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장기의 맥을 잇는 장기기사 조혁해(글/이희수_프리랜서 기자)
일과 일 사이, 출근과 퇴근만이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온 것 마냥, ‘뭔가 해야겠다!’ 라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기웃거리게 되는 것이 운동, 취미, 여행. 운동은 안 해본 사람들에게는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다, 취미로 좀 해보자 마음먹으니 돈 드는 일이 한 두 푼이 아니다. 여행은 또 가자니 주말은 짧은 것 같고 경비를 계산하니 그저 집에서 식구들과 가까운 곳에 나들이 가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마음먹기 나름이 아닌가 싶다. 초급반도 계속하다 보면 중급반 실력이 될테고, 꼭 돈 드는 취미가 아니라 발품도 팔고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정보를 나누다 보면 큰돈 들이지 않고 재미를 얻는 게 취미가 아니겠는가 싶다. 작정하고 잘 곳, 먹을 곳, 경비 얼마 하고 계획하지 않아도 문득 떠나는 게 여행인 것처럼 말이다.
생각 한 끗 차이지만 그렇게 마음먹어서 일과 일 사이, 조금은 특별한 일탈이 있다면 참으로 부러울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떤 강사는 인생의 A 플랜과 B 플랜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A가 내 일상에서의 직업 즉 주요 플랜이라면 B는 다소 일탈이 될 수도 있는 플랜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 A를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A에만 목숨 걸고 사는 게, 오히려 미래에 있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 더 위험해질 수도 있는 것이 안위의 A인 것이다.
하지만 삶에서 A와 B를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안동에서 유일한 장기 프로기사이자, 대한장기협회의 안동시 지부장을 맡고 있는 조혁해 씨다. 이것은 그에게 아마도 플랜B일 것이다. 장기기사로 활동하며 그 외에도 화려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조혁해 지부장과 한갓진 찻집에서 철관음을 마주했다.
안동교도소 기계장, 장기 프로기사 입문하다
그의 A 플랜은 안동교도소의 기계장이다. 그는 스물일곱이 되던 해, 가정을 꾸리고 법학도로서의 미래를 위해 매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에게 ‘가장’ 책임감을 실어주는 게 무엇보다 자식이 아닌가 싶다. 어렵게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조혁해 지부장은 아내가 첫 아이를 가지면서, 과감하게 법조계로 나아갈 꿈을 접고 직업적인 안정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그가 안동교도소의 기계장이 되면서 가정적인 안정도 찾았지만 무엇보다 그에게 취미라 일컬을 수 있는 장기에 상당부분 매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계장으로 근무하던 초창기에는 교대근무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정시 출퇴근으로 근무조건이 바뀌게 되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퇴근 후에는 언제든지 규칙적으로 그의 취미생활에 여가시간을 쓸 수 있었고 주말 또한 다방면에 능했던 조혁해 지부장에게 황금 같은 시간이 되었다. 그에게 남들에게는 취미라 불려 질 수 있는 다방면의 활동, 특히 장기는 플랜 B가 아닐까 싶다.
안동에 ‘장기 프로기사가 있다’ 라는 말을 듣고서, 그저 소일거리 삼아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거나 장기에 푹 빠져있는 중년의 고상한 취미정도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필자의 큰 착오였다. 그에게 장기는 우연찮은 경험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렇기에 장기에 대한 애착이나 그의 실력 또한 자연스럽게 쌓일 수 있었던 듯하다.
진보에서 나고 자란 그가 장기를 접하게 된 것은 동네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장기를 두던 모습을 보면서였다. 그저 흥미삼아 보던 것이 취미가 되었다. 무엇이든 10년이 넘으면 그 분야의 장인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조혁해 지부장 역시 장기와 함께 한 시간이 그 배로 흘렀으니 프로기사로서의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취미라고 하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에 목적을 두기보다 그저 대가없이 즐기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둔다. 하지만 조혁해 지부장은 장기에 입문하고 나서, 지역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장기대회에도 출전하여 아마에서 프로 초단으로 실력을 높여왔다. 장기에 대한 묘한 매력이야 두는 사람만이 오롯이 느낄 뿐이지만, 장기 프로기사로서 일반인들에게 장기에 대한 그의 진심은 조금 남다름으로 다가왔다. 장기의 유래는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보통은 장기가 중국에서 전파된 것이라 알고 있지만 중국은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유래되어 중국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나라 식 장기 기 궁에 새겨진 한(漢)과 초(楚)의 글자는 중국의 한나라와 초나라를 뜻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민속놀이라고 알려진 장기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상기라 불리는 중국 장기의 기물은 초와 한이 아닌 장과 수로 궁을 표하고 있다.
이쯤만 봐도 조혁해 지부장이 우리나라 민속놀이로서의 장기를 제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만 하다. 지나간 역사만이 알 뿐이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의 장기에 대한 역사가 이어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것으로 지켜나가기 위한 근거가 충분히 된 다는 것이다. 그에게 장기는 하나의 취미와 여가의 즐거움이 아닌 문화에 대한 의식을 나타내고 있었다. 더불어 이곳이 안동이기에, 더욱 이 놀이를 정착시키고 대중화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포부 또 한 가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고유한 민속놀이에 대한 단순한 애착 이상의, 좋아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 또한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조혁해 지부장이 갖는 장기에 대한 사랑이었다.
천자문에서 주역까지, 주역에서 풍수까지
사실 조혁해 지부장에게 취미를 물으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독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장기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실력으로만 본다면 취미 이상의 것도 될 수 있겠으나 어쩌면 그가 장기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 것도 그의 본래 취미인 독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나 한다.
어린 시절 어려웠던 가정사를 겪었던 조혁해 지부장의 아버지는 동네의 훈장님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천자문과 명심보감, 격몽요결, 소학과 같은 글을 가르치던 서당의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아들이 귀해 대를 잇는 자손을 늦게 본 탓에 조혁해 지부장은 아버지를 어린나이에 여의게 되었다. 네 살 때 천자문을 모두 익혔다는 그의 말에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조금은 남달랐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가 지금까지 공부한 많은 학문들과도 그 시작이 결코 따로이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의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에게 한자는 장기와도 연결되지만 그의 또 다른 플랜B 이기도 한 주역과도 연결된다. 고학으로 늦은 나이, 대학 공부를 한 조혁해 지부장은 법학을 전공했다. 결혼을 하면서 아내와 자녀에 대한 도리로, 그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에도 그에 대한 애정을 놓지는 않았던 듯하다. 아마도 그 연결고리에는 어린 시절부터 익혔던 한자의 역할이 톡톡히 작용하지 않았을까. 우연찮게도 안동의 도립도서관에서 인연을 맺은 김진규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이어 주역에도 매진하게 됐다. 그에게 주역은 학문적인 접근이었다. 한 달만 해도 수십 권을 읽어내는 조혁해 지부장은 남는 시간, 거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시인이 독서를 취미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안일한 시각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독서는 밥과 같은 것인데 밥을 취미로 먹냐는 이유에서 였다. 하지만 조혁해 지부장에게 독서는 정말 밥이다. 오히려 밥 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그가 취미라 감히 부르는 독서가 아닌가 싶다. 장기든 주역이든 풍수든 혹은 법학이든, 그에게 하나의 획으로 통하는 것은 독서의 힘이고 그 뒤에는 한자와 맺어진 오래된 인연이 있었다.
조혁해 지부장은 장기와 주역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닌, 우주의 섭리로 통한다고 말한다.
주역에 관한 여러 서적을 독파하기 시작하여 독학만으로, 근간에는 지역 문화센터와 도서관에서 주역과 풍수에 대한 교양강사로 활동을 하고 있는 그에게 주역은 한자로 시작된 그의 삶에 길을 일러주는 큰 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장기와 풍수, 그리고 법학에 까지 많은가지를 뻗을 수 있게 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풍수학에도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는 조혁해 지부장은 계속해서 공부를 이어가, 퇴직 후에는 전국의 풍수명당을 다니며 현장답사를 해보고 싶다는 작은 뜻도 내비췄다.
원일(原一) 조혁해
슬하에 3남을 둔 조혁해 지부장은 세 살 돌의 손주를 둔 할아버지다. 유난히도 혹독했던 그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위해 유일한 아들이었던 그는 가장이 되었다. 공부에 대한 미련대신 농사일에 매진하며 어머니와 누이를 부양해야 하는 어린 가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주위에 사람을 잘 뒀다고 말했는데, 무려 8년이 지나서야 검정고시를 공부하게 된 계기를 그렇게 말했다. 국어과와 영어과의 점수 미달로 시험을 세 번이나 치렀지만 8년간 책 한 번 보지 않고 오로지 혼자 공부로 검정고시에 합격해 대학생 새내기가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법학을 전공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전공과는 다소 무관한 일을 해 왔다. 하지만 짧게나마 그의 이야기를 들어 알겠지만 그에게 전공이나 일은 그닥다지 연관에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굳이 연관되지 않아도 할 건 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독서가 아닌 공부에 취미가 더 있지 않은가 싶을 만큼 안동대학교에서 법학 전공으로 석박사를 마쳤고 논문도 무려 10개나 발표했다. 어지간한 교수님들보다도 더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다고 해야 하나. 지난해에는 통신대 교육학을 졸업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배운 열정이 다시 남을 배우게 하는 길로 이어지니 그에게 또 다른 길이 어찌 보면 봉사가 아닌가 싶다.
지난해에는 진보의 본가에서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창고를 열었다. 거기엔 오랜 고서가 가득했고 아버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유품들도 새롭게 안아볼 수 있었다. 네 살 때 천자문을 익힌 것을 보면 조혁해 지부장의 아들 사랑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천자문과 이천자문을 직접 손을 써 아들에게 가르쳤던 책이 고스란히 남아있게 때문이다. 창고를 정리하며 이런 저런 책을 꺼내보다 아버지가 쓴 천자문의 책에서 그는 수십 년 전, 그의 아버지가 그의 생년월일을 적어둔 뒤에 남긴 아호를 발견했다. 바로 원일(元一). 아버지는 으뜸이 되라 지어줬지만 차마 그건 분에 넘치는 것 같아 ‘원일(原一)’로 바꿔 쓰고 있다.
눈가가 촉촉해진 탓은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세월을 거스른 듯한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민속장기를 활성화 위한 포부
부창부수라 했는가. 주말이고 밤이고 장기와 책에 빠져사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을 듯도 한데, 알고보니 오랜 지기인 그의 아내도 다양한 취미생활을 가지고 있었다. 한 동안 풍물을 배우러 다닌다 하더라며, 서로의 취미와 생활을 존중해 주는 모습에서 살짝이 부러움도 있었다. 막내 딸을 대학에 보내고는 요즘은 두 부부만 단란하게 산다. 주말이면 더러 등산도 다니는데, 운동 얘기를 하다보니, 그가 우슈 4단의 유단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와” 하던 찰나에 그의 새로운 취미가 하나씩 나올 때면 하루를 한 달처럼 알뜰히 쓰는 덕에,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취미도 갖는 그의 일상이 저절로 그려졌다. 한국문인협회와 동인지 활동도 하고 있다니, 하루를 반쪽도 제대로 못 쓰는 입장에서는 믿기지 않을 따름이었다.
올해는 조혁해 지부장에게 작은 소망이 있다. 바둑은 바둑을 둘 수 있는 기원이 있지만 장기는 그러한 장소도 없을뿐더러 안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규모의 활동이 아닌지라, 장기 모임을 다방에서 갖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를 후원하는 대기업의 역할이 지역에서도 행해졌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담긴 소망이다. 안동이라는 지역적 특색을 고려한다면 지역의 많은 기업들이 주목할 만한 일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2011년 안동문화원 주최로 안동에서 제 1회 안동시민 민속장기대회가 열렸다. 초등학생 쌍둥이 남매가 최연소로 참여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 바탕 민속놀이의 장이 되었던 그 해는 아마도 안동에서의 장기문화가 활성화 될 수 있었던 좋은 징조가 아니었나 싶다. 안동에서 장기 모임을 갖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유난히 그 사랑이 컸던 조혁해 지부장은 안동문화원을 찾아 안동에서의 민속장기를 활성화하기 위한 노력과 애정을 비췄다. 그로 인해 안동문화원과 영남신문사에서 주최를 돕고 첫 회에는 안동간고등어에서 후원도 받았다. 더불어 그 결실이 다음해인 2회 대회로 이어지게 될 수 있었다.
올해 역시 낙엽이 물드는 가을, 웅부공원에서 경쾌한 장기음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안동시민속장기대회가 세 돌 맞이로 한창일테니 말이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