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나눔봉사 20년, 묵향회 사람들(글/이미홍_객원기자)
묵향보다 진한 김치내음
<울지 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의대를 졸업한 후 사제가 되어,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톤즈라는 곳으로 건너가 나병환자와 내전의 피해로 황폐해진 아이들을 돌보며 아이들과 함께 악기를 불고 노래를 부르며 울고 웃으며 살다 간 故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이태석 신부는 2010년 초 48세의 젊은 나이로 대장암으로 사망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수단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고 그 아이들로 인해 행복했노라 웃으며 눈을 감았다. 보고 있자니 어느새 저절로 눈물이 났었다.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이 어쩜 그렇게도 행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행복을 꿈꾸며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나는 왜 늘 만족하지 못하고 결핍을 느끼며 불행하다 말할까?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갈망한다. 성공하여 부자가 되기를 갈망하고, 남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 열심히 달려간다. 그러나 성공을 향한 질주는 때로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지를 잊게 하기도 하고, 때로 성공을 주지만 때로는 좌절을 겪게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지난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시점에 서게 되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이웃이나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아등바등 살아왔던 지난 삶에 대한 회한이 몰려오고 이제는 좀 정신적으로 넉넉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바쁘게만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조금 더 느리게 살고 조금 덜 쓰고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삶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봉사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이 몸은 봉사라는 말 앞에서 많이 부끄럽고 그 말이 아직은 남의 옷처럼 어색하기만 한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라 묵향봉사회 회장님 댁으로 가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평화동 마당 깊은 집에서 담그는 김치
일제강점기에 철도관사가 있었던 평화7길 주택, 묵향회 김선조 회장님 집으로 향한다. 오월이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 화요일, 막 열두시를 넘긴 점심시간, 맛깔스럽게 차려진 점심상을 앞에 두고 묵향 회원님들이 둘러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일단 면면부터 소개하자면 황순임 고문(91)을 필두로 2대 정분연 회장(76), 4대 심외생 회장(76), 풍산에 계시는 정기수 회원(75), 그리고 주인장 되시는 현 5대 김선조 회장(68)이시다.
오가피 나물이 들어간 쌉싸래한 산나물 전을 비롯해 메밀, 곰취 등 각종 나물 무침과 장아찌, 김치 종류에 된장찌개까지 주인장의 정성이 가득 담긴 황송하고도(?) 정갈한 상차림 앞에서 회원 분들과 수인사를 나누고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차려 놓은 상 앞에서 밥부터 먹고 이야기 나누자는 분위기라 자연 그리 되었는데 같이 젓가락질 하며 밥 한 그릇 뚝딱 비워내고 주인과 손이 번갈아 상을 치우고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오고 그러는 사이사이 오가는 정담 속에서 묵향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현재 회원이 스물다섯 명 정도 되는데 92년도에 창립해 20년이 넘게 이어져 오면서 회장이 다섯 번 바뀌고 회원들이 일부 들어오고 나가고 하면서도 한 번도 쉬거나 끊어지지 않고 김치 봉사를 이어오고 있는 게 우리 자랑이에요. 물론 시간 날 때마다 김치 봉사 외에도 장애인 돕기나 농촌봉사, 다문화가족 돕기, 경로잔치 등 다양한 봉사활동도 하고 있고요.”
회장을 오래 역임한 이답게 한 마디로 깔끔하게 핵심을 짚어주시는 4대 심외생 회장이시다.
그래도 중심이 되는 봉사활동은 빠지지 않고 매달 하는 김치봉사라고 한다. 다들 자식들 대학 보내 놓고 시간 여유가 조금씩 생기는 오십대 초 중반에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다달이 모여 김치를 담가 이웃에게 나눠주다 보니 초창기 회원들은 어느새 육십 고개를 훌쩍 넘어 칠십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예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작을 하게 되어서 이름도 묵향이지요. 그때는 다 서예하고 사군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작했는데 이왕 모인 거 그냥 우리 취미 생활만 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하자 해서 봉사 활동을 시작했지요. 다들 한 마음으로 십시일반으로 회비를 내서 그 돈으로 봉사를 했어요. 처음에는 회비가 한 달에 오천 원이었다가 물가가 오르면서 한 달에 만원으로 인상을 했어요.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고 주부들이 부담 없이 회비 내고 나와서 봉사할 수 있어서 딱 좋아요.”
초창기를 회상하다 김치 담그는 장소를 척 하니 제공한 김선조 회장에 대한 고마움을 전한다.
“사실 김치 담그는 일은 배추 절이고 양념 준비하고 하는 준비하는 과정이 힘든데 그걸 지금 회장이 혼자 다 하니까 우리가 늘 미안하지요. 우리가 와서 같이 하면 되는데 집이 좁아 불편하다면서 우리 오기 전에 자꾸 미리 다 해 놓으니 우리는 와서 김치를 섞기만 하면 돼요. 미안코 고맙지요. 상을 줘도 아주 큰 상을 줘야 돼요 저 사람은. 부회장을 십년 넘게 했는데 마당 넓은 집에 사는 죄로 십 몇 년을 그 준비를 혼자 미리 다 해 놓지요. 그 덕을 우리 묵향 회원들이 두고두고 보고 있어요. 회장한테는 참말 미안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집이 우리한테는 고마운 존재지요.”
과도한 칭찬이라며 김선조 회장이 그저 손사래를 친다.
“초대 회장님이 그만두고 그전에는 초대 회장님 댁인 서화원에서 하던 김치 담그는 일을 장소가 없어서 못할 지경이 되니까 어째요. 김치 봉사를 장소 때문에 그만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오래되고 낡은 집이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서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할 수 없이 여기 이 집에서 하게 되었지요. 저는 지금도 제 힘이 닿는 한은 김치봉사만큼은 계속하고 싶어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제가 그럼 불편하나마 우리 집에서 하자고 했지요. 그게 11년 전인데 그때부터 여기서 김치를 하게 된 거지요.”
집이 넓다고는 해도 일제강점기 때 철도관사로 지은 오래된 건물이라 살면서 하나 둘 여러 모로 손을 보기는 했어도 겨울에는 춥고 집안 내부 구조도 오목조목 좁고 긴 형태라 회원들이 다 모여서 일을 하기가 쉽지 만은 않다고 한다. 겨울이면 욕실에서 김치를 절이고 물을 비워야 하는데 두 사람이 들어가 일하기도 좁은 구조라 회원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일하기도 수월치 않아서 차라리 혼자 미리 알아서 준비를 해 놓는 게 편하다는 게 김선조 회장의 말이다.
취미활동으로 맺어진 인연 김치봉사로 이어져
라창교 초대회장이 옛날 교육청 자리에서 서예도 가르치고 다도도 가르쳤는데 그때 서예 배우는 사람들하고 다도 배우던 사람들 중에서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게 묵향회이라고 한다.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모였지만 이왕이면 우리도 한 번 좋은 일을 해 보자는 생각으로 대한적십자회에 봉사단체로 등록을 하고 여기저기 봉사 활동을 찾아다니며 하기 시작했다. 청소 봉사도 하고 목욕 봉사 의료봉사도 하고 다도 예절 봉사도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 이웃에 어려운 이들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 가장이나 혼자 사시는 분들에게 뭔가 살림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없나 생각하다가 주부들이 잘 할 수 있는 김치 봉사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봉사 단체도 많이 생기고 김장 봉사 같은 것들이 흔하지만 묵향봉사회가 김치봉사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김치 봉사를 하는 단체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다고 해도 대부분 일 년에 한 두 번이거나 겨울철 김장봉사가 주고 친목을 위주로 하는 단체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묵향봉사회는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자비로 매달 한 달에 한 번 김치 봉사를 계속해 오고 있다. 회원들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끼고 그렇기에 매달 빠지지 않고 회비를 내고 더 열심히 김치봉사를 하게 된다고 한다.
“1966년 영주에서 예천을 잇는 경북선이 생기면서 영주로 철도청이 이전해 가기 전까지 안동에 철도청이 있었다 보니까 철도청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중에서도 이 동네는 철도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대요. 이 주변 일대가 전부 철도 관사 자리였대요. 그 중에서도 우리 집하고 요 근방 집들이 간부들이 살던 집들이라 그중 규모가 크고 잘 지어진 집들이고요. 내가 여기로 이사 와서 한 30년 살았는데, 지금이야 살기에 좋으라고 살면서 여기저기 개조를 했지만 기본 구조하고 겉모습은 옛날하고 똑같아요. 주변 골목길도 예전 그대로고 변한 게 거의 없어요.”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이곳의 철도 관사는 해방 후 일반인들에게 불하가 돼 사람들이 살면서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점차 내부를 개조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철도에 근무하던 분이 집을 불하받아 대대로 살고 있는 이들도 있고 해방 후 일반에 매각되고 난 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경우도 있지만 다들 불편함을 넘어 옛 정취가 묻어나는 오래된 집에 사는 걸 마다하지 않는 데엔 역사가 서린 오래된 집이 주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철도관사였던 집들은 대부분 없어지거나 일부 변형이 됐지만, 현존하고 있는 집들은 지금도 옛 가옥의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철도 교통의 중심으로 번잡했던 옛날 안동의 역사를 얼핏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중에 골목길에 서서 둘러보니 얼핏 보기에는 집의 모양이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집의 전체적인 외관이 비슷비슷하다. 축대를 튼튼하게 쌓아올린 것이라든지 전체적으로 □자형으로 집 주위로 긴 담장을 두른 것 등 일본 특유의 축조법이 보였다. 이년 전에는 일본 방송국에서 근대 일본의 건축양식이 많이 남아있는 곳 중 하나라고 이박 삼일 동안 와서 촬영을 하고 가기도 했다. 뭐든 알고 보면 달리 보인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 전에도 일 때문에 이 골목길을 수 없이 지나다녔는데 그때는 철도관사 건물이라는 걸 모르고 그냥 근대식 건물의 흔적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 심상하게 지나다녔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 때 지어져 안동에 철도청이 있던 시대를 거치며 철도청의 청장, 부청장, 역장, 부역장, 철도부장, 과장들이 살던 집들이 일본식 조직문화의 영향으로 직위에 따른 위계 순서에 따라 나란히 배치되어 있던 철도관사 동네였던 것이다. 지금은 다들 옛 건물을 헐고 새로 짓거나 개축을 해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은 지금 봐도 규모 있게 잘 지어진 집에 속하는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거주하던 몇 집들뿐이란다. 철도국장인가 부장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회장님 집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뒤쪽 맞은 편 두 집 중 소나무가 많은 집은 그 옛날 역장이 살았던 집이고, 그 옆 봄이면 개나리가 노랗게 피는 돌담집은 부역장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집들은 규모가 크고 너른 반면에 남아있는 동네 나머지 집들은 그 반도 안 되게 고만고만하게 좁다고 한다.
“장소제공까지 하는 김선조 회장이 애 많이 써요”
내가 이 집 이야기에 유독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묵향 회원들의 김치봉사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이십 년 이상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집이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게 82년도쯤이었을 거예요. 우리 막내가 네 살 때였는데 걔가 지금 서른 네 살이니까 어느새 30년이 다 되었네요. 그때 신시장 쪽에 살다가 그때 당시 돈을 많이 주고 이 집을 사서 이사를 왔어요. 처음에 와서는 못 살 거 같더라고요. 그때는 평화동이 살기 좋은 동네라고 안동에서 소문났었는데 옛날 집이라 춥고 좁고 불편하고 마당은 넓고 나무는 우거지고, 남편 먼저 보내고 육남매 데리고 어찌 살까 싶었는데 어느새 이 집에 정이 들어 삼십년 째 살고 있네요. 난방비가 좀 들긴 하지만 살아보니 집이 복층 구조인데 춘양목을 사용해 신경 써서 지은 집이라 그런지 통풍이 잘 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아무리 비가 오고 가습기를 많이 틀어도 집에 습기가 안 차요. 불편하긴 해도 마당 있는 이 집 덕에 여기서 십 몇 년째 김치봉사도 하고 있고요.”
김선조 회장이 옛 사진을 펼쳐놓고 보다가 고생했던 기억을 말하자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이 날 추위 때문에 다들 좀 고생을 했지요. 그럴 때면 제가 회원님들께 얼마나 죄송한지요? 다른 욕심은 별로 없는데 회원들이 모여서 다 같이 김치 담글 수 있을 만치 넓은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게 가장 큰 바램이죠. 대한적십자사에도 부탁을 해 보고 동사무소에도 부탁을 해 놓기는 했지만 요즘은 봉사단체가 한 둘이 아니고 지원해 줄 곳도 많다 보니까 그것도 쉽지 않더라고요. 우리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원 한 푼 안 받고 다달이 회비 만원씩 내서 그 돈을 알뜰하게 써서 김치 봉사를 해 오고 있어서 다른 지원은 없어도 되는데 너른 장소가 있었으면 하는 욕심은 있지요.”
“회원들이 역할 분담이 골고루 다 잘 되어야 하는데, 장소가 좁다보니까 한꺼번에 모이기가 힘이 들어요. 여름에는 마당에 있는 수돗가 옆에서 하기도 하고 뒷마당에서도 하고 겨울에는 집안 좁은 마루에서 부대끼며 김치 속을 섞기도 하고 그때그때 형편 되는 대로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매번 열심히 하시는 분들만 많이 하게 되기도 해요. 다들 좋은 뜻을 가지고 봉사하려고 모인 모임인데 장소 때문에 욕심껏 다 부르지도 못하겠고, 골고루 봉사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면 좋은데 마음 놓고 참여할 공간이 부족하니까 그게 앞으로 숙제지요.”
2대 정분연 회장님도 남달리 고맙단다.
“사실 우리가 한 번씩 모이는 날이면 시끄럽고 떠들썩하니 이 집 식구들이 힘드지요. 그래도 우리는 이 집 덕분에 십 년 넘게 김치봉사를 잘 해오고 있어서 늘 고마운 집이지요.”
나무가 너무 우거져 그늘지고 어수선했던 정원을 정리하고 새로 마련한 텃밭에 심어진 고추가 잘 자라주고 있다고 집주인마냥 좋아하신다. 십 몇 년을 드나들다 보니 좁니 넓니 불편하니 어쩌니 해도 다들 반은 내 집 같고 정이 듬뿍 든 모습들이다.
그 집 마루에서 마당을 내다보며 황순임 고문님을 옆에 모셔 놓고 정분연 회장과 심외생 회장이 주거니 받거니 그간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그 옆에서 세세한 사연들을 덧붙이거나 보충 설명하는 것은 현 회장이고 간간이 맞장구를 치며 바른 소리를 하는 정기수 님까지, 네 사람의 이야기가 두서없이 이어지는데 듣다 보니 묵향봉사회의 역사이면서 그네들이 살아온 이야기다. 그네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들을 대중없이 대충 옮겨 본다.
올해 연세가 91세인 황순임 고문은 정분연 회장님이나 심외생 회장님이 스승으로 깍듯이 모시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서화에 두루 뛰어나시고 재주가 많으셔서 많은 이들이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 묵향 모임을 만들면서부터 고문으로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경북여고를 다닐 정도로 신학문을 하셨고, 시집올 때 시중드는 계집종을 데리고 올만치 부잣집 귀한 고명딸이었다고 한다.
“선생님이 나이 드시고도 서예며 사군자며 내방가사까지 두루 활동하시며 총기가 좋으셨는데 이제는 귀도 잘 안 들리시고 치아까지 좋지 않으신 데도 이렇게 모임에 모시고 나오면 좋아하시고 오고 싶어 하세요. 그래 모임이 있는 날이면 건강이 허락하시는 한은 모시고 다니려고 해요. 다음 달 8일이면 6월 모임이 다가오는데 해마다 6월이면 여기 계시는 황순임 고문님 생신이 있기 때문에 6월에는 김치 하는 날 꼭 겸해서 생신 파티를 해요. 생일 케이크하고 꽃다발을 준비해서 우리끼리 조촐하게 선생님 생신 상을 마련해 드리는 거예요.”
91세가 되신 어른을 여전히 모임에 모시고 다니며 일일이 챙겨드리는 칠순이 넘은 두 분 회장님의 모습이 참으로 고우시다. 정분연 회장의 회원 칭찬도 릴레이로 이어진다.
“우리는 다들 좀 일찍 봉사를 시작한 편이에요. 그리고 처음에 같이 모임을 만들고 시작한 원년 멤버들이 많다 보니까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별로 큰소리 낼 일 없이 꾸준히 해 올수 있었던 거 같아요. 회원 분들이 대체로 절에 다니시는 분들이 많 은 것도 갈등이 적은 이유 중에 하나같고요. 그리고 부회장 때부터 김치 봉사를 도맡아 준비해 오고 있는 지금 회장님하고 오늘 바빠서 오지는 못했지만 회원들 점심값 간식비 까지 아껴 그 돈으로 봉사에 더 쓰자고 할 정도로 정말 알뜰하게 살림을 사시는 권오영 총무님까지 다들 정말 한마음으로 열심히 하니까 그저 잘 될 수밖에 없어요.”
가족들도 김치 봉사에 응원을 보낸다. 뭣보다 어머니, 할머니가 잘할 수 있는 일로 남에게 봉사한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나 같은 경우는 우리 아저씨가 공무원 퇴직 하셨는데 사실 젊은 시절에는 공무원 월급으로 아이들 학교 시키고 먹고 살기 바빠서 봉사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돈도 시간도 부족했어요. 아들을 미국 유학까지 시키다 보니 늦게까지 힘들었는데, 그래도 내가 한때 가게를 해서 충당을 하고 그랬지요. 자식들을 어느 정도 공부시켜 놓고 그때부터 서예도 배우고 김치 봉사도 하고 그랬지요. 그리고 우리는 아들도 아들이지만 막내 손자가 할머니가 해주는 김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그래서 얼마 전에도 한 통 담아놓은 거 보내고. 여기서는 김치 담가서 이웃들에게 봉사하고 집에서는 김치 담가서 아들 딸 손자 녀석 먹이고 그러지요. 내가 담근 김치를 좋아하고 먹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사람이 모이는 일이라 소소한 의견 차이야 없겠냐만 다들 매달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회비를 내고 시간이 되는 한 김치봉사에 기꺼이 참여한다.
3대 박경애 회장 같은 경우 농사를 크게 짓는 데다 회장 임기를 마치고 나서 일도 바쁘고 사정상 못나오게 됐는데 그분처럼 중간에 사정이 생겨서 못나오거나 더러 모임에서 빠지게 되는 이들도 있지만 대체로는 한 번 묵향에 들면 고정 멤버가 된다고 한다. 다들 주위에서 묵향 회원들이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알고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성실하고 열심히 봉사할 분들을 회원으로 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풍산에서 왔다는 정기수 회원님은 시내에서 장사를 하시다가 풍산으로 가셔서 소 키우고 농사지으며 산 지 어느새 30년이신데 그런데도 시간이 되면 참석을 하려고 열심이시란다. 소일거리 삼아 하는 텃밭농사가 아니라 전업농이라 일이 끊일 날이 없는데다가 손주까지 돌보는 바쁜 생활이지만 봉사하고 싶은 마음만은 누구 못지않다. 자주 참석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가을이면 농사지은 고추를 기꺼이 내놓기도 한다.
“별 거 아니지만 나도 누군가를 위해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지요. 그런데 내가 살아보이 여자는 시골로 들어가면 안 돼. 주말농장이나 텃밭 가꾸러 다니면 몰라도 본격적으로 농사지으러 들어가는 건 절대 반대여. 촌에서 살다보면 여자로 가꾸며 사는 건 포기해야 되니까.”
라는 말씀에 다들 한바탕 웃었는데 말씀하시는 본인은 참말 진심이신 듯 농사일에 거칠어진 얼굴을 속상해 하는 게, 젊어서 시내에서 장사를 하며 사실 때는 가꾸기도 하시고 멋도 제법 부리셨을 법 하다. 바빠서 매번 참석하지도 못하는 게 회원들에게 미안해 모임에서 빠져야 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라고 하자 옆에 앉은 회장님들이 얼른 받아서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정기수 회원님은 본인이 농사일 때문에 힘들면 딸한테 넘기면 되잖아요. 따님이 기동력도 있고 얼마나 활발하고 참하고 일도 잘하는지 우리 회원들이 다들 욕심내고 있는데 한 번 잘 설득해 봐요.”
언젠가 어머니 모시고 와서 어른들한테 톡톡히 점수를 딴 모양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회원이 한 번 들어오면 잘 안 바뀌고 아무나 회원으로 들이는 게 아니고 검소하고 정말 오래도록 봉사 열심히 할 사람을 들이는데 정기수 회원님 따님이 나이도 쉰 넷에 이제 봉사 시작해도 좋을 나이고 일을 하면 정말 잘 할 것 같더라고요.”
김선조 회장의 말에 암묵적으로 다들 동의를 하는 분위기인 걸 보니 도장을 아주 제대로 찍은 모양이다. 총무 일을 넘겨줄 사람이 없어 지금 총무님이 너무 힘 드는 데 그 일을 이어 받을 젊고 성실한 따님 같은 분이 들어오면 좋을 거라고 다들 거드니 분위기에 떠밀린 정기수 회원이 말이나 한 번 해보겠다 한다. 사람의 일이라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회원 한 사람을 들일 때도 곁에서 지켜보며 그 사람의 인성이며 오래 성실하게 봉사할 사람을 들이려 애쓰는 모습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
매달 둘째주 토요일은 김치 담가 배달하는 날
“매달 둘째 주 토요일마다 이 집으로 모여서 김치를 해서 일일이 배달을 해요. 초창기에는 회원들이 배달하느라 힘이 많이 들었는데 다행히 좋은 일 하는 데 같이 하고 싶다고 오래 전부터 차량 지원이며 배달을 자청해 맡아주는 남자 분이 세 분 있어서 덕분에 배달 걱정은 없어요. 그 중 송기태 씨는 총각 시절부터 배달을 해 주면서 묵향하고 오랜 세월을 같이하고 있는데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가 어느새 초등학교 5학년이에요. 그이가 지인 둘을 더 데리고 와서 배달을 맡아주고 있고 이제는 각시에 장모까지 함께 봉사를 나오고 있어요. 우리한테는 천군만마 같은 사람이지요.”
오랫동안 꾸준히 봉사를 해오다 보니까 봉사를 받으시는 분들의 사정도 알게 되고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축하를 해주고 근심이 있으면 큰 도움은 못 되지만 걱정을 같이 나누기도 한다. 누가 돌아가셨다거나 이사를 가는 경우도 먼저 알게 된다.
“동네에 김치봉사를 받으시던 이성재 할아버지라고 계신데 그 분이 어느 날부터 안보여서 돌아가셨나 걱정 했는데, 다행히 며칠 후 보이셔서 알아보니 몸이 안 좋아서 도시에 있는 자식 집에 가 있다가 다시 오셨다고 해요. 그래서 다시 김치봉사를 나가요. 그분처럼 혼자 계신 분들은 대개 반가워하시며 기다리시죠.”
부모 없이 자기 손으로 밥 해 먹고 다니는 ‘함께 사는 집’ 학생들, 장애인 가정이나 조손가정, 새터민 분들, 마리스타 야간부 학생들에게 매달 김치를 보내는데, 특히 초창기부터 빼놓지 않고 꾸준히 김치를 공수해 준 마리스타 학생회관의 경우에는 늦게까지 수업을 하고 다들 라면을 끓여 먹는데 그때 김치는 필수라서 그곳을 거쳐 간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묵향회의 배달 김치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김치 없으면 안 된다고 고맙다며 인사도 많이 받았다는 말에 다들 그 맛에 봉사한다며 맞장구를 친다.
“다른 봉사회 사람들은 우리가 오래 하고 있으니까 적십자회나 어디 다른 단체 같은 데서 협찬 같은 걸 많이 받고 하는 줄 알아요. 그런데 저희는 실제로 협찬 같은 거 일절 안 받고 회원들이 내는 회비 모아서 진짜 알뜰하게 살림하고 봉사하는 거거든요.”
자비로 알뜰히 하는 봉사지만 불편함이 덜어지면 조금 더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우리는 봉사를 해도 모르는 듯 아는 듯 그렇게 서로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하며 얼굴 내보이지 않고 뒤에서 숨어서 하고 그렇게 해 왔는데 요즘 새로 생긴 단체들 중 젊은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무료급식도 하고 열심히 봉사를 하는 경우는 적십자회나 시에 신청을 해서 지원을 받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회원들 자비로 성의껏 김치봉사를 해 왔기 때문에 회비지원이라든가 그런 건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장소 제공이나 간단한 위생이나 설비 지원은 있었으면 싶죠.”
이래저래 손 많이 가는 일이라 불편해도 내 손 하나 더 움직이면 싶어 해온 일이 여태껏 이어졌다는 김선조 회장.
“적십자회에 이야기를 했더니 적십자회 봉사관에 저녁에 비는 시간에 올라와서 하라고 해요. 그런데 김치는 아시다시피 다음 날 낮에 담그려면 우선 그 전날 저녁에 절여야 하잖아요. 배추를 저녁에 절이면 밤사이 한두 번 뒤집어 줘야 하고 건져서 담날 아침에 건져서 물 비워야 하고 양념이며 그릇 집기류며 다 들고 옮겨 다녀야 하는 문제며 김치 담근 뒷정리며 그게 말이 쉽지 이중삼중으로 번거롭고 불편해서 안 되겠더라고요. 차라리 힘들어도 집에서 내가 하고 말지 싶어서 여태껏 우리 집에서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저 조용히 형편껏 봉사하자는 소박한 마음
“우리 봉사모임 자체가 소규모이다 보니 우리는 다들 그저 조용히 형편껏 봉사하자 하는 마음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이십 년을 열심히 봉사를 했더니 그걸 알아주는 분들이 또 있더라고요. 그래서 재작년에 우리가 봉사단체상을 받았어요. 마침 그때 제가 회장을 맡고 있어서 회원들을 대표해서 국무총리실에 가서 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지요. 그동안의 우리 묵향 회원들의 봉사활동을 인정받은 거니까 다들 정말 기뻐했지요.”
심외생 회장 말에 그때로 돌아간 냥 다 같이 뿌듯해 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묵향봉사회는 지난 2011년 국무총리 공관에서 개최된 대한적십자봉사회 시상식에서 우수활동 단체봉사상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상금도 백만 원이나 받았다고 한다. 아무런 원조나 기부도 받지 않고 회원들이 자체적으로 회비를 모아서 20여 년간 매달 김치봉사를 해 온 보람을 모두가 느끼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비우고 내려놓아야 해요. 사람이 때가 되면 자기가 가진 것을 하나씩 비우고 나눌 줄 아는 게 중요해요.”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야말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이라고 말하는 정분연 회장이다.
봉사는 내가 가진 무언가를, 돈이나 재능이나 시간이나 마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봉사는 남만 돕는 게 아니라 자신도 돕는 일이다. 나를 잠시 내려놓고 남을 돕는 일에 열중하면서 나누는 즐거움, 베푸는 즐거움을 알게 되고, 봉사를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얻는다. 무엇보다 봉사는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인간의 온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자고로 주는 즐거움이 받는 즐거움보다 크다고 했다. 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자신이 준 것보다 훨씬 큰 사랑을 받게 된다고.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고. 자연은 겨울이 오면 기꺼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떨어뜨려 다음 해에 오게 될 봄을 위해 스스로 거름이 된다. 그래서 겨울은 비록 헐벗은 모습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기도 한 것이다. 평화동 마당 깊은 집의 주인장 김선조 회장의 겸손한 반성을 듣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일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일찍 봉사를 시작할 걸 하는 마음이 들어요.”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