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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잠자리(글/반윤희_수필가, 서양화가)

후텁지근한 바람이 창문을 흔들어 놓더니 비가 줄기차게 쏟아져 내린다.
가장 편한 자세로 신문을 읽고 있는 내 옆에 누워서 비몽사몽간에 옹알이를 하던 애완견 ‘또미’가 요란한 빗소리에 내게 바싹 달라붙어 오들오들 떨고 있다.
번쩍, 우르릉 꽝, 하는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진 ‘또미’는 내 품으로 펄쩍 뛰어 들어와 와들와들 떨며 쿵쾅쿵쾅 울리는 심장 박동소리가 내 가슴속까지 전이되어 한 몸으로 흔들린다. 또 한 차례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어둠속에서 쏴하고 바람에 실려 온 빗줄기가 열린 창틈으로 마구 뛰어든다.
창문을 닫으며 바라보는 아스팔트 위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그 모양새가 마치 가마솥 뚜껑을 비스듬히 제쳐 놓은 듯하다. 순식간에 도랑물을 일으키던 비가 그치고 용마산 쪽 하늘이 훤히 열렸다.

나는 다시 창문을 열고 온몸으로 마구 파고드는 싸-아한 상쾌한 공기와 싱그러운 풀냄새에 오관을 다 열고 몸을 맡긴다. 시원하게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온갖 번뇌를 몰아간다.
어느새 나왔는지 참새는 베란다 창틀을 타고 쪼르르 옆으로 가더니 창 앞으로 드리워진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서 좁쌀만 한 까만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나를 향해 갸우뚱갸우뚱 거리더니 꼬리를 까불까불 까불락 흔들어 대며 짹짹거린다. 그런 몸짓이 마치 살아있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랍니다. 하는 듯하다.
까치도 전봇대 위에서 까르륵 깍깍거리더니 포물선을 그으며 맑게 갠 하늘 속으로 잠겨갔다.
나뭇잎들은 햇빛을 받아 더욱 더 푸르러 눈이 부시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빨간 고추잠자리가 무리 지어 날며 푸른 하늘 속으로 나를 유인한다.

나는 한때, 여고를 졸업하고 화가가 되고 싶었던 내 꿈을 접은 채, 대망의 꿈을 안고 외지로 떠난 친구들의 환상으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군수비서로 취직한 친구 홍숙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대추 찰 방망이같이 야무지고 예뻤던, 나와는 여고동창이었다. 앞가르마를 곱게 타서 엉덩이까지 땋아 내린 윤기나는 반지르르한 머리타래를 그네처럼 흔들고 다녔다. 여학교 때 배구선수로 운동을 했던 그는 고향에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던 친구다. 그런 홍숙이가 미팅을 주선하여 친구 십여 명을 ‘고산서원’ 뒤 소나무 숲속으로 집결을 시켰다. 상대는 방송국, 신문사, 관공서에 다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팀이라고 했다.
여고를 졸업하고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라 우리들은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치장을 하고 길을 나섰다. 그때가 바로 고추잠자리가 무리지어 나르며 우리들을 무릉 유원지로 유혹을 했었던 시절이다.
무릉유원지는 안동에서 의성 쪽으로 낙동강 다리를 건너 신작로를 따라 한 십리 쯤 되는 데에 있다. 미루나무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끝없이 이어지는 신작로 양 옆으로 사과밭과 딸기밭이 이어져 있고 낙동강 물길이 흘러가 모여서 소(沼)를 이룬 곳이다.

앞쪽엔 수려한 산으로 이어져 내려온 끝자락에 우리나라에선 유일하다고 하는 자연적으로 생겨난 신작로 굴이 보인다. 길 밑으로 늪과 깊은 강을 이룬 무릉 유원지에는 남녀 쌍쌍이 앉아서 조각배를 저으면서 둥둥 떠다니고,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야산의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속에 ‘고산서원’이 있다.
우리들의 미팅은 그 곳에서 이루어졌고, 그때 한창 유행이었던 트위스트 춤을 카세트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온몸으로 정열을 발산했었다.
그 시절 안동에서는 처음으로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방송지국이 두 곳이나 생겼고, 36사단이란 부대가 있어서 여고시절 김장봉사도 해마다 가곤 했었는데, 졸업 후 훈련소로 바뀌는 바람에 ROTC 장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자 “순진한 양반 골의 안동 처녀 다 버린다.”고 집집마다 처녀단속이 심했었다.

홍숙은 어느 날 우리들에게 또 바람을 넣었다. 사단의 장교 팀과 두 번째 미팅을 정하였는데 소문이 두려우니 영주 부석사에서 만나기로 했단다. 정류장 옆에 있는 우리 집에서 친구들이 모두 자고 새벽 네 시에 버스를 타고 안동을 탈출했다.
부석사 옆 소나무 숲 속에서 제비뽑기로 짝을 정하고 수건돌리기, 손뼉 쳐 무릎치기 등등 게임이 벌어졌다. 신나게 게임이 진행되는 중에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수로
쏟아져서 혼비백산했다. 갑자기 흙탕물이 부석사 담벼락 옆으로 골을 만들면서 흘러내렸다.
물줄기를 간신히 피한 우리는 부석사 난간으로 기어들어가 비를 피하고 오들오들 떨고 있자니 어느 사이에 비가 그치고 앞이 훤히 트이더니 햇볕이 쨍쨍 났다.
모두들 주섬주섬 보따리를 싸들고 풍기역으로 향하여 깔깔대며 사과밭을 끼고 걸었다.
파란 하늘 저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결이 붉게 익은 사과를 어루만지고, 매미소리에 맞춰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무리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후 우리들은 십리 길도 가깝다고 빼딱구두를 치켜 신고서 무릉으로, 의성고운사로, 풍기 희망사로, 영호루가 있는 낙동강으로 잘도 몰려다녔다.
그러나 우리를 그렇게 즐겁게 해주던 홍숙은 백혈병으로 스물세 살에 우리들 곁을 떠나갔다.
오늘처럼 비가 그치고 빨간 고추잠자리가 날면 나는 고향에서 친구들과 놀던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지곤 한다. 그러면 늘 가슴에 품었던 그림에 대한 그리움이 미련으로 떠올라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아는 남편은 쉰 살이 다 된 어느 날 미술도구 일체를 갖추어 주면서 아직도 늦지 않았다며 용기를 주었다.
나는 글을 쓰는 중에도 틈을 보아, 시골마을로 산으로 강가로 나가 이젤을 편다. 그리고는 하-얀 캠퍼스에 못다 한 나의 노래와 꿈을 덧칠한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천둥 번개 속을 표류하다가 뭍으로 기어 올라온 듯하다.
나도 이제는, 저 푸른 하늘에서 자유로이 유영(遊泳)하고 있는 빨간 고추잠자리처럼 마음껏 날고 싶다.<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