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속 삶의 진실, 연극 <거기>(글/임지희_안동대 국문과 겸임 교수)
봄이다. 꽃들의 향연이 시작되었고 나뭇가지에는 연초록의 잎사귀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어릴 때는 봄이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봄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인생에 감기처럼 찾아오는 고통을 겪고 난 이후라고 생각된다. 추운 겨울 뒤에 찾아오는 봄처럼 인생의 고통 속에도 따뜻함이 있다. 타인의 위로 속에 따뜻함을 느끼기도 하고 술로 고통을 일시적으로 잊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통을 겪다가 보면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고통과 행복의 반복, 우리는 이러한 연속성 속에 살아간다.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덤덤하게.
지난 4월 12일과 13일에 안동 시민회관 소공연장에서 공연된 극단 차이무의 <거기>는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단면을 보여 주는 연극이다. 시시콜콜한 잡담 속에서 재미를 찾고 가슴에는 상처를 안고 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덤덤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다룬 연극이 <거기>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
이 연극의 배경은 강원도 부채끝이라는 마을의 어느 카페이다. 병도는 조그마한 카페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병도네 카페에 정미소 사장인 장우가 와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병도와 장우는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 날씨 이야기, 도박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는 동안 진수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평소에는 도박운이 없는 장우가 진수를 따라 카지노에 갔다가 평소보다는 돈을 땄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신다. 그들은 같은 동네에 사는 춘발이라는 인물에 대해 뒷담화를 하며 술을 마신다. 결혼까지 한 춘발이가 서울에서 온 김정이라는 여성에게 이사 올 집을 소개해 주며 딱 붙어 다닌다면서 춘발이를 불륜남 취급을 한다. 병도, 장우, 진수 자신들은 결혼은커녕 여자 친구도 없이 지내는데, 결혼을 한 춘발이가 김정이라는 여성과 늘 다닌다는 소문이 그들을 불쾌하고 속상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춘발이가 김정이라는 여성을 데리고 카페를 찾아오자 그들이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김정이라는 여성은 그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화는 김정이라는 여성에 대한 관심으로 집중된다. 그들은 저마다 김정이라는 여성의 관심을 끌려고 야단들이다. 무슨 술을 마시겠냐는 장우의 질문에 김정은 와인을 마시겠다고 하자 강원도 작은 동네에 어울리는 복분자가 아니라며 모두 당황해 한다. 결국 카페 주인 병도는 집까지 뛰어가서 선물 받은 와인을 가져오고 그들의 술자리가 시작된다.
술을 마시며 춘발이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며 귀신 다니는 길목 이야기를 꺼내게 되고 저마다 한 가지씩 귀신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장우는 대문을 두드리는 귀신이 나오는 집 이야기를 해 준다. 그 집이 바로 김정이 이사 온 집이다. 이어서 춘발은 어릴 적 옆집에 살았던 여자아이가 자신을 무척 예뻐해 주었던 아주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밤 아주머니 귀신을 봤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진수는 자신이 무덤을 팠던 변태 귀신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정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장우, 춘발, 진수는 귀신 얘기를 해 김정을 겁먹게 했다며 귀신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해 다투게 되고 더 이상 귀신 얘기는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돌아온 김정은 귀신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갑작스런 딸의 죽음, 이후 항상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늘 마음 아파하며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책하며 보내던 어느 날, 자신에게 딸의 전화가 걸려왔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두들 어떻게든 위로를 해 주려고 한마디씩 거들고는 춘발과 진수는 먼저 집으로 돌아간다. 김정은 장우에게 결혼 해볼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냐며 질문을 던지고 장우는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각자 자신들의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카페 문을 닫으면서 막이 내린다.
술집을 배경으로 함께 모여 술 한 잔 나누며 잡답처럼 주고받는 배우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관객들에게 연극을 관람한다는 느낌보다는 그들의 옆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일상적이고 사실적이다.
따뜻한 힐링연극
연극의 본질은 갈등이며 갈등이론은 오늘날까지 연극의 구조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심적인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연극의 전동적 구조원리를 거부하고 있는 현대연극에서도 갈등은 가장 중심적인 구조적 특성이 된다. 관객들은 인물간의 갈등이 얽히는 양상을 통하여 극적긴장을 가지기도 하고 갈등이 절정을 달할 때 감정의 고조를 가지게 된다. 또한 갈등이 해결되면 긴장했던 감정을 이완시킨다. 관객들은 이러한 감정의 과정을 겪으면서 극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연극 <거기>에서는 중심적인 갈등구조를 찾아볼 수 없다. <거기>의 카페라는 공간적인 배경은 갈등 없이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데 유리한 극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술집이 일상적인 삶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고통을 잊는데 활용되며 타인과의 싸움을 해소하는 공간이 듯이 이 연극 속에서도 삶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치유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술집에서 일상적인 이야기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볍게 스트레스를 풀어나는 것처럼 배우들은 술을 마시고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술자리를 이어나간다. 이러한 일상적인 이야기의 나열은 연극을 지루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극에는 그러한 지루함을 차단시키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먼저 배우들의 입담은 관객들이 연극에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만드는 강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배우들이 들려주는 귀신이야기는 옛날 할머니의 귀신이야기를 듣는 듯 구수하고 때로는 오싹하고 때로는 뭉클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연극에서 귀신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쯤은 귀신이야기를 접하였을 것이다. 관객들은 귀신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당시의 과거를 파노라마처럼 떠올리게 되고 과거의 시간을 연극과 오버랩 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귀신이야기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귀신이야기를 하면서 이를 하나의 오락이나 유희거리로 만든다. 공포의 간접체험을 통하여 그러한 무서운 일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안도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거기>에서는 귀신이야기를 통하여 관객들에게 '과거의 기억'이라는 감정의 동일화를 만들어 내게 한다.
이러한 귀신이야기를 통하여 만들어진 관객들의 감정의 동일화는 김정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김정이라는 여성의 딸을 잃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관객들은 그녀의 고통을 안타깝게 바라보게 된다. 그 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 한 켠에 아픔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겠기에 그녀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져 연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김정의 이야기가 끝나자 다른 인물들은 그녀를 위로한다. 이들의 위로는 관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삶에서 고통을 느낄 때 누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자신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않더라도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김정에 대한 다른 인물들의 위로는 관객들에게도 봄볕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춘발과 진수가 카페를 나가고 김정에게 들려주는 장우의 첫사랑의 이야기의 핵심도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장우는 첫사랑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혼자 빠져나와 정신없이 걷다가 술집을 하나 발견하게 되고 그 술집에서 술을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슬픔을 덤덤한 톤으로 이야기한다. 그때 술집주인이 속이나 풀고 가라고 끓여준 술국이 자신에게는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술집 주인이 끓여주는 술국 한 그릇이 나에게는 그렇게 큰 위로가 될 줄 몰랐드래요. 그 술국 한 그릇을 먹고 나니 다시 힘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드래요.”
이 대사는 <거기>의 주제를 담고 있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이 주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누군가의 위로 덕분이라는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연극 <거기>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일어나는 ‘아픔’의 코드를 ‘위로’의 코드로 승화시켜 놓고 있기에 별다른 갈등구조 없이도 관객들은 연극 속에 동화되게 하고 연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따뜻한 시선을 가지게 만든다.
또한 이 연극에서 돋보이는 것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끌고 나가는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배우들이 사용하는 강원도 사투리는 아주 자연스러워서 강원도 어촌 마을 사람들의 소박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도 이 연극의 매력 중의 하나이다. 동네 토박이들로 구성된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그렇고 배우들이 독백할 때 다른 배우들이 취한 리액션도 과장되지 않고 매우 사실적이어서 관객의 입장에서 관람을 한다기보다는 그들의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이 작품의 관건은 아기자기하고 사소하고 섬세하고 따뜻한 사람의 심리와 사람들 간의 관계를 살려내는 것”이라는 연출의 이야기를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용해시키고 있다.
특히 진수 역은 희극의 익살광대로서의 역할을 맡아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김정의 옆에 앉아있던 춘발이가 화장실을 간 사이 작은 키인 자신을 탁자 밑에 걸쳐진 가름대를 이용해 슬금슬금 김정에게 다가가는 장면이나, 귀신이야기를 할 때 자신의 열쇠를 떨어뜨려 이야기의 리듬을 깨버려서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되는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래요. 술을 마셔 손에 힘이 풀려 그런 거지”라는 대사와 함께 익살스런 몸짓을 하는 장면 등은 연극의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고 있다. 배우들의 술자리 한 쪽에서 웃고 즐기면서 위로받는 연극, 극단 차이무의 <거기>는 이런 연극이다.
이 연극의 원작은 아일랜드 출신의 코너 맥퍼슨이 쓴 <The weir>이다. 그러나 이 연극을 관람한다면 번역극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작의 어촌마을을 한국적인 공연에 맞추어 강원도 어촌마을로 설정해 놓고 한국의 정서에 맞게 섬세하게 각색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역극을 하면서 단순히 한국어로 된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자체를 바꾸어 놓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외국연극을 한국의 정서에 맞게 공연하기 위해 노력한 연출가의 흔적이라고 생각된다.
극단 이름인 ‘차이무’는 ‘차원이동무대선’의 줄임말이란다. 관객을 태우고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여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이 극단의 공연목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의 주제가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보여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볼만 하다. 요즘 대한민국에서는 힐링 열풍이 불고 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힘들고 우리의 삶은 많이 지쳐 있을 런지 모른다. 이러한 지친 삶을 연극을 통하여 잠시나마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 잠시 고통을 잊는 것이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이 될 수 없듯이 연극 <거기>가 다루는 이야기를 통한 힐링을,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보여주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극단 차이무의 저력에 대한 큰 기대치가 가져온 욕심일지 모른다.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연극을 보면서 잠시나마 삶을 충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움과 위안을 삼아야겠다. 봄의 짧은 향연이 주는 즐거움을 누리듯이…....<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