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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의 시간여행, 연극 <설공찬전>과 뮤지컬 <정도전>(글/임지희_안동대 국문과 겸임교수)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즐겁다. 특히 연극을 통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생동감과 입체감을 더해 주어서 즐거움이 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1월 30일과 12월 1일에 안동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설공찬전>은 한글소설 <설공찬전>을 테마로 하여 만든 연극이다. 또한 12월 8일과 9일에 영주 아트파크에서 공연된 뮤지컬 <정도전>은 정도전의 일대기를 테마로 하여 만든 연극이다.

권력욕에 눈먼 세상에 대한 경고 <설공찬전>
<설공찬전>의 무대는 커다란 마루가 무대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뒷면은 한옥 방문으로 셋팅되어 있으며 무대왼쪽 공중에는 풍경이 매달려 있다. 막이 열리면 풍경소리가 단아하게 울린다. 주인공 설공찬의 아버지인 설충란은 공찬의 유골을 안고 마루 위에 오르면서 공찬을 목놓아 부른다. 설충란이 아들 공찬을 그리워하는 장면은 매우 조용하고 느리게 진행된다. 설충란의 동생 충수가 찾아올 때까지는. 설충수의 등장과 더불어 극은 조금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

충수는 충란에게 이렇게 유배지에서 죽은 아들만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다시 조정에 들어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충란을 설득하지만 충란은 ‘이 세상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입을 닫아 버린다. 여기에서 충란의 고고한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충수는 형인 충란을 조정에 들게 하여 자신의 아들 공침도 관직을 얻게 하려는 속셈이다. 인물의 대비는 설충란과 설충수로 이루어지고 이들 형제들의 대비를 통하여 관객들은 이들 아들들의 성격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설충수가 설충란을 조정에 들게 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사용하여 설득할 때 오매당부인이라는 인물이 설충수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오매당부인은 설충란이 조정에 들어가면 자신의 딸이 왕후로 간택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설충수의 조력자가 된 것이다.
설공찬은 일찍 죽은 자신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는 아버지를 보며 가슴아파한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기쁘게 위해 이승에서의 20일을 얻는다. 설공찬은 동생 공침의 몸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동생 공침은 주색잡기에 빠져 글공부는 등한시하는 인물이다. 공찬이 공침의 몸으로 빙의되는 장면에서 공침역의 배우는 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성격변화와 인물변화의 모습을 무척이나 잘 소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두 인물을 오가는 연기는 그야말로 신들린 듯 했다. 목소리와 표정과 절묘한 호흡의 전환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설충수는 정익로 대감이 유람을 목적으로 형이 있는 유배지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돈으로 매수하여 형이 유배된 집까지 오게 한다. 또한 설충수는 점술사를 불러 공침의 몸에서 공찬을 쫓아내려 한다. 그러나 공찬이 ‘공침의 몸을 빌려 자신의 학식으로 관직을 얻는다면 이것이 공침의 관직이 아니겠냐.’는 제안에 동의하게 된다. 정익로 대감이 설충란이 유배된 집에 오는 날 설충수, 오매당부인, 오매당부인의 딸이 함께 모여 있다. 공침의 몸에 든 공찬은 정익로의 물음에 자신의 학식을 십분 발휘하여 성심성의껏 대답하지만 결국 정익로가 원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아부뿐이다. 공찬은 권력의 속성과 그로 인해 세상과 담을 쌓아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공찬은 이 사람 저 사람의 몸을 오가며 인물들이 가지는 권력의 속성을 드러낸다. ‘내가 너에게 굽신거리는 것은 내 아들의 관직을 얻기 위함이야.’, ‘돈이라는 것,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세상에서 권력이 있다라는 것은 뭐야?’, ‘추구해야 할 가치보다는 돈과 권력에만 눈이 멀어가는 너희들.’ 공찬이 이 사람 저 사람의 몸을 돌아다니며 진행되는 이 장면은 이 연극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데 배우들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 교체되는 빙의 연기를 펼치기도 하고 짧은 시간과 시간 사이에 교체되는 빙의 연기를 숨 가쁘게 펼쳐나간다. 두 인격을 오고가는 배우들의 연기와 서로 인격이 교체되는 빙의연기의 호흡은 가히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소설인 <설공찬전>은 주인공 설공찬이 공침의 몸을 빌려 몇 달 동안 자신이 저승에서 머물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승에 어진 재상이면 죽어서도 재상으로 다니고, 이승에서는 비록 여편네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 하면 저승에서 아무 소임이나 맡으면 잘 지낸다. 이승에서 비록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이러한 소설 <설공찬전>의 사회비판적인 내용 때문에 금서가 되었고 책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기까지 했다고 한다.

<설공찬전>은 이러한 소설의 내용을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핵심을 모으고 있다. 설공찬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로 몸을 옮겨가며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권력의 모습을 다각도로 그려내면서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은 권력의 문제에 집중하여 권력에 눈 먼 세상을 비판하고 있지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 연극은 설공찬을 저승으로 보내면서 하는 설충란의 대사를 통해 막연하게 선답을 제시할 뿐이다. 설충란은 설공찬에게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며 너의 갈 곳으로 가라.’고 한다. 설공찬이 저승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설충란은 ‘빈 손이 빈손이 더 무겁구나.’, ‘가진 손보다 빈손이 더 무겁구나.’라는 대사를 한다. 이 대사는 풍경소리와 더불어 선(禪)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러한 극의 결말은 극단의 목표와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극단 <신기루 만화경>은 이름처럼 ‘인위로 만들어진 이념 혹은 한 개인의 특정한 미학적 가치 추구를 목표로 하지 않으며 드라마와 무대를 통하여 지금 이곳의 인간과 세상을 통찰하고 그 공감의 장을 열어 가는데 의미를 두는 집단이다. 신기루처럼 잡혀지지 않는 허상 같은 삶 혹은 세상을 천태만상으로 변화해가는 추억의 그림, 만화경 속에 담아내려는 움직임 그것이 우리 극단의 소박한란 의미이다.’라며 자신들을 소개한다. 연극을 통하여 세상을 통찰하며 공감의 장을 열어가는 것도 연극의 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연극을 통해 세상살이에 해법과 답을 모색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것은 이들에 대한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른다.

백성이 근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정도전>
<정도전>의 첫 장면은 초상화 속에서 걸어 나와 자신이 설계했던 서울의 오늘날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도전과 현재의 서울 사이에는 투명한 샤 막이 쳐져 있다. 자동차의 물결과 고층건물이 영상으로 비쳐지고 젊은이들의 발랄한 모습은 배우들이 나와 연기를 한다. 정도전은 이들을 바라보며 노래로 회상의 시간을 가진다.
‘육백년의 죽음처럼 반역이라는 멍에가 눈꺼풀을 눌러 난 보지 못했네……. 육백 년 전 나 정도전 아무도 꿈꾸지 않는 꿈을 꾸었지. 백성이 근본인 세상 권력이나 금력을 이용해 빼앗거나 훔치지 않는 세상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은 세상 민본의 이상이 도도히 흐르는 세상…….’

<정도전>은 처음 장면에 이러한 노래로 정도전의 사상을 강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정도전의 사상은 대사로 처리하는 것보다 더 강렬하게 관객에게 다가오는 효과를 준다. 그 다음 장면부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도전의 일대기를 그려내고 있다. 이 일대기에서 중요한 핵심으로 그려지는 것은 정도전의 개혁의지이다. 영주 삼판서 고택에서 어린 시절 학문을 수확하던 소년 정도전은 한 때 자신의 집 노복이었던 가희아버지와 가희를 구하게 되고 이것은 뭔 훗날 가희가 자신의 호위무사가 된다는 복선의 역할을 한다. 이 장면 이후의 정도전의 행보는 혼란하고 부패된 고려에서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노국공주와
공민왕, 신돈이 등장하여 부패한 고려의 모습을 노래하고 원을 내치고 명을 가까이 하고 사병을 혁파하여 국방력을 길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귀양을 가게 된다. 그는 귀양에서 돌아와 7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며 관리들의 폭정에서 곤궁하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가슴아파하며 개혁의 의지를 다져나간다. 삼각산에서 움막을 짓고 학문에 정진할 때 도적떼를 만나게 되고 무사가 된 가희가 나타나 정도전을 구한다. 장면이 바뀌어 함경도로 가서 이성계를 만나 바른 세상에 대해 논의한다. 그 다음 장면에서는 정몽주와 격한 논쟁을 벌인다. 이 논쟁은 빠른 템포의 곡으로 정도전의 개혁의지와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역성혁명은 안 된다는 정몽주의 입장이 잘 드러난다. 이방원의 하여가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정몽주.

정도전은 서울을 설계한다. 경복궁과 사대문을 세운다. 이 장면은 샤 막 뒤에서 활기차게 일하는 사람들과 샤 막 앞에서 정도전의 지휘와 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더불어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세자 책봉에서 제외된 이방원과 방원의 처에게는 정도전이 눈의 가시다. 정도전은 드디어 자신의 개혁의지를 펼친다. 왕자들과 귀족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그들의 토지를 빼앗아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요동을 정벌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다. 제도를 정비해 지혜로운 신하를 등용해 나라를 다스리려는 정도전. 이러한 장면은 왕자들과 귀족들의 사병을 혁파하라.라는 정도전의 굵직한 목소리라 울려 퍼지고 배우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장면이 처리된다. 정도전이 자신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는 이 장면에서는 많은 관객들이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박수를 친다. 정도전이 원했던 이상 국가의 실현은 지금 이 시대와는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날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는 과거의 정도전과 현재의 관객들 모두가 간절히 원하는 염원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이 신나게 박수를 치는 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대한 현재적 갈망일지 모른다.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고 가희를 고향에 보낸다. 그는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뒤늦게 달려온 가희는 정도전의 주검을 안고 노래한다. 이 가희의 노래는 정도전의 죽음이 단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님이여 못다 이룬 꿈 서러워말게 그대의 꿈 다시 또 누군가의 꿈이 되리니 다시 또 누군가의 꿈이 되리니…….’ 이 노래의 가사는 그대의 꿈이 다시 또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이를 강조하고 있다. 이 노래는 밝은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말자는 현재적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 가슴 뭉클함을 선사한다. 몇몇 관객은 눈물을 닦기도 하였다. 마지막 장면은 처음 장면과 동일하다. 샤 막 뒤에는 현대의 모습이 비쳐지고 그는 노래한다. ‘백성이 근본이 세상,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세상, 민본의 이상이 도도히 흐르는 세상…….’ 이 마지막 장면은 정도전은 600년 전에 죽었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사상과 꿈은 아직도 우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설공찬전>과 <정도전>은 한 마디로 잘 만들어진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탄탄한 스토리와 연출력,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합세하여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길 수 있는 연극이었다. <설공찬전>이 소설 <설공찬전>의 비판정신을 수용하여 권력욕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경계로 소설을 새롭게 해석하였다면, 뮤지컬 <정도전>은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실천하려 했던 개혁의지에 시각을 맞추어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특히 뮤지컬 <정도전>에서는 정도전을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시킨다. 서사문학에서 전형적인 인물은 그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보편적인 특성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면서 더불어 개성이란 모습을 취하여 생동하는 인물이다. 특히 전형적인 인물 창조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정도전>에서 보여주는 정도전의 전망은 현재의 관객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지게 한다. 또한 역사의 변화를 주도적으로 실천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역사의 참된 주체는 자유의 자기의식의 실현이라는 것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정도전>은 영주시와 세계유교문화재단에서 기획한 공연이라고 한다. 이 공연은 지난여름 안동에서 기획된 공연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안동에서처럼 실외의 웅장한 실경을 무대로 사용하지 않고 실내 공연장을 사용하였지만 그 내용은 무척 알찬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희곡의 높은 완성도와 주제의식을 돋우는 적절한 음악의 사용, 배우들의 연기력과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연극이 관객들과 만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의 충실함이다. 연극 무대의 화려함과 배우들의 수가 많다고 해서 관객들의 호평을 받을 수 없다. 좋은 연극은 관객들이 먼저 알아차리는 법이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