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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마속 질그릇 같은 남자, 도예가 정태호의 작업실(글/사진/피재현_시인, 노암공방 운영)

지독하게 더웠던 여름이 지나갔다. 이렇다 할 바람 한 번도 없이 덥기만 했던 긴 여름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지난여름을 생각하면 아침저녁 옷깃을 여미게 하는 쌀쌀한 날씨는 신기하기까지 한 자연의 조화다.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 정태호 씨의 공방을 찾았다.

안동댐 월령교가 저만치 내려다보이고 물가를 따라 심은 은행나무 느티나무 잎사귀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물들기 시작한.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자연은 한층 깊은 색을 우려낼 것이다.

정태호 씨가 운영하는 우리도예는 2008년 경상북도가 안동댐 공예문화전시관 뒤편에 망뎅이 가마를 설치하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원형지붕에 기와파편을 붙여 보기에도 멋스러운 5구의 망뎅이 가마를 설치하고 그 옆에 관리동으로 지은 지금의 공방에 두 도예가가 입주한 것이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자욱하고, 계절마다 풍경이 달라지죠. 비오거나 눈 오면 술 마시기도 좋구요. 하하!”

공방 풍경이 좋다는 말에 정태호 씨가 사람 좋게 웃는다.
그는 지난 몇 년 사이 공예조합 일이 있을 때마다 자주 얼굴을 보던 터이다. 내가 공예조합 일에 그리 자주 끼는 편이 아닌데 조합 일마다 얼굴을 봤다는 것은 그가 공예조합의 성실한 일꾼이라는 뜻이다. 길게 기른 생머리를 질끈 묶고 늘 작업복 차림으로 바쁘게 다니는 정태호 씨는 차림새도 차림새지만 걸걸하게 큰 목소리 때문이라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제11회 안동관광기념품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축하인사를 건네자 서로 원하는 방향이 맞았을 뿐이라며 계면쩍어 한다.

“그런 게 힘이 되지요. 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응원 같은 느낌? 올해 사실은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열리는 신일본미술원전이라는 국제 공모전이 있었는데 그 대회에서 은상을 받았습니다. 바빠서 상 받으러 가지도 못했지만 도자기 하면서 그런 일들이 힘이 되고 다음 단계의 작업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아요.”

20여년을 흙을 만지면서 살아온 정태호 씨. 도자기보다 먼저 그가 필이 꽂힌 것은 연극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극을 하고 싶어서 연극영화과를 지망했고 입시에 실패하고 재도전을 위해 서울로 공부하러 갔다가 그마저도 실패하고 궁여지책으로 도자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별 성의 없이 입문했다가 그 길이 평생의 길이 되어버린 것인데 거기에는 그의 낙천적인 성격이 한 몫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톨릭상지대학에서 도자기를 공부하면서 흙을 만지는 손맛에 빠져버렸다. 그즈음 도공의 길을 걸어가겠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고 다시 강원대학교에 편입해 공부를 이어갔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 대학원으로 가서 공부를 더 하고 교육자의 길을 갈 것인가 현장을 택할 것인가 고민했지만 오래 주저하지는 않았다.
대학을 마치고 1998년 안동으로 돌아와 ‘우리도예’의 간판을 내 걸었다. 이후 태화동 작업실과 문천초등학교, 예천 작업실을 거쳐 2008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이에 비해 공방 경력이 긴 탓에 벌써 그에게 도자기를 배워 공방을 연 제자가 여럿 된다. 자기 작업을 하는 외에 정태호 씨가 주력하는 한 가지가 바로 도자기를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자기를 가르치는 일이다. 현재 공예조합에서 함께 활동하며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이들 중 솔밤도예 정현진 씨와 연도예 강지연 씨 등이 그를 통해 도자기에 입문한 사람들이다.

최근에는 아예 좀 더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용상동에 우리도예 분점을 마련하고 나섰다. 지금 작업실이 좁아서 물레작업이나 공동작업을 함께 할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공간은 앞으로 도자기를 통해 밥벌어먹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실습장으로 주로 사용된다고 한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도자기 공방을 열어 도자기 제품들이 지금보다 훨씬 대중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또 한 가지 그가 요즘 들어 주력하는 일은 공공미술이다. 정부에서 낙후되거나 산업화의 과정에서 소외되고 밀려난 마을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마을미술 프로젝트가 그것인데 정씨는 3년째 이 사업에 함께하고 있다.

“재밌죠.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외지에서 뭐하는 놈들이 들어와서 마을을 가지고 노느냐고 곱지 않은 눈으로 보기도 하는데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마을이 바뀌고 사람들의 마음도 바뀌는 것을 보는 것도 보람이구요. 다소 도자기의 길에서 이단적일수도 있겠는데……. 저는 참 좋아요. 사실 경제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구요.”

문화관광부가 주최하는 마을미술프로젝트 사업에 2011년에는 경북 영천에 공모작가로 작품을 설치했고 2012년에는 제주도 서귀포시에 지명작가로 참여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따로 여행을 다닐 여유가 없는 그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관광지 다니는 게 여행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 보고 냄새 맡고 다니는 그 시간이 그에게는 진정한 여행이며 큰 활력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동안 참여했던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성과물을 꺼내놓고 설명에 열을 올리는 그를 보면서 문득 진부한 질문 하나가 생각났다. “도자기가 왜 좋으세요?”

“....좋다는 생각도 잘 안 해요. 그냥 하는 것 같아요. 어쩌다 인연을 맺었고 그게 지금 내 삶이 되어 있는데 다른 길이 생각나지 않으니까요. 도자기 한 지 23년이 되었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어요. 평생 그렇게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할 뿐 왜 좋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내친 김에 어리석은 질문 하나를 더 한다.“돈은 좀 버시나요?”

“혼자 사니까 가능한 수입입니다. 최근에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수입이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힘들죠. 가정 꾸리며 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수입입니다. 술 먹고 배짱부리며 살다보니 더 어려워졌어요. 제가 천성이 좀 게으르거든요. 이 일도 좀 더 부지런하게 하고 적극적으로 하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나이 마흔이 넘어서면서 그도 이제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생각한다고 한다. 이것저것 섞어가며 유약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다양한 도자기를 만들어보면서 자신의 작업이 좀 더 깊어지는 느낌을 갖기도 한다.

“제 색깔이 없는 게 제 색깔 아닐까 싶어요. 청자를 잘 만들거나, 백자를 잘 만들거나 한다는 건 좋은 거지만 난 모든 색을 다 가지고 싶어요. 아니, 어쩌면 어떤 색깔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에는 ‘나는 무엇이든 다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 있다. 현대도예와 전통도예의 고집스러운 싸움들, 그리고 한가지만을 고집하는 도공들의 외길인생, 그러나 그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현대와 전통의 경계가 뭐 중요하나요? 서로 알아낸 것들을 나누고 그러면서 서로 보완되고 도자기가 대중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다는 생각입니다. 유약을 만드는 일도 그래요. 실패를 할 때가 많지만 성공하면 그 방법을 원하는 사람에게 알려주고 그러면 또 다른 좋은 유약이 나오거든요.”

몇 군데 회사에 기념품 같은 도자기를 납품하는 일, 각종 체험행사에 함께 하는 일,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그에게 재미와 수입을 가져다주고 있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대체로 그가 움직이는 반경인 것 같다.
밖에서 하는 일이 많다보니 그의 작업실은 어수선하다. 좀 지저분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작업실은 온전히 그의 공간이다. 어느 가게에서 얻어왔는지 슈퍼마켓 음료수진열용 냉장고가 있고 전기밥솥이 있고 제각각 모양이 다른 밥그릇들이 엎어져 있다. 밖에는 기분 좋고 햇살 따스한 날 삼겹살 좀 구워서 막걸리 한 잔 할 수 있는 드럼통 구이판이 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여름엔가 그의 작업실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돼지고기 몇 절음 얻어먹은 기억도 난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물어봐요. 돈을 많이 버는 그 일이 정말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인가 하고. 대부분이 그렇지가 않아요. 차라리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잘살고 있는 것 같아요.”

수십 차례의 전시회와 40여 회의 입상. 그리고 일상적인 강습이 지탱해가는 도공으로서의 그의 삶은 젊은 작가의 이력답지 않은 나이테를 가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 다운 것은 그 세월을 살아오면서 체득한 도예를 향한 그의 열정과 일체화된 생활이다.
도예를 떠나서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그의 질끈 묶은 머리와 듬성듬성한 수염, 불가마에서 툭툭 터진 질그릇의 표면 같은 호탕한 말투와 웃음. 이것이야말로 그의 삶이 만들어놓은 이력이 아닐까?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