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이 많은 시대와 읽어야 할 시집의 거리(글/한경희_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김종인, 정선호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나란히 ‘시에’에서 2007년 7월과 9월에 시집을 낸 것을 보니 두 사람 면식 정도는 모르겠으나 시로 엮인 인연은 가벼운 것일 수 없지 않을까. 김종인 시인은 1983년에 등단을 했으니 시인이 된지 24년 된 구력을 지닌 분이고, 정선호 시인은 7년이 되었다. 초심으로 돌아간 김종인 시인이나, 첫 시집을 내는 정선호 시인의 초심은 그리 다른 마음자리는 아닐 것이다. 김종인 시인 역시 시를 두고 시인 된 시간이 고민의 세월이었음을 그의 발문에서 고백하고 있는데 그의 결론은 “진시眞詩찾기”로 모아진다. 특히나 조선의 쟁쟁했던 시인의 신념이 담긴 시론을 꺼내놓고 거울 삼을 요량을 크게 하고 있다. 김종인 시인이 닿은 마음의 수평선, 그 크기와 정선호 시인의 몸속의 지구는 시를 담을 그릇들이 아닐까.
처음 시집을 내는 시인이든 다섯 번째 시집을 묶는 시인이든 당신들의 시 앞에 마음자리가 편할 리는 없다. 거기다가 시인이 쏟아지는 세상이다 보니 시인 또한 이 시대가 마뜩한 것도 아니다. 특별히 자신의 시집을 두고 따가운 반성을 먼저 내는 형식을 선택한 것도 이 시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냉소적인 평론가가 애정 없이 쏟아놓은 시인론을 강은교 시인이 시를 통해 멋지게 응수한 적이 있지 않은가. 애정이 담긴 시인론으로 맞장을 뜨는 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시인의 시 쓰기는 어떻게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가. 어디를 가나 먹고 사는 일이 제일 문제인 세상이 되었다. 아무리 비교해도 우리가 언제 이보다 더 잘 먹고 산 적이 있었는지 헤아릴 길이 없는데 참 이상한 현상이질 않은가. 시인들은 솔직히 이 일에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워했으나 여전히 시 쓰기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각오를 이야기 했다.
김종인, 『내 마음의 수평선』, 시와에세이, 2007
김종인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은 시인이 찾고 있는 “진(짜)시”로 가닥을 잡아보면 어떨까. 생활과 현실에 밑줄 긋는 시를 ‘소 찾듯’ 찾아가는 시인의 시력은 그간 여러 시집에서 이미 봐 왔다. 건강한 서정과 시 정신을 지켜내자는 그의 의지는 생명체가 전자제품 단종 되듯 매일 사라지는 지구 위에서 매우 다급한 현실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자연세계를 잃는 만큼 사람의 서정도 함께 사라진다는 긴박한 주장이 시인에게만 호소력이 있는가.
이러다가 정치국면이 아니라 하늘과 토양과 기후의 문제로 닥쳐오는 위기가 더 이상 서정시를 쓸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서정시를 다시는 쓸 수 없는 시대가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그렇다면 원형이라도 박제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시인이 찾고 있는 좋은 시란 아마도 진지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겨냥해둔 성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자연문제를 정치국면 밖에서 다룰 내용은 아니다. 자연과 생명이 이미 제도 안으로 들어와 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니 시인은 세계화로 포장된 제국주의의 세계 현실을 객관적 자료를 통해 지적하고 통렬한 문제의식으로 제시한다. 시와 생활, 시의 진정성과 삶의 진지함 가운데 어느 추 하나 기울어지는 일 없이 팽팽하게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의 호흡은 언제나 시의 힘을 키운다. 의도적인 수사와 기교를 여지없이 단절하고 실재로 직진하는 글쓰기를 선택한 그에게도 “겉치레에도 품을 들”이는 일이 중요하다.
새로운 세기를 넘어와서도 시인의 관심은 “시대의 아픔을 안고 거리로 나서게 하는 소리”('철교 위를 달리는 기차소리')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한밤중에 환청처럼 들리는 소리는 시인의 마음에서 시작된 진동이었던 것이다. 시인의 시정신은 멀리 있다고 아득해지지도 않거니와 파스텔 톤이 될 수 없는 현장의 호흡으로 제시된다. '눈물의 뿌리'에서 고구마 캐내는 장면이 그러하다. “물기가 많거나 거름이 많으면/헤프게 벌어지고, 허연 물고구마/척박한 땅일수록 더욱 단단한/밤고구마가 되는 법” 푸른 청춘이 흐르도록 일하고 일한만큼 흐른 눈물의 시간은 “팍팍한 황토일수록 더욱 단단한/참고구마 주렁주렁 달린” 밭의 진실로 드러난다.
세계화란 구실 좋은 제국주의의 현실을 극복하는 담론으로 시인이 꺼내든 카드는 역시 생명이다. 자연계 질서가 유기적인 생명현상이고 사람살이 역시 그 안에서 소통되는 것임을 알린다. 시집을 읽어가면서 시인의 생명이해가 어떻게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재미를 즐겼으면 좋겠다.
김종인 시인의 바다시편 '그대 사랑'은 파도 쉬지 않는 동해안 일대의 구체적인 바다이면서 절대 닿을 수 없는 수평선이나 무지개를 혹은 사랑하는 그대를 확인하는 장소이다. 실재하지 않는 대상들의 이미지가 실재보다 선명하게 살아있는 공간 바다는 거울이거나 우물이기도 하면서 “기대하지 않으면 절망도 없을” 현장이다. 다가갈수록 다가간 거리만큼 멀어져 다시 다가가야 할, 끝없이 다가가야 할 곳을 인정하는 세계가 바다로 부각되었다. '그대의 파도', '고래', '겨울 동해', '막막한 바다', '그리운 포구', '내 마음의 수평선' 등의 시는 '그대 사랑' 안으로 모두 수렴될 수 있다.
생명과 연결되는 또 다른 시는 문명의 시선이 만들어낸 야만과 그 야만으로 포장된 결핍과 소외와 빈곤의 현실을 밝히는 연작시들이다. 여전히 제국주의 안에 놓인 역사와 문화, 정치 경제적인 차별구조를 지적한다. 김종인 시인의 연작시는 문제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상정하고 비판의 수준을 아예 벗어나 고발에 이르고 있다. 발문에 쓰고 있듯, ‘진시’를 향한 시의 길 찾기를 절대 포기하지 않고 시어가 매끈하지 않더라도 불사하고 본질을 찾아가리란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시정신의 세계를 잘 드러내는 연작시 몇 편을 골라본다.
'아메리카'6 물 혹은 모가지란 부제의 시는 “한번 먹을 것이 없어지면/사람들은 더욱 게걸스럽게 먹는다/풀이나 나무, 벌레나 짐승/살아있는 것은 모두 잡아먹는다/제국의 대규모 영농회사는/물을 장악했다 그들의 관리 하에/물은 조금씩 배급된다(중략)/곡물이 넘쳐나도 아프리카에서는/수억의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중략) 메이저급 5대 곡물상들은/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세계의 흉년을 즐기고 있다” 물과 식량 부족의 진짜 문제이자 뇌관을 담은 작품이다.
'우리 문명의 마지막 저녁'8의 부제 정보화, 세계화에는 신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의 잔혹한 행위가 나온다. 그는 히스파니올라의 여자를 유럽에 팔아서 섹스노예 무역으로 떼돈을 벌었다. 당시, 북미 대륙에는 1억 명의 원주민이 살았으나 이제 겨우 100만이 보호되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처음 상륙한 청교도 102명은 문명과 전염병을 함께 전달하여 많은 원주민이 떼죽음을 당했다.
생명 있는 것들의 가장 아름다운 찰나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지극히 반생명적인 경계에서 느끼는 박탈에서 비롯하는가. 한 겹을 탈피하거나 껍질의 몸에서 나온 순하고 어린 “꽃잎은 가장 아름다울 때 떨어지고”('슬픈 눈'), 어떤 사랑도 떠나가야 확인되고 (“무정한 사랑은 떠나가네”'세느강 편지'), '누운 회화나무'는 “지상에 막 나온 참매미”들을 기다려 끝까지 그늘이 되고자하고, “처음 비행에 나선/작은 새 한 마리”('작은 새 한 마리')의 아찔한 비행과 걸음마,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아름다운 무늬를 만든”('꽃등심') 경이에 닿은 놀라움 역시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경계에는 생명성찰이 담겼다.
정선호, 『내 몸속의 지구』, 시와에세이, 2007
정선호 시인은 시와 더불어 보낸 시간이 부족하다는 시인의 아쉬움을 작품 사이사이에 끼워 놓았다. 시인 정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초심이 유난히 빛나는 그의 말에는 다짐과 각오가 부끄러운 고백 형식으로 드러나 있다. 시인답게 사는 일에 마음을 태우지만 정작 그는 생활 세계에서 시쓰기에 익숙해져 있고 그의 많은 시들은 그 생활을 토대로 쓰인 것들이다. 시인은 “언제쯤 다시 시와 사람들 그리워질까”를 묻고 있지만 시와 사람들 옆에 있어도 언제나 그립다는 시를 향한 간절한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시인에게 시업의 시작을 출판으로 알리는 일은 어쨌든 특별한 일이다. 첫 시집을 내기 전까지의 시간을 돌아보는 그에게 세월은 엄청난 무게로 실려온다. 시집으로 묶인 시 역시, 봄날의 비유이든, 노인의 관찰이든, 세월이 중심의 강으로 흐르고 있다. 그렇다고 바쁜 마음으로 종종거리는 시를 쓰고 있지도 않고 여유로운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느라 애쓰지도 않았다. 시간의 흐름 앞에 정직하게 바쁜 마음과 허전한 생각을 모아 놓았다. 이제 막 시업을 시집으로 알리는 시인만큼 갈 길이 멀고 아득한 이가 있을까. 그러므로 유독 바쁘고 아픈 만큼 아쉬운 중이리라.
시집을 읽어가면서 그의 시간과 세월이 역시 자연과 생명의 소중한 이해를 통해 녹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활을 빗겨가지 않는 시인의 태도는 삶과 인생의 무대에 살아있다는 것, 혹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필요한 포장 없이 직선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한다. 시인은 스스로 생활세계에서 “섬”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생활이란 바다를 벗어나면 섬은 존재하지 않음을, 그 생활세계라는 바다가 그를 섬이자 시인으로 만들고 있음을 이미 운명처럼 감지하고 있는 것 같다.
전업시인으로 살지 않는 시인들은 시의 시간을 더 확보하고 싶은 현실과 대면한다. 부족한 시간에 대한 두려움으로 써내는 시가 생활인들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시인은 초조하다. 시인들은 시의 생존을 본능처럼 염려하여 “지금까지 내가 적어 온 시들이/몇 천 원어치 씨 한 줌 될 수 있는지”(채소씨를 뿌리며)를 묻는다. 엄살이나 변명조가 아니라 생활세계의 바다를 헤엄치며 써 내려간 시가 생활세계에서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을 것인지 ‘쓰고-묻고’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이 그린 생활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자. 학번이나 군번에 지나지 않는, 암호랄 것도 없는 암호를 늘 분실하고 낭패, 좌절의 굴곡 안에 살아있는 한 사람의 구체적 삶의 현장들. 끝없이 골을 넣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들. 아들의 아들, 혹은 딸들의 딸로 이어지는 가족사의 질긴 인연들. 역시, 정선호 시인에게도 어머니는 헌신이자, 희생의 제의물이 되신다. “평생 게장을 만들어 내 섬에 주다가 결국은 당신도 게가 되어버린” 그 당신이 되셨던 것, 이 다양한 생활풍경이 시를 만드는 풍성한 바탕이 되어있음을 섬이 되면서 알아간다.
가족과 생활전선의 몇 가지 꼭짓점 가운데 중심을 이룬 어머니를 그려내는 일에서 시인은 그래서 생활과 일상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그 안에 거주할 줄 아는 시인으로 정착한다. 비로소 간절한 섬이 되면서 동시에 시인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놓지 못할 암호는 시인의 시를 빚어내는 긴장감이다.
시인의 시간은 계절과 사람을 함께 설정하고 있다. 벚꽃 같은 시절, 젊은 시절, 시인이 돌아보는 추억들은 아름답다. 단지 추억 자체로 아름다워 하는 진한 향수도 있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건배, 그 시간을 무사히 통과한 자신을 쓰다듬는 일. 인생의 봄날들이 무사히 지났음을 안도하는 것에 지나는 것은 아니다. 아쉬움과 아련함의 추억과 시간을 기념하는 일에 의미를 두고 있다. 봄날 바람이 지나가는 들판 논둑의 뱀풀, 씀바귀들의 행복한 시간은 봄, 야유회를 가다에서 “바람이 짖는 저녁밥”들의 성찬으로 아름답다. 초봄의 산행에서 봄꽃들의 조준은 사격장의 총소리처럼 공기를 가르며 꽃을 피워내고, 그 꽃 피는 총소리에 봄바람 잔뜩 든 가슴이 붉게 꽃처럼 피고 있다. 아카시아 꽃피다는 놀라운 사랑의 흔적과 향기도 봄날의 풍경이다.
인생의 시간이란 결국 봄에서 넘어온 흔적일 따름이다. 노인대학에 입학한 노인들의 노란 조끼는 봄날 개나리꽃들이나 다름없고 (봄날은 간다), “한낮에도 파도소리에 졸다/바닷바람에 밀려 기우뚱대는”노인정이 있는 장천항과 매화나무의 나이테도 다 지나온 흔적의 바퀴살이다. 키워온 세월들의 소중함과 깊이 있는 무게를 시간의 장중함으로 담았다. 시인은 세월을 두고 “철든 여름철새”가 되고 싶어 하는데 풍성한 들판의 알곡이 아니라 벌레만 골라먹고, 다시 길 떠날 때를 알아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날아오를 줄 아는 존재들이다. 그 자리를 박찰 때, 세월 앞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노년에 이를수록 이 세상을 박차는 일에 자유로워지는 것이 자연을 닮는 일이다.
세월 앞에서 다시 근원으로 돌리는 발길은 사람으로 향한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밀물과 썰물 같아/사람들 떠나면 금방 잊히고/다시 오면 간절한 것인데”라는 수정리에서 시는 사람을 두고 앓은 시인의 마음자리를 잘 보여준다. 어느 거리에서든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있고 사람으로부터 사람 되기를 배우며 산다. 이 뻔한 사람살이가 시인이라고 쉬울 것인가. 앞집 사는 이웃을 모르는 살기, 손자를 양육하는 허리 휜 할머니의 등, 장마가 쏟아지는 저녁 “나이든 여공들”과 마라토너와 노점상 좌판 김씨가 맞는 빗줄기에 사람이 있음을 잊을 수 없으므로 시인으로 사는 일은 더욱 쉽지 않은 것이다.<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