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나서(글/사진/이순구_안동대 교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 春樹를 읽고 나서 나는 제비[燕]가 되었다. 무라카미를 읽기 전에 나는 재즈나 비틀즈, 가요나 팝송, 포크송을 음악으로 수용하지 않았고 그저 내가 참아야 하는 소음으로 여겼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기 전에는 음악은 오직 서양 클래식 음악뿐이었고 다른 음악과 또 그런 음악을 듣는 이들을 경멸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즈의 초상>을 읽고 나서야 겨우 재즈 음반을 구입하고 모으기 시작했다. 비틀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1987, 원제; 노르웨이의 숲)>를 읽고 나서야, 왜 그 비틀즈를 여태까지 무심하게 듣지도 않았는지 한탄했다. 그 후 뒤늦게 비틀즈광이 되어 모든 LP를 비롯해 CD에서도 비틀즈 원곡 뿐만 아니라 편곡한 것도 무조건 다 사 모았다.
그 전에 나는 제비를 경멸하고 멸시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내 스스로 ‘제비’라고 칭하며, 남들한테 뻔뻔스럽게 내가 바로 제비라고 얘기하며 다닌다. 지난 해, 평소 잘 안다고 착각했던 어느 교수와 해후하여 “바로 제가 ‘제비’입니다”라고 말했더니, 그 분께서 대번에, “아니 당신이 왜 제비냐”고 되물으셨다.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된다. 결국 제대로 이해시키지도 못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지난 봄 안동 시내 낙동강 다리 위를 걸어가는데, 하늘을 날고 있던 제비 한 마리, 다리 아래로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진짜 제비가 바로 제 친구 인간 제비를 알아보고 반갑다고 그렇게 쏜살같이 날아 온 것이다. 앗 하마터면 난간에 제비 부딪칠 뻔한 사고가……. 생각하면 아찔하다. 사람은 몰라도 제비는 역시 진짜 제비를 알아본다.
나는 뒷북치는데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대학교 다닐 때, 우리 학과 실험실이 있던 건물 바로 옆 창고에서 사물놀이패 학생들이 극성스럽게 꽹과리를 치는 바람에 지금도 그 소리만 나면 귀를 막는다. 그때 순식간에 국악하고 원수가 된 후에도, FM 국악 방송에 귀 기울여 듣는 시절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 나서 나는 그 클래식 음악 듣기의 깊이도 더했다. 지난번 소설 <1Q84>를 통해 비로소 야나쳌Janacek 음악(그의 심포니에타와 피아노곡들, 그리고 그 음악가의 인생과 사랑까지도 소설과 궤도를 같이 하면서, 마치 두 개의 해와 달인 것처럼)을 알게 되었고, 그 지난번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통해서 베토벤의 대공 트리오(大公三重奏; Archduke Trio)를 비로소 제비도 알게 되었다.
호시노라는 아주 무뢰한 터프가이가 베토벤의 대공트리오를 듣고 나서 갑자기 소프트한 사람으로 바뀌는 소설 장면이 있었는데 거의 박수를 치고 싶었다. 또 그 소설에서 슈베르트의 후기 소나타의 깊이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이번 신작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를 통해 비로소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들보다 클래식 음악을 내 딴에는 많이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것을 이번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 통절하게 깨달았다. 제비는 바로 속물 교양주의자다. 혹은 제비는 교양 속물이다. 제비는 그냥 남의 뒤만 쫄쫄 따라다니는 아류다. 어떻게 무라카미씨는 항상 제비보다 앞서 가고, 재빠르다고 늘상 남에게 뻐기는 이 제비는 늘 뒤쳐지는지 모르겠다. 작가와 독자로 만나면서 그는 늘 내게 좋은 선생이었다. 특히 음악에서 클래식이나 재즈 팝, 모두 나보다 한 수 위에 서 있다. 그래서 내가 참 잘 배운다. 그는 내게 늘 프로메테우스이고 나는 늘 에피메테우스다. 나는 소설 속에서 남녀 간의 연애 장면, 사랑 장면, 섹스 장면을 좋아한다. 그런 부분이 나오면 몇 번이나 되새겨서 읽고 또 읽는다. 줄 쳐 가면서 읽는다. 그런 것을 정말 정열적으로 열심히 즐겨서 잘 읽는다. 제비 천성이 음탕하기 때문이다.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 그 점에서 프란츠 리스트는 제비를 훨씬 능가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소설에는 ‘돈 버는 일에는 아예 능력이 없고, 들어오는 돈은 거의 책값이나 레코드 값으로 날아가 버리고, 가정이나 저축, 그런 것에는 아무 생각이 없으며 머리는 늘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 있다’는 구절이 있다. 이번 신작 소설에 잠시 나오는 회색(하이다 후미아키; 아주 잠시 등장하지만 색깔이 없는 주인공의 보이지 않는 분신 역할을 한다. <상실의 시대>에서 기쓰키 역할과 비슷)이 자기 부친인 어느 지방대학 철학교수를 두고, 색깔이 없는 주인공인 다자키에게 말하는 것인데, 제비 가슴이 푸욱 찔린다. 무라카미 씨는 제비가 여태 그렇게 살아 온 것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소설에 똑같이 써 놓았는지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시간은 즐겁다. 그의 소설은 재미있다. 수필(잡문)도 참 재미있다. 제비, 재미가 없는 책은 절대로 안 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종의 바이러스다. 한번 감염되면 거의 낫지 않는 일종의 독서 바이러스다. 그 바이러스 병에는 약이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을 어제(2013년 7월 14일) 저녁에 다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1949년생으로 제비보다 연배가 몇 살 더 높지만 마음은 제비보다 훨씬 더 젊었다. 이번 소설에서도 주인공 아무 색깔이 없는 다자키는 서른여섯 살이다. 주로 십대 후반과 이십 대의 젊은 사람의 이야기와 그들의 마음을 64세의 작가가 아주 쿨하고 상큼하게 그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정, 그리고 연애와 섹스를 중심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아주 럭셔리하게 서술해 놓았다. 그리고 또 다른 소설의 주인공은 이전의 소설과마찬가지로 음악이다.이번에는 프란츠리스트의 피아노곡인‘순례의 해’다. 라자르 베르만(LazarBerman; 1930 -2005) 연주의 석 장짜리LP음반(1977년 뮌헨 녹음 DG)이다. 제비 그 음반을 CD로 갖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모른다. 그 CD를 들으면서 책을 읽었다. 제비 보통 소설 읽을 때 음악을 들으면서 읽는 편이다. 그냥 음악에만 귀를 기울이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세상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제비 십 여 년 전 우연히 부산의 본가에 갔다가 조카가 읽고 있는 <상실의 시대> 소설을 훔쳐보고 깜짝 놀랬다. 안동에 와서 바로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 다 읽고, 제비 처한테까지 읽게 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비틀즈의 노래였다. 표면적인 소설 스토리의 주인공과 그렇고 그런 남녀간의 연애 이야기, 개인의 애절한 성장 이야기와 함께 전개되면서, 비틀즈의 노래 멜로디와 그 가사가 흘러나온다. 비틀즈에 흠씬 젖었던 제비 세대의 이야기였기에 더욱 그 소설에 호감이 갔다. 상실의 시대가 삼각관계라면 이번 소설은 오각 관계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아주 유효적절하게 색깔을 칠해 놓았다. 주인공 다자키는 작가와 독자가 임의대로 (상상력의)색을 칠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만들어 놓았다.
상실의 시대는 본래 제목이<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노래 제목을 그대로 소설 제목으로 썼던 바로 그 소설이다. 제비가 2005년도 한 해 동안 일본 츄쿠바에서 연구년을 보낼 때 종종 들렸던 헌책방에 가장 많이 쌓여 있었던 소설책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그 헌 책방에서 일본말도 잘 모르는 제비, 그냥 폼으로 한 권에 100엔 동전 주고 상하 두 권짜리(원본의 첫 출판은 강담사講談社 刊으로 상권은 빨간색 표지, 하권은 초록색 표지로 되어 있다)를 샀다. 그리고 이번에 새 책으로 우리 말 번역본을 한 권 사서 줄 쳐 가면서 꼼꼼하게 다시 읽어 보았더니, 의외로 성적性的인 묘사 장면이 너무 많았다. 역시 제비 좋아할 만 한 소설임에 충분하였다. 그때는 그런 것을 크게 몰랐는데 의외로 섹스에 깊은 관심과 그 묘사가 많은 것을 알았다. 잘 계산되고 시세에 편승한 그 작가 정신은 철저한 상업주의, 현실주의 그리고 치밀한 계산이 앞서 있는 대중소설이라는 점이었다. 그 소설에 비하면 이번 신간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문화적으로, 문학적으로 진화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상실의 시대> 속편 혹은 그 후편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상실의 시대>는 역시 그 주인공이 제목처럼 <노르웨이의 숲>이다. 비틀즈의 노래들이 바로 그 젊은 청춘들의 노래이며 그 청춘 소설, 연애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젊은 대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바로 연애이고 이성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섹스가 아닌가. 오랜 만에 비틀즈 음반 CD중에 몇 개를 다시 꺼내어 USB에 담는다.
2005년 그때 츄쿠바에서 나는 완전히 제비 명칭을 자호(自號: 裏燕)로 삼았다. 그곳 시립도서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우리말 번역본을 빌려서 열독했다. 일본 도서관에서 일본 소설의 우리 말 번역본을 빌려보는 그 맛, 정말 짜릿했다. 그 시립 도서관에서 재즈 음반도 참 많이 빌려서 들었다. 물론 클래식 음반도 들었다. 클래식은 주식으로 밥 먹듯이 들었고, 재즈는 간식으로 과자 먹는 정도로 듣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공공도서관에서 음반 CD나 영화 DVD도 책처럼 빌려주어야 한다. 그것도 쩨쩨하게 5권 정도가 아니라 츄쿠바 시립도서관처럼 20권씩 빌려가게 해야 한다. 츄쿠바대학 대학신문도 우연히 그 도서관에서 보았는데 신문기사 내용 중 교내서점 베스트셀러 순위가 나와 있었다. 일본의 인기 작가의 신작 소설들이 대부분이었고 당시 <해변의 카프카>도 그 순위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요즘은 활자 이탈시대라고 해서 일본 한국 젊은이들이 아무리 책을 안 읽는다고 하지만(강상중 2013), 한국이 그 정도가 일본보다 훨씬 더 심한 것 같다.
제비, 중 · 고교 다닐 때 허름하고 시커먼 교복(일부러 아스팔트에 새 모자를 문질렀다)에 명찰을 붙이고 다니면서 교모를 한 번도 똑바르게 쓰지 않았다. 항상 약간 삐딱하게 모자를 썼고, 머리도 교문 앞에서 기율부 선생(주로 체육, 교련 선생)한테 붙잡혀서 바리깡으로 밀려야 할 수 없이 이발소에 갔다. 대학교 다닐 때 1-2 학년, 4학기 동안 ‘교련’을 1학점짜리 교양필수 과목으로 들어야 했다. 중고교 시간에 가장 기분 나쁘고 더러운 시간은 체육 시간과 교련 시간이었다, 대학교 다닐 때도 교련에 D학점이 하나 들어 있어서 지금도 그것이 제비의 흠결(혹은 자랑)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씨도 그의 잡문들에서 고백해 놓았듯이 제비와 비슷하게 약간 불량기 있는 중고교 생활을 한 것 같다. 국어 교과목을 가르치는 부부 교사인 부모의 외아들로 자란 것, 그리고 자기 오디오를 가지고 마음껏 음약을 들을 수 있었고, 용돈만 생기면 LP판이나 책을 언제든지 사보았던 것을 보면, 이 제비보다 훨씬 더 유복했던 것임은 틀림없다.
제비 지금도 술 담배 안하고 건전한 생활만 하는 세칭 ‘바른 생활 인간’은 싫다. 어쩐지 거짓 위선이 스멀거리는 것 같아 속이 머쓱하다. 부모나 선생에게 너무 공손한 중고생, 대학생도 이상하다. (이런 학생들이 특히 안동 지역에 밀집해 있는 것 같다.) 너무 순종적인 어린 인간 – 젊은 인간은 늘푼수가 없다고 본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시간이 바로 제비의 청소년 시간이었다. 그런 삐딱함은 지금도 제비에게서 지울 수 없다. 가방 안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아니면 서점 혹은 헌 책방에서 산, 소설책들과 시집이 항상 들어 있었다. 그런 것이 불량한 것인가. 고2 때 담임선생이 불시에 갑자기 가방 검사를 해서 제비는 그때 일생 가장 큰 치욕을 당했다. 학교 다니기 정말 싫었다. 만정이 뚝 떨어지는 그런 경험을 그때 처음 했다.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집만 보는 학생을 지금도 제비는 좋아하지 않는다.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 씨도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제비도 제비가 된 이후에야 담배를 끊어서,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 하나를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번 신간에서도 예외 없이 재즈가 흘러나온다. 어느 시골 오지 마을의 중학교 낡은 피아노로 초록색(미도리가와; 綠川) 재즈 피아니스트가 셸로니우스 몽크Thelonious Monk의 재즈 스탠다드인 ‘Round Midnight’를 연주한다. 회색(하이다; 灰田)의 아버지가 철학과 대학생 시절(1960년대) 휴학을 하고, 그곳에 가서 잡일 등 육체노동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 연주를 들으면서, 몸 안의 더러움이 씻겨 나가는 느낌이라고 소설에는 묘사되어 있다. 그러면서 그 피아니스트는 ‘인간에게는 모두 저 마다의 색깔이 있는데,’ 운운한다. ‘도약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올더스 헉슬리가 말하는 ‘지각知覺의 문’을 열어젖히게 돼……’라고 말한다. 그 지각의 문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만 제비는 잘 모른다. 오늘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재즈 음반에서 몽크의 ‘라운드 미드나잇’을 속속들이 연주자 별로 다 뒤져서 다시 들어 본다. 오랜만에 무라카미 씨 덕분에 다시 재즈에 귀를 기울여 듣는다. 나의 느낌은 절대로 몸 안의 더러움이 씻기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좀비가 된 것 같다. 그가 그 곡을 소설에 쓰는 바람에 한참 동안, 안 들었던 재즈를 다시 꺼내어 듣고 있는 나는 바로 그런 좀스러운 좀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새벽에 잠 깨어, 이어폰으로 다시 또 리스트의 순례의 해[불어로 Annees de Pelerinage, 독일어로 Wanderjahre, 영어로 Years of Pilgrimage 우리 말로 그냥 여행연보라 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들지만 이미 그렇게 통용해서 써 왔기에, 순례의 해(巡禮の年)라는 일본식 조어造語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다]를 듣는다. 여행은 사람을 순수하게 ‘보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한다(강상중, 도쿄산책자 2013). 공리적인 혹은 실용적인 목적을 떠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일상적인 생활을 떠나서 여행을 가야지만 만날 수 있는 것이 ‘풍경의 슬픔’ 즉 Le Mal du Pays르 말 뒤 페이가 아닐까, 일본의 라이선스 음반에는 이 말을 ‘향수鄕愁’ 혹은 ‘노스탤지어’라고 번역해 놓았다. 나는 불어 그대로 ‘풍경의 슬픔’으로 우리 말 번역을 해 본다.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을 뜻한다. 이 곡이 바로 이 소설의 주제곡 음악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다자키가 아니고 바로 ‘풍경의 슬픔’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순례의 해 첫 해, ‘스위스’의 여덟 번째 나오는 곡으로, 놀랍게도 거의 무채색으로, 회색도 아닌 느낌의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우울한 느낌의 곡이었다. 아주 삭막하고 쓸쓸한, 힘이 쑥 빠지는 듯한 곡이었다. 소설의 주인공과 너무 똑같아서 새삼 놀란다. 라자르 베르만(1972년 실황)이 치는 피아노 곡으로 다시 한번 더 Le Mal du Pays(풍경의 슬픔)을 듣는다. 그 무뚝뚝함, 생뚱맞음, 인정없음, 불협화음을 듣는다. 듣고 또 반복해서 듣는다. 외롭다. 버림받은 것 같다. “너는 그립다고 그곳을 찾아 왔건만 (그동안 변한), 풍경이 너를 외면하고 아는 척도 않는다”. “전봇대만 앙상한 그 (수원) 연습림 끝의 붉은 밭들(수원 고색) 같다”. 무뚝뚝하게 말씨조차 생소한 사투리다. 그런 풍경이 인간을 하나의 이방인(異邦人; 에트랑제)으로 만드는 바로 그 느낌이 노스탤지어인가. 소설은 바로 그 풍경의 슬픔(Le Mal du Pays)이 주인공이다.
어제부터 계속 제비는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만 듣고 있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에 사는 제비는 이곳이 자기 성미에 그래도 잘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해 왔다. 박물관적인 인간이므로 친구들은, 제비를 박물관에 아예 소장시켜 버려야 하는 인물이라고 놀렸다.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에 가면 제비 아는 사람들이, 너도 안동인처럼 상투 틀고 갓 쓰고 도포입고 오지, 왜 양복입고 왔느냐고 놀린다. 그래서 꼭 가야 할 일이 아니면 될 수 있는 한 제비,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안 간다. 여태 클래식 음악을
들어오면서도 리스트의 음악은 많이 듣지 못했다. 제비 성미에 그 음악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하다 제비가, 제비 그 자체인 리스트, 그리고 그의 음악의 제비적이고 카푸리치오(caprricio; 변덕스러운)적인 것에 딱 질색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대 음악가들로 쇼팽이나 브람스, 멘델스존, 슈만에는 호감이 많이 갔었지만, 리스트와 바그너는 꺼려했다. 바로 그들이 하늘 끝까지 잘난체하는 바로 그 제비족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관현악곡인 교향시 전주곡(Prelude)은 제2차 대전 때 독일 나치 군대가 승전할 때마다 라디오 방송으로 울렸었다고 하니, 제비의 그런 선입감이나 혐오를 더 부채질한 것 같다.
1846년의 혁명에 동조한 사람(가난한 서민, 노동계층, 보헤미안들)은 쓰디 쓴 실망을 했고 그 혁명에 반대의 입장에 있던 사람(귀족, 자본주의자 등 보수층)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당시 미래파 음악을 주도한 제비족인 프란츠 리스트, 종횡무진으로 짓까불고 제멋대로 연애하며, 제 하고 싶은 것은 안하고 못 배기는, 제비 프란츠 리스트는 물론 혁명의 실패로 실망했던 사람 중의 하나다. 당시 독일 오스트리아에서 낭만파 음악의 첨단을 달렸던 두 무리의 사람들, 한쪽은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미래파 음악가들(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등)이었고, 한 쪽은 브람스를 중심으로 한 신고전주의파(브람스, 슈만, 쇼팽, 맨델스존 등)였는데, 제비 가지고 있는 음반 중 가장 많은 것이 브람스다. 그런 제비가 이번에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소설을 읽고 여태 꺼려하던 바로 그 리스트를 비로소 음악으로 수용한 것이다. 시간의 미래를 향해서 사는 인간과 시간의 과거를 쳐다보며 사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면, 제비 이번 소설로 미래를 향해 쳐다보는 쪽으로 인생관을 아예 바꾸어 버렸다.
리스트와 함께 파리에서 가정과 남편을 버리고 스위스, 베네치아, 이태리로 야반도주한 여인은 리스트보다 6살 연상의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다. 그녀는 당시 쇼팽을 끼고 살았던 조르쥬 상드처럼, 당시의 블루 스타킹 즉 청탑파였다. 그녀와 리스트는 5년여 함께 동거하면서 스위스, 이태리 베니스, 나폴리, 로마 등지를 여행(순례) 했다. 그 여자는 글을 쓰고, 리스트는 피아노 연가곡집인 순례의 해를 마치 풍경화를 그리듯이, 혹은 서정 혹은 사랑을 음악으로 시적으로 묘사했다. 그래서 그 후의 드뷔시, 라벨 같은 인상파 음악가들의 선구자가 된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 사이에 세 자녀가 태어나는데, 그 첫째는 후에 프랑스 수상의 부인이 되고 그 둘째는 후에 피아니스트 지휘자 한스 폰 뷜러의 부인이었다가 다시 리하르트 바그너의 부인이 된다. 셋째는 남자로 20세에 죽었다고 한다. 리스트의 생애 후반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여인은 놀랍게도 러시아 짜르의 여동생인 비트겐슈타인 공주였다. 그를 바이마르 공국의 악장이 될 수 있게 후원하며 피아노 연주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와 교향시 작곡 쪽으로 매진하게 했다. 그녀와 로마에서 동거하기도 했지만, 결국 결혼이 교황청으로부터 허락되지 않아 못하고, 그 후 로마 가톨릭 수사가 되어 종교적 인간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정말 복잡다단한 인간형이지만 그의 음악은 ‘소리로 쓴 시詩’를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음악을 ‘음악적 발언musical speech’으로도 표출하였다. 그런 리스트가 바로 진보적인 미래적인 교향시의 작곡가로 나아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리스트 음악 음반 해설지에 쓰인 글을 옮긴다. 키 크고 잘 생긴 금발의 미남인 리스트가 피아노 연주에 몰두 하면서 머리칼을 흔들 때면, 그 연주장에 와 있었던 부인들이 모두 소리 지르며 손가락에 낀 보석, 다이아 반지들을 있는 대로 모두 집어 던졌다. 그래서 연주회 수입은 요즘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요즘 잘 쓰는 ‘리사이틀’이라는 말도 당시에 리스트가 만들었다. 그리고 연주를 끝낸 후 혼자 고개 숙여 시거 담배를 피우는 리스트의 고독한 모습은 당시의 블루 스타킹들의 호감, 내지는 동정을 샀다. 요즘의 락 스타 못지않은 당시의 현상이었다. 리스트는 정말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는데 그중에는
연상의 여인이 많았다. 만년에는 피아노 연주 제자인 나이 어린 소녀도 사랑했다고 하는데, 이점은 리스트가 숭모했던 괴테와도 비슷하다. 리스트는 다른 어떤 음악가들보다 더 문학적이었다. 아주 섬세하고 시적이고, 그리고 복잡다단한 것이 그의 인간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속속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가 빅토르 위고의 시 ‘단테를 읽고’를 읽고, 혹은 라 마르틴의 시 ‘전주곡’을 읽고 작곡한 피아노곡, 교향악 등과, 당시의 여러 시인들의 시로 작곡한 수많은 독일어 가곡들(Lieder)에서 그의 그런 문학적 향취는 다른 어떤 작곡가들보다 높았다고 생각된다.
하여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항시 음악이 있어 제비 마음에 꼭 든다. 단순무지한 인간에서 복잡다단한 댄디(dandy, 멋쟁이)로 현대인(후기 산업사회)으로 글로벌하게 살아가는 그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들을, 내가 아주 좋아한다고, 혹시나 당신이 성을 내시는 것은 아니겠지요.<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