면서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고충을 나눈다고 한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면 작업실에서 음악과 영화를 즐긴다. 고등학교 때 악대부를 했던 인연으로 악기를 다루는데 얼마 전 소프라노섹스폰 하나를 장만했다. 그리고 작업실에 스크린을 설치해 호젓한 극장을 만들어놓고 즐기기도 한다. 힘겹지만 오래도록 걸어가야 할 길이기에 자신을 달래고 북돋우는 방법을 스스로 찾고 있는 것이리라.

그릇 잘 만드는 게 소원
스스로 이제 조금 안정이 되어간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궁색하다. 그래서 때로 팔기 싫은 작품을 팔아야하기도 하고 사고 싶은 장비를 못 본 척 지나치기도 해야 한다. 그런 그가 이것저것 참아가며 돈을 모으고 있다. 올 해 안으로 10평 정도라도 전시실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신같은 작품을 켜켜이 먼지투성이로 쌓아두지 않고 펼쳐 보여줄 수 있는 공간, 수시로 둘러보며 일신우일신할 수 있는 공간이 그에게는 절실하다.
그리고 보다 큰 꿈은 그릇 잘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전자, 항아리, 다기 같은 그릇들을 만들고 마음에 차는 그릇이 구워져 나오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일테니, 그는 행복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그가 새로 하는 작업이 있다. 뒷 산이며 들에서 나오는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일이다. 가까이서 채취한 흙을 점토에 섞어 투박한 그릇을 구워내고 있다. 옻이나 금칠을 한 그릇은 가격이 만만찮아 일반인들이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우리동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일이었다. 평소 내 취향이 분청이나 고려장에서 나온 토기에 더 마음이 가는 탓일까? 내 눈에는 옻칠다구에 견주어 전혀 손색없는 또다른 취향의 그릇으로 완성도가 높았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가고, 옛날부터 소나무와 밤나무가 많아서 솔밤이라고 불렸다는 이 마을에 겨울이 오면 호젓한 전시실에서 그의 세련된 옻칠 그릇과 투박하지만 정감 넘치는 동네 흙으로 구워진 그릇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기를 기대해본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