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정취 품고 사는 연기파 배우 손병호(글/김영희_과천 사는 안동 사람, 객원기자)

고향의 정취, 배우 손병호의 감성의 밑거름
설날 고향집에 4남매가 모였다. 문어와 산적, 잡채 등 푸짐한 안주를 한상 차려와 안동소주를 한두 잔씩 마셨다. 술이 좀 과했던지 작은 오빠가 어릴 적 얘기를 꺼내 서러워진 우리 남매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래도 우리는 잘 자랐지 않았냐는 말에 전적으로 수긍하지는 않았지만 어설프게는 동의했다.
강물이 돌돌돌 흐르는 뚝방길을 걸으며 우리 마을을 둘러보았다. 각자 오래된 상처를 가지고 살지만 어설프게나마 동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건 바로 우리의 놀이터였던 샛강과 달맞이꽃 밭이던 뚝방길과 사계절 우리의 군것질 창고였던 뒷산과 마을 꿀밤나무 숲, 그리고 매일 그 풍경 속을 뛰어다니던 동무들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일에 지친 부모가 우리를 돌보지 못해도 부족한 물질이 상처를 줘도 동무들과 자연 속에서 부대끼며 서로 위로하고 인내하며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보면 그동안 내가 만났던 안동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정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상처 받은 영혼을 쉬게 하고 위로해줄 그 고향의 자연 속에 가고 싶다는 것과 그 동무들을 만나고 싶다는 것일 것이다. 이번에 내가 만났던 배우 손병호(1962년 오대 출생)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여섯 살 때 고향 오대를 떠나 서울로 이주했지만 중학교 때까지 방학마다 내려와 머물렀던 고향의 정취가 그의 감성의 밑거름이 되었고 연극인 손병호의 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손병호 씨는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하고 연극, 드라마, 영화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하며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유명 연예인이다. 마침 취재 무렵에는 SBS 드라마 <대풍수>에 최영 장군으로 분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고, 아침 프로그램 <여유만만>에도 출연해 무용가 아내 최지연 씨와 늦게 얻은 두 딸 지오, 지아와 함께하는 단란한 일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이 먹을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 더 깊어져
김영희(안동)
  얼마 전 끝난 KBS 드라마 <각시탈>에 극단 단장님으로 나오셨죠? 함께 출연했던 박기웅 씨를 작년에 취재한 적이 있어서 처음부터 유심히 봤습니다. 안동분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요.


손병호(손)      예. 저도 그 친구랑 안동 얘기 했습니다. 기웅이는 젊은 친구지만 아버님과 안동에 대한 애틋한 정이 많더라구요. 사실 여섯 살 때 서울로 왔지만 제 고향은 길안 오대고 아버지가 손씨 집안 장손이었고 외가는 진보예요. 지금도 안동 시내에는 고모님 이모님 사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자주 내려가지 못하지만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방학만 하면 누나랑 오대에 갔어요. 할머니도 계시고 저를 유난히 예뻐해 주던 막내 고모도 계시고 지금 생각해보면 삼촌뻘이지만 동네 친구들 형들도 많이 있었으니까요. 그때는 사과를 안 하고 수박밭 참외밭이 많았어요. 원두막도 있고. 뒤에 산이 있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일반적으로 고향 하면 생각나는 그림들이 있는데 바로 우리 동네가 그런 곳이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축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3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거였어요. 주변 사람들도 시골 정취를 아는 분들이 있지만 호롱불 생활한 것은 모르더라고요. 눈 내리는 달밤이라든지 호롱불 심지 돋우던 그 기억은 정말 가슴 저린 것이죠.”


안동/ 시골 정취를 제대로 느끼고 계시네요. 그런 연기를 하시면 정말 잘하시겠어요.


손/ 그럼요. 소 달구지도 타보고 지게도 져 보고 서리란 서리는 다 해봤고, 제가 소설가 이문구씨를 좋아하는데 그분이 쓴 글의 문구나 정서가 다 이해가 되요. 특히 연기자로 살면서 고향이 주는 정취가 저를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나 지금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죠. 


안동/ 특히 기억나는 재미난 일이 있으신지?


/ 재미난 일 많았죠. 다 기억나고요. 지금은 중앙고속도로가 뚫려서 얼마나 편하게 갈 수 있는지 몰라요. 예전에 영등포 쪽에 살 때는 구로동에서 청량리까지 차를 타고 가서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안동에 도착하면 벌써 저녁이예요. 지금은 안동대학교 앞에 다리가 잘 놓여져 있지만 강물이 불어서 못 갈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뱃사공이 강을 건너줬어요. 거기서 오대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어요. 버스를 타고 갈 때도 비포장 도로를 덜컹거리면 엉덩이가 붕붕 날았죠. 또 늦은 시간에 도착하면 오대 앞에 외나무 다리가 어두워서 잘 안보여요. 그럼 며칟날 간다고 편지를 받은 동네 친척들이 짚단 불을 들고 기다려주고 그랬어요. 물에 빠질까봐 업어주기도 하고. 겨울밤에는 화투를 잘 쳤어요. 할머니들은 할머니들끼리. 고모는 고모들끼리. 처자들은 처자들끼리. 우리도 또래들끼리 동네 어디 방을 하나 찾아서 화투를 쳤죠. 모두 삼촌 사촌들이죠 다 손씨 집안이었으니까. 지면 무 서리를  해야 하는데 제가 걸렸어요. 친구하고 둘이 방앗간집을 털자 했죠. 시골에서는 방앗간집이 그래도 제일 잘 살잖아요. 구덩이를 볏짚으로 막아놓았어요. 살며시 뽑고 두세 개 꺼냈는데 누구로? 하는데 보니까 형 친구예요. 임마들 또 화토쳤제? 하면서 그냥 이해해 주고 퍼주고 하던 그 따뜻했던 마음도 생각나고요. 또 하나 정말 얘기하고 싶은 것은 ‘모둠’이라는 것인데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이 말이 너무 좋아요. 누나하고 내가 이제 서울로 가야할 때가 되었어요. 그럼 누가 이제 모둠 해야되지 않겠나 해요. 그럼 있는 집에서 돈을 얼마쯤 내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쌀을 한줌씩 모아요. 그 모은 쌀로 밥을 했어요. 여자들이 밥을 하는 동안 남자들은 고기를 잡고 매운탕을 푹 끓여요. 그리고 그 밥을 먹었어요. 그게 송별식이었죠. 집에 있는 걸 같이 섞어서 같이 나누어 먹고 시간과 공간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의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가슴 속에만 있다는 것이 너무 아쉬워요. 삼촌들을 보면서 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저렇게 강할까 했는데 제가 나이를 먹으니까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고향에 뼈를 묻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액션 손 멋모르고 뛰어든 연기에 푹 빠지다
그리고도 한참이나 더 어린 시절 얘기를 했다. 엄마가 끓여주던 골부리국이며 돼지 잡던 날의 기억, 구석구석 떠도는 동네 귀신이야기 등 시간만 있었으면 책 한권을 쓰고도 남았으리라.


손/ 그러고 한참 못가다가 고3 때 대보름날 바람도 쐴 겸 비자금도 축적할 겸 엄마 따라 오랜만에 오대에 내려갔죠. 3년 사이에 많이 변했더라고요. 도로도 넓어졌고 전기도 들어와 있고 집 사이로 흐르던 시냇물도 황폐해진 것 같고. 우리 집이 종가집이라서 언덕 위에 있었는데 모과나무 감나무 앵두나무가 늘어서서 엄청 올라가던 언덕길도 조그맣고 공설운동장만하던 마당도 되게 작아보이더라구요. 이렇게 작았는데 나는 크게 생각했구나 하고 보니 내가 컸더라구요. 그러니까 좀 멀어지대요. 그러다가 잊혀졌어요. 할머니도 우리 집으로 오셨고.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가까운 시립묘지로 모셨고. 할아버지 산소만 거기에 있고 아무도 없어졌어요. 다시 고향 얘기가 나온 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0년이 되던 때였죠. 시립묘지에서 연장 할거냐고 묻더군요. 그때 형제들이 모여서 의논을 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다 떨어져 있는것 보다 한곳에 모여 있는게 좋지않겠냐 해서 고향 선산에 가족납골묘를 하기로 하고 아버지하고 저하고 형하고 터를 잡으러 갔어요. 이제 거기에 다 계시죠.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거기로 가셨고 형님도 재작년에 거기로 가셨고. 얼마 전에는 사촌들하고 고향에 작은 집을 마련하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했어요. 작은 터라도 있어야 가끔 내려가 놀기도 하고 제 딸들한테도 고향을 보여주고. 자주 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긴 하지만 고향의 연은 그렇게 이어가고 있지요.


안동/ 어떻게 연기자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 아버지가 서울에 오셔서 건축사업을 하셨는데 스물 몇 번은 이사했었던 같아요. 중학교 때는 독산동 2층 집에 살았는데 피아트도 있고 외제차가 2대나 있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시흥에 빌라촌을 지으려고 하시다가 일이 잘못되어서 완전히 집에 딱지가 붙고 난리가 났지요. 그걸 저희들이 지금까지 갚았어요. 특히 막내가 아버님 모시고 살면서 고생을 했죠. 당시 경희대에 붙었는데 집이 그렇게 되고나니까 돈 문제가 생겼어요. 그래서 대학을 포기하고 바람이나 쐴까 하고 오대를 간 거예요.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다가 연기를 하면 되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걸 잘했어요. 사람들이 커서 이기동 되라 배삼룡 되라 그랬거든요. 고등학교 때는 이소룡에 빠져서 흉내도 잘 냈는데 제 별명이 ‘액션 손’이었어요. 그래서 연기학원에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어요. 당시 대학 등록금이 38만원 정도 했는데 학원 등록금이 40만원이에요. 아버지한테 말씀드렸죠. 이것만 해주면 알아서 하겠다고. 어떻게든 마련해 주셨어요. 그게 연기자의 길로 가는 계기가 되었어요. 연기학원에 다니면서 곧 스타가 될 줄 알았는데 2-3개월 지나다 보니 비전이 없었어요. 고민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극단을 소개해줬어요. 프로 극단에 가서 포스터도 붙이고 청소도 하면서 단역으로 첫 무대도 섰는데 사건이 많았어요. 우여곡절을 겪었죠. 극단 생활을 하다 보니 더 성장하려면 공부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꿈을 꾸는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서울예전 연극영화과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신입생환영회에서 봉산탈춤을 보여주는데 사자춤에 반했어요. 저건 내거다. 어떻게 해서든 저 사자춤을 추리라 생각했죠. 결국 탈춤반 회장을 하며 2년 동안 원 없이 사자춤을 주고 드라마센터를 제 집인 양 살았어요. 너무 풍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취객의 달인 손병호
안동/
연극으로 먼저 자신의 이름을 알렸듯이 극단 목화 단원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손/   극단 목화라는 이름을 얻기 전에 오사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어요. 1학년 때 오사단에서 무슨 작품인가를 하는데 포스터를 붙이고 도와줬어요. 그때 오태석 선생님을 처음 만나고 연극도 봤는데 이해를 못했어요. 그냥 학교에서 제 생활을 했지요. 졸업 무렵 우연히 동랑레퍼토리극단에서 리어왕이라는 작품을 안민수 선생님이 연출을 하셨는데 최종원, 박영규, 이희도 등 내로라하는 선배들과 함께 저도 막내로서 출연하게 되었어요. 연극이 뭔지 예술이 뭔지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생 최고의 연극노트가 그때 만들어졌어요. 학교에서 추상적으로 배우고 공부했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서 틀이 갖춰지게 되었던 것이죠. 정말 큰 공부가 되었어요. 나름 연극에 대한 정립이 되어 있던 때 군대 가서 휴가를 나왔는데 마침 오 선생님 작품을 보게 되었어요. 한마디로 충격이었어요. 너무나 이해가 되면서 도대체 저 사람 머리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너무 궁금하다 생각했었죠. 군대 다녀와서 돈도 벌어야 했고 현대뮤지컬 극단에 들어갔는데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장래를 위해서는 더 큰 꿈을 가져야 되겠다 생각하고 29살에 큰마음을 먹고 다시 걸레질을 하리라 각오를 하고 오 선생님을 찾아갔죠. 정말 수모를 많이 겪었어요. 나름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대사도 안주시고 처음에 음향을 했어요. 사실 음향도 쉬운 게 아니라 연극의 호흡을 좀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긴 해요. 서서히 하나하나 배워가다가 <춘풍의 처>라는 것에서 배역을 받아서 연습하는데 오 선생님의 훈련은 진짜 고통이었어요. 93년도에 개관기념공연으로 했는데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한 것 같았죠. 근데 그 어려운 작품이 저를 변화시킨 작품이 될 줄은 몰랐죠. 그 작품을 일본에서 공연하게 되었는데 일본 가니까 말이 중요하지 않았어요. 캐릭터 분석이나 이제까지 제가 갖고 있던 연극의 틀이 다 깨진 거죠. 대사에 신경 쓰지 않으니 연극의 흐름에 맞추어서 놀기 시작한 거죠. 오 선생님의 연극은 놀이라는 게 바로 이거였구나 깨달은 거죠. 그 후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두 번 몸을 던졌는가>라는 연극이 대학로에 올려졌는데 제 이름을 알린 연극이 되었어요. 제가 나오는 부분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저를 보러 왔다니까요. 매진이 되고요. 취객의 달인 손병호. 이게 기사 제목이었어요. 그때부터 자신감이 생기고 뭘 해도 될 것 같고 나름대로 터잡이가 된거죠.


안동/ 큰 깨달음을 준 선생님이 계셨군요.


/ 제 인생의 스승이라 할 만한 분이 한 분 더 계신데 김봉운(츠카 코우헤이)이라고 제일교포이신데 일본 연극계의 거장이죠. 일본 연극계는 츠카 코우헤이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고 일본 수상과도 대담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에요. 이분이 저의 든든한 스승이 되어주셨죠. 절 인정해주고 기자들한테 소개해주고 믿어주셨죠. 그게 저의 큰 자부심이 되었어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연극과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제 영역을 만들면서 오늘까지 왔죠. 살면서 많은 인연을 만나는데 저는 다행이 좋은 친구들 좋은 선생님들 좋은 아내를 만났어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그래서 저도 제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 좋은 스승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모든 것의 중심 인간, 그래서 알수록 두려운 연기
안동
/ 이젠 어떤 연기도 자신 있게 하실 수 있겠어요.
/   오히려 지금은 두렵다는 마음이 있어요. 예전엔 옳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밀어붙였는데 지금은 어떤 게 더 맞을까 찾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죠.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것이죠.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아요. 배우는 특히 인간을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항상 고민합니다. 제가 할 몫이 있다는 것이 늘 감사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지금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방송에 소개되었듯 그는 얼마 전 평창동 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지하에 연습실이 딸려 있는 것이 이 집으로 오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대표로 있는 극단 단원들과 몇 년 전부터 계속 작품을 하자하자 말만 해왔는데 올해는 정말 뭔가 해보려고 한다고.
인터뷰 내내 시츄 한 마리가 주위를 맴돌면서 딸기를 달라고 졸랐는데 그는 입으로 베어서 입에 넣어주곤 했다. 아홉 마리를 키웠는데 다 먼저 가고 마지막 한 마리가 남았는데 16살이란다. 한눈에도 늙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오래 함께 살아온 가족으로서 유대감이 느껴져 보기 좋았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우리 코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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