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철사와 새의 만남 -화가 김영목의 작업실(글/피재현_시인, 노암공방 대표)
예술가들의 술자리에 끼어앉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중들에 저녁이 왔다. 콤바인으로 나락을 거둬들이던 농부들과 논둑에 알뜰히 심어 가꾼 콩을 뽑던 아낙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잠시 들판은 고즈넉한 명상의 시간을 갖는 듯하다. 그러나 이내 제법 찬 공기가 바람에 실려와 온 들로 퍼져나간다. 상강(霜降)을 며칠 앞두고 있으니 내일 아침에는 무서리가 내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개인전을 끝낸 젊은 도예가 한 사람과 이제 막 초대전을 시작한 젊은 화가 한사람이
술 한 잔을 할 것이다. 정신없이 바빴을 두 친구가 한 숨 돌리는 기분 좋은 술자리, 그 술판이 화가의 작업실에서 열리고 그 집 주인이 화가 김영목이다. 나는 거기에 낄 것이다. 친구의 술자리에 내가 끼이면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자리가 조금 위축될 수도 있겠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두 젊은 예술가의 중간에 끼여 앉아 술 한 잔 하고나면 싱싱한 기운을 받아 나도 뭔가 될 성 싶다.
그의 작업실은 내 공방에서 멀지 않았다. 안동시 남선면 현내 2리, 20여 호가 모여 사는 늙은 마을로 들어서는 외통수길 가에 숨어있는 그의 작업실은 외딴집이다. 허름한 농가 같다. 폼 나는 입간판 하나 없고 예술가의 집답지도 않다. 솔직히 좀 실망이다. 폼 나게 술 먹어야 하는데.... 그래. 캄캄한 밤이어서 그러려니, 오늘은 술 마시고 내일이라도 낮에 새로 와 봐야지 하고 들어섰다.
두 예술가와 김영목 씨의 애인이 자리를 함께 했다. 처음 술자리를 하는 세 사람. 어라? 낯을 가리지 않는다? 나도 어지간히 두꺼운데 이건 너무 자연스럽다. 확실히 젊다는 건 좋은 거야! 미처 취재수첩을 꺼낼 사이도 없이 몇 시간이 흘러가버리고 술병이 쌓인다. 나는 인터뷰어 답지 않게 말이 많아졌다. 말이 많아진 정도를 넘어 숫제 내 이야기를 더 많이 해버렸다. 뒤늦게 부랴부랴 카메라를 꺼내고 수첩을 꺼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무슨 술이 이렇게 달단 말인가!
녹슨 철사, 분단조국만 연상되는데...
화가 김영목(33세)과 나는 일면식도 없다. 두어 번 그의 그림을 보긴 했다. 한 번은 지난해 안동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단체전에서였고, 한 번은 다른 이의 작업실을 찾아갔다가 보았다. 멀리서 보기에는 캔버스 위에 철사를 구부려 붙인 작업을 한 줄 알았다가 가까이 가 보고서야 그것이 붓으로 그린 철사라는 것을 알았다. 참 특이하다 생각했을 뿐.
무엇인가를 애절하게 생각하다보면 그 대상에 대한 환영을 경험해본다. 오랜 세월이 묻어나오는 녹슨 철사에서 휘어진 선 사이로 그리운 사람의 잔상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고 유용하게 쓰이다 버려진 철사. 그곳에서 누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도 아닌데 담장 앞에 걸려진 철사는 머릿속에 회상과 함께 다른 형상의 잔상으로 보여지게 된다.
- 김영목 화가의 작업노트 중에서
작업실 벽마다 철사로 그려진 그림이 걸려 있다. 나무도, 총도, 물고기도, 심지어 애인의 모습도 철사로 그려져 있다. 그것도 녹슨 철사들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온갖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물고기도 총도 나무도 붓으로 그냥 그리면 될 것을, 그는 왜 진짜 철사도 아닌, 철사의 선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전생에 고물상을 했었나?
나는 철사를 통해서 ‘분단’을 본다. 임옥상 화가나 오윤 같은 리얼리즘 작가들의 그림을 접하면서 살아온 나로서는 그 사람들이 철사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분단과 장벽의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철사를 통해 모든 것들을 연상한다. 모든 것들이 철사를 통해 표현된다. 그리면 그릴수록 한계를 느끼기보다 새롭게 연상되고 재창조되는 이미지들이 늘어난다.
“어릴 때 철사를 구부려 비행기를 만들면서 놀았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미대에서 철사 설치작업을 했는데 내가 철사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연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한 번 더 시비를 걸어 본다.
철사를 오려 붙이는 것도 아니고 왜 철사를 구부
려 만든 1차원적 형상을 캔버스에 옮겨 그리냐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사람들이 문자(文字)라는 기표(記票)를 통해 문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읽어내듯, 철사는 어쩌면 문자 같은 것이 아닐까요?”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화가의 대답이 아니라 화가의 애인이 한 말이다.
낡고 억압적인 철사의 이미지를 통해서 창조되는 혹은 연상되는 무수한 다른 이미지들, 김영목은 미대를 졸업하던 무렵부터 지금껏 줄곧 그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철사’의 이미지가 그의 그림을 대표하고 있긴 하지만 그의 연상작업이 철사를 통해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알듯 모를 듯 글씨가 드러나는 ‘구름’도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데 구름은 주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보다 열 살이 위여서 늘 그를 업어 키운 누나, 그리고 여섯 살 위의 형, 평생을 소작농으로 사시는 노부모님은 그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태어나고 살아온 이야기들을 구름과 나무를 통해 풀어내는 작업도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한줄기다.
그의 어눌한 이야기를 그의 애인이 채우면서, 빈 술잔은 그의 친구 도공이 채우면서, 그렇게 가을밤이 깊어갔다.
짧게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자던 우직한 사내
경주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어머니가 마흔이 되던 해에 막내인 그를 낳았다. 집은 가난했고, 천성이 성실해 보이는 그는 현실적으로 공고를 선택했다. 건축과를 다니던 그는 데생 구상도를 그리다가 그림에 빠져 버렸다. 짧게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자 싶어 돈 적게 드는 국립대를 선택해 안동으로 유학을 왔다. 그리고 지금껏 한 길, 그림만 그리고 살고 있다. 두건을 둘러쓰고 외롭지만 한 눈 팔지 않고 한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그에게 짝이 생겼다.
안동병원 김종규 선생이 ‘자기가 한 일 중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일이 바로 화가 김영목의 짝을 만들어 준 일이다. 그의 애인은 눈이 맑고 이쁜 서울 아가씨다. 애인이 생기고 지금의 작업실이 생겼으니 그만으로도 복덩어리다.
폐교된 문천초등학교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는 지난봄,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겸한 작업실을 찾아 나섰다. 어렵사리 구한 작업실이 이곳인데 때마침 안동에 땅값이 많이 올라 적잖은 돈이 들었다. 1년 넘게 비어있던 집을 고쳐 작업실을 만들고 신혼방도 꾸몄다. 이상하게 부럽다.
술에 취하다
아뿔사! 발음이 꼬이기 시작한다. 젊은 기운이 좋아서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신 술이 내 양을 넘었다. 좀 부끄럽다. 더 앉아 있으면 눈치 없는 진물이 될 것 같고 이쯤에서 일어나는 것이 마지막으로 내가 자존심도 지키면서 좋은 기운을 고스란히가져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남은 안주가 아깝긴 하지만, 일어섰다. 아무도 잡지 않는다. 일어서길 잘했다.
다시 찾은 작업실
이틀 후 김영목 씨의 작업실을 다시 찾았다.
멀리 갈라산을 앞에 두고 올라가는 놉실로를 따라 양 편으로 반 넘게 벼들이 누웠다. 한 떼의 참새들이 이 밭 저 밭을 옮겨 다니며 경쾌하게 재잘거린다.
영목 씨 혼자서 마당에 나와 섰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처마에 앉았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서 여름 내 간직했던 푸른색을 버리고 있는 포플러 몇 그루를 바라보고 앉은 자리가 행복하다.
그래도 한 번 봤다고 꼬리를 치는 ‘행주’(이 집 개 이름)의 흥분이 조금 진정되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주는 문천초등학교에서 김영목 씨가 직접 탯줄을 끊어준 옆지기의 개 새끼다. 그 인연으로 여자 친구보다 더 오래 같이 살고 있다. 이 집에 와서는 천지사방 쫓아다니느라 들개처럼 되어버렸다.
비어있던 집을 손질해 들어와서 마을에 떡을 돌리고 동네에서 ‘그림 그리는 아저씨’로 불리며 산 지 이제 겨우 몇 달이 지났다. 그렇지만 이곳이 좋다고 한다. 자기 작업을 하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온전한 자기 공간은 그곳이 아무리 누추하다 할지라도 좋기 마련이다. 낮에 다시 와서 보니 제법 부지도 넓고 야트막한 뒷산과 어울린 터가 좋다. 김영목 씨는 이곳 작업실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려도 좋겠다고 말한다. 가마솥 하나 걸고 걸쭉한 개장국 한 그릇 나누면서 그렇게 신부를 맞이하고 싶다고 한다.
사랑에 빠진 눈빛이다. 뜻이 맞는 애인을 만나서 너무 좋다고 자랑을 하는 모습이 어릴 때 우리 외양간에서 키우던 순한 소 같다.
그러고 보니 화가 김영목은 참 꾸밀 줄 모른다. 얼굴도 작업실도 말투도 그렇다. 유일하게 스타일리쉬하게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어서 오히려 그답지 않다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탈모가 있어서 아예 머리를 밀고는 7년째 두건을 쓴다고 한다.
“여기에 들어오고 그림 그리느라 계속 바빴어요. 어떨 땐 열흘씩 밖에 못나올 때도 있어요. 이제 좀 조용해지면 마당도 정리하고 땔감도 더 하러 가야 하고, 할 일이 많네요.”
그렇게 바쁘면서도 일주일에 하루는 지체장애아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러 다닌다. 하다 보니 3년이나 되었다는 그 일을 통해 그는 나눔에 대한 의미를 배웠다고 한다. 아이들과 정이 들고 아이들의 순수함을 배우고,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는 기쁨들, 나에게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마운 만족감.
돈이야 많으면 좋겠지만 돈이 없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는 안다. 이제 좀 자리를 잡고, 15년이 넘어서는 안동살이에 이력이 붙으면 경주에 계시는 어른들을 모셔오고 싶다. 막내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애틋하다. 장인 장모님도 모시고 와서 두 집 어른들도 친구하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젊은 사람이 별 생각을 다한다.
버리면서 얻은 전업작가의 길
이 좋은 가을날 젊은 사람이 너무 작업실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 아니냐 했더니, 그렇잖아도 애인과 창녕을 다녀올 생각이란다. 하왕산 갈대밭이나 우포늪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직 가보지 못했다고.
그는 불쑥불쑥 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니다 보면 재충전도 되고 새로운 연상의 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일기를 쓰듯 메모를 하고 고갈되지 않는 상상력을 즐기며 다니다 보면 그의 그림에는 어느새 새가 들어와 있고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녹슨 철사와는 이질적인 예쁜 새와 다람쥐 나비같은 것들이 화려한 색체로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어떨 때는 철사로 만든 달 위에 앉아 있고, 어떨 때는 애인의 머리 위에, 첼로의 선율 위에 살포시 내려앉기도 한다. 때론 따뜻하고 때론 고독하다.
“직장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워해요. 넌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서 좋겠다고 하는데 사실 이 길이야 포기하면서 얻은 길 아닌가요? 포기하는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길, 그래서 후회도 없고 행복해요.”
가을 햇살에 푸른빛을 버리는 나뭇잎처럼,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드는 나뭇잎처럼, 힘겨운 길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의 길이 그의 애인이 말하듯 평생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