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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학교(글/정진영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가학과 서당교육
양반의 자제로 태어나면 공부란 피하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학에 대한 최소한의 학문적 식견이라도 갖추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공부는 대체로 7-8세 전후하여 흔히 ‘하늘 천, 따지’로 불려지는 <<천자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천자문은 그저 글자에 대한 이해를 위주로 한다. 좀 자라서 글자를 붙여서 읽을 정도가 되면 문중이나 마을 단위로 설립된 서당 등에서 공부하였다. 서당에서는 <<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 <<사략史略>> <<통감절요通鑑切要>> 등을 주로 가르쳤다. <<사략>>이니 <<통감절요>>이니 하는 것은 중국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이를 통해 한문의 구조를 터득하고, 우리가 아닌 중국의 역사를 익히게 된다. 어릴 적부터 남의 문화, 남의 역사를 익히다 보면 우리의 정체성은 엷어지게 되어 그 나라의 정신적, 문화적 속국민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전 국민이 영어 몰입시대를 살아야 하는 오늘날 우리는 다를까?
중국의 역사보다 더 중요하게 가르쳤던 것은 <<소학小學>>이다. <<소학>>은 세수하고 청소하고 응대하는 양반들의 생활 지침서이다.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유교적인 생활규범을 외우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유학자로서의 생활규범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사로운 욕망을 잘라 향후 학자로서 보다 큰 자연과 세상의 이치를 터득할 수 있는 기초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 단계까지는 주로 할아버지나 숙부 등에 의한 가학家學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반가에서는 아동기의 교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듯이 이후의 인성과 학문적 기초가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유자儒者로서의 생활규범 뿐만 아니라 가문의 학풍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하는 것이다. 가학이란 가문 단위에서 형성된 학문적, 문화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길러진 품성과 덕성, 그리고 세계관은 성장한 이후에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서당은 조선시대 가장 일반적인 교육기관이었고, 그 형태나 수준은 아주 다양하였다. 사랑방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별도의 건물을 가진 경우도 많았다. 또한 향교에 입학하기 이전의 초보적인 입문단계에서부터 수준 높은 학문을 강론하는 교육기관이기도 하였다. 말 그대로 천차만별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수준 높은 서당은 조선후기에 주로 양반 동성마을에서 세운 것이다. 마을의 양반 자제들만이 아니라 인척관계에 있는 가문의 자제들도 함께 수학하였다. 이를 통해 혈연적 유대를 강화하고 가학과 학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하는 것은 입문단계의 서당이다. 서당에서의 공부 방법은 주로 강독講讀이었다. 강독이란 이미 배운 내용을 소리 내어 읽고 그 뜻을 질의 응답하는 것이다. 강에는 단원의 서당그림에 나오듯이 흔히 돌아앉아서 책을 보지 않고 외우는 배강背講과 마주 대하여 읽는 면강面講이 있다. 가끔은 시문詩文을 짓기도 하였고, 습자習字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부의 대부분은 무엇보다도 외우기에 있었다. 책을 덮고도 줄줄 외울 수 있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번을 읽고 외워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향교에 입학하는 15, 16세 전까지 가정과 서당 등에서의 수학기간은 8-9년이 된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오늘날 그러하듯이 조선시대라 하여 온전히 공부만 할 수는 없었다.
다산 정약용은 11세까지는 너무 어려서 철이 들지 않아 글을 읽어도 그 의미를 헤아리기 어렵고, 15, 16세에 이르러서는 사춘기로 접어들어 물욕物慾에 마음이 갈리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실제 학동들이 글 읽는 기간은 12세에서 14세까지의 3년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3년간도 전적으로 공부에만 몰두하기 어려웠다. 여름에는 더워서, 봄가을은 놀기에 좋아서 글 읽는 것을 등한시 할 수밖에 없었고, 명절이나 질병, 우환 등을 또 제하고 나면 실제 공부하는 시간은 300여 일에 불과하였다고 하였다.

가정과 서당을 통한 기초 교육은 대체로 15, 16세로 마무리 된다. 대부분의 양반자제들은 이 정도의 교육을 통해 양반으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었다. 또 이 시기가 조금 지나면 장가를 들어 우둔한 자는 글공부를 그만두거나, 다소 재주가 있는 자는 향교에 출입하면서 본격적으로 과거준비를 하게 된다.
서당은 향교와 서원이 교육적 기능을 거의 상실한 특히 18, 19세기 이후에 더욱 번성하였다. 18, 19세기에는 반촌뿐만 아니라 민촌에서도 세워져 좀 부유한 상민의 자식들도 교육을 받아 문자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그래서 1920년대의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만 5천여 개가 넘었다. 이들 서당의 상당수는 일제 침략기에 신식학교로 전환하거나 민족의식을 고취해 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우민화정책으로 이들 서당은 강제로 폐쇄 되었다.

제국주의적 침략세력이나 독재 권력은 백성들의 깨어 있는 의식을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그래서 서당을 폐쇄하고, 금서禁書를 남발하여 아예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해 버리거나 그저 형식적인 교과서나 읽기를 원했다. 지금은 그 교과서조차도 문제 삼는다. 억압이 일시적으로는 의식을 마비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늘 그랬듯이 단잠에서 깨어나면 더 희망찬 아침을 맞게 마련이다. 부질없는 짓임을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향교, 지방의 국립학교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유교이념을 보급하고 교육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울에 성균관과 사부학당, 지방에 향교 등 관학을 설치하여 지원했다. 서원과 서당 등의 사학에 대해서도 여러 측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즉, 넓은 강당과 학사學舍의 건립, 교관敎官의 파견, 유학 경전의 반포, 토지와 노비의 지급 등이 그것이다. 특히 향교에 대해서는 각 고을 수령들에게 ‘학교의 흥성’을 중요한 임무의 하나로 제시하여 임기 중 향교 교육의 진흥에 얼마만큼 노력했는지를 근무성적에 반영하였다.

향교는 각 고을에 하나씩 두었다. 원칙상 양반과 평민이상의 자제로서 15세 이상이면 입학할 수 있었지만, 주로 양반의 자제들이 입학했다. 정원은 부府와 목牧 등 큰 고을은 90명에서 70명, 군현은 50명에서 30명으로 고을의 크기에 따라 달랐다. 교관도 큰 고을에는 문과 출신인 종6품의 교수를, 작은 고을에는 생원, 진사 출신인 종9품의 훈도를 파견하였다. 학생들은 강경講經과 제술製述 곧 읽기와 글짓기 등을 배웠는데, 교재는 <<소학>>과 <<가례家禮>>, 사서오경,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이었다.

성균관은 향교나 사부학당의 상급교육기관으로 간주되었으나 오늘날의 중고등학교와 대학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 대체로 향교와 사부학당 등에서 수학한 생도들이 소과에 응시했으며, 소과에 합격한 생원, 진사만이 원칙상 성균관에 입학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2백 명의 정원을 채우지 못하면 사부학당에서 성적이 우수한 생도나 문과초시에 합격한 자들에게도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문과시험 또한 성균관 유생에게만 응시자격을 주었던 것도 아니었다.

조선초기 유교가 아직 전면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에 향교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였고,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점차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퇴색되어 갔다. 이제 지방에도 교육을 담당할 유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인근에 서당과 서원 등의 교육시설도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향교는 상대적으로 먼 곳에 위치하여 통학이나 숙식에도 문제가 있었고, 지방관의 간섭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향교의 쇠퇴는 무엇보다도 유학이 발달함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유학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사제師弟관계와 학통, 학설을 중요하게 만들었다. 제자는 스승의 학설을 따르고 학통을 이어나가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생각했다. 그러나 향교의 교관은 자주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학통, 학설과 상반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교관 또한 점차 한직閒職으로 인식되면서 문과는 물론이고 생원, 진사 합격자들도 기피하는 자리가 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거의 대부분의 향교가 불타버렸고, 교관의 파견도 중단되었다.

유학의 발달은 점차 학문적 경향을 사장학詞章學에서 성리학으로 바꾸어 나갔다. 사장학이 문장과 시부詩賦 위주였다면, 성리학은 우주 자연의 본질과 인간 이성의 탐구에 관심이 있었다. 향교에서는 과거준비를 위한 사장학을, 서원에서는 성리학을 주로 했다. 성리학이 발달함으로써 향교의 사장학은 오직 과거만을 위한 출세지향적인 글공부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해야만 했다. 아무튼 조선후기에 이르러 향교는 교육기관으로서 보다는 공자와 그 제자,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현儒賢들에 대한 제향祭享을 주된 기능으로 삼았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향교는 각 지방의 양반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지방 양반들에게 있어서 향교는 여전히 중요한 기구였다. 향교를 운영하는 임원인 교임으로는 도유사都有司와 장의掌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지방의 유력 양반층에서 선출되었다. 이들의 역할은 이 시기 향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제향 곧 공자를 제사하는 석전제釋奠祭를 주관하는 것이었다. 공자를 모시는 고을의 큰 제사를 누가 주관하느냐 하는 문제는 지방의 양반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이를 둘러싸고 큰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향교에 적을 둔 사람을 교생校生이라고 하였지만, 오늘날의 학생과는 달랐다. 이들은 16세 이상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50, 60세에 이르는 교생들도 많았다. 교생의 수는 고을의 규모에 따라 정해져 있었지만 정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향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정원 내의 교생을 액내교생額內校生이라 하고, 정원 외의 교생을 액외교생額外校生이라 구별하였다. 대체로 액내교생은 양반으로, 액외교생은 서얼이나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양반들은 향교에 적을 둠으로써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나 석전제의 제관이 될 수 있었고, 평민들은 교생이 됨으로써 군역에서 빠질 수 있었다. 교생이라 하여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금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였다.

서원, 지방의 공립 또는 사립학교
관학官學의 부진은 사학私學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대표적인 사학으로는 서당과 서원이 있다. 서원은 16세기에 이르러 크게 발달했다. 이 시기에는 성리학이 발달하여 우주의 본질과 인간 이성에 대한 탐구가 학문의 주된 관심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지방사회에 기반을 둔 사림파士林派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집권 훈구세력과 대립하면서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집권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림의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원이 설립되고 발전할 수 있는 학문적, 정치, 사회적인 여건이 조성되어 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서원이다. 주세붕은 풍기의 사림들과 협력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소개한 지역출신인 안향의 위패를 봉안하고 유생을 교육시키는 장소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아직은 선현에 대한 제사가 위주였으며, 교육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서원을 교육중심 기관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퇴계 이황退溪李滉이었다. 이황의 건의에 따라 나라에서는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국가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서원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한다. 서원은 사학이었지만, 사액서원은 관학과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및 서책 등을 하사받았고, 춘추 제사에 필요한 제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한 지원을 받았다. 더욱이 사림士林이라는 다수의 선비들이 지방관의 지원을 받아 세운 것이다. 따라서 사액서원은 차라리 공립학교라 할만하다. 아무튼 사림들은 적극적으로 서원건립에 나섰다. 이 같은 서원 건립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퇴계 이황이었다.

퇴계가 살던 시대는 영남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 세력이 훈구파의 전횡에 대해 치열하게 비판하고 도전하던 시기였다. 퇴계는 19세와 45세에 기묘사화(1519년)와 을사사화(1545년)를 몸소 경험하였다. 특히 조광조趙光祖의 이상주의적 도학道學정치가 좌절되어 버린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퇴계는 이러한 사화士禍의 원인을 군주 주위에 있는 무리들의 마음이 바르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이들이 군주 주위에서 온갖 부정을 도모하면서 군주를 악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성현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군주를 보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성리학에 대한 참다운 공부가 필요했다. 그러나 과거나 출세만을 위주로 하는 향교나 성균관 등 관학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퇴계는 새로운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건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갔던 것이다.

서원은 번잡한 읍내가 아닌 한적한 산곡 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참다운 성리학의 공부가 자연 속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곳은 지방 양반들의 거주 지역이기도 했다. 서원의 건립을 주도하였던 것은 개인이 아니라 지역 사림들이었다. 그리고 지방 수령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적지 않았다. 비록 수령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의 운영은 어디까지나 사림에 의한 자치제였다. 이런 점에서 서원을 사립교육기관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늘날의 중고등 사립학교도 사실은 국가의 보조금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운영된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학교를 사유재산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교육사업을 한다고 자랑한다. 정말로 자랑스러운 교육사업이 되기 위해서는 운영의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서원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주체는 원임院任과 유생儒生이다. 원임은 원장과 유사로 구성된다. 원장은 대내외적으로 서원을 대표하였기 때문에 덕망德望과 인망人望을 갖춘 인물로 선출했다. 기호지방 노론계 서원에서는 중앙의 고위관료들이 원장을 담당하였지만, 영남의 남인계 서원에서는 향중에서 학덕과 명망을 갖춘 인물들을 원장으로 추대했다. 그래서 영남의 서원원장은 생원, 진사나 참봉 등도 있었지만, 유학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유사는 서원의 크고 작은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담당자였다.
유생은 원생院生이라고도 하였는데, 말하자면 서원의 학생인 셈이다. 그러나 원임과는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수평적인 관계였다. 유생 중에서 원임이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원생은 생원, 진사 합격자나 양반 유생만으로 한정되었다. 서얼이나 그 후손이 비록 대, 소과에 합격하였다 하더라도 영남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원생으로의 참여 혹은 입학은 어디에도 가능했지만, 서원 소재지와 인근 지역의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서원은 교육과 제사의 기능을 함께 갖는다. 따라서 서원에 누구를 모시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당연히 그 지역과 관련하여 유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인물[유현儒賢]을 모셨다. 그러나 점차 유학과는 관련 없이 충절과 의리로서 모범이 될 만한 인물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점차 당쟁이 격화되면서는 학덕과 행실, 출신지와도 무관한 인물을 배향하여 자기 당파의 정치적인 입장만을 대변할 따름이었다. 또한 문벌이 강조되면서 문중의 권위와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각 문중에서 다투어 서원을 건립하였다. 고을 사림들의 공론이 아니라 문중이 주체가 되어 문중의 인물을 모시는 서원을 ‘문중서원’이라고 할만하다. 이에 이르면 서원의 교육적 기능은 완전히 소멸하고 당파의 정치적 목적이나 가문의 권위를 높이는 도구로 전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서원에는 많은 토지와 노비가 소속되어 있었다. 도산서원의 경우에는 전답이 20-30결, 노비가 무려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 전답과 노비들은 대체로 국가의 부세부담을 면제받았다. 따라서 서원이 많아지는 것은 국가재정에 엄청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이러한 사정에서 조정에서는 서원을 함부로 세우는 것을 금지하였고, 또 같은 인물을 여러 서원에 배향한 경우에는 강제로 철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조 대에 이미 173개의 서원이 철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서원은 계속해서 증가하여 마침내 대원군에 의해 대대적으로 헐리게[훼철毁撤]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전국에 47개의 서원만을 남기고 모두 헐어버렸다. 당시 경상도에는 400여 개의 미사액 서원과 400-500여 개에 달하는 향현사鄕賢祠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헐린 것으로 보고된 것만도 505개소였으니 그 수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훼철된 이들 서원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복원되었다. 마치 옛날의 영광을 재현해 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원이 교육기능을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지금에는 봄가을로 지내는 형식적인 제사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원만이 아니다. 향교도 모두 복원되었다. 이런저런 문화재 복원에는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든다. 그런데도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는다. 나라의 돈이나, 지방정부의 예산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국민의 혈세이다. 있는 문화재도 재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불타고 허물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똑 같은 건물을 어느 고을 없이 다 복원하거나 또 복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문화재를 복원한다 하여 문화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복원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사용하고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도 없다. 물론 유지, 관리에도 많은 예산이 든다. 아무리 잘 복원해도 사용하지 않으면 금방 허물어지고 만다. 그래도 자꾸 복원하려고만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화수준이고 정책이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