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출세의 관문(글/정진영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과거, 피하지 못할 운명
양반 자제로서 15, 16세가 되면 고을이나 감영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이나 예비적인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수능시험에 앞선 모의고사인 셈이다. 이를 통해 과거시험의 출제경향이나 답안작성 요령 등을 터득하는 한편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든 양반 자제들이 다 과거에 응시하고 과거준비를 했던 것은 아니다. 재산이 넉넉한 경우에는 요행이라도 바랄 수 있었지만, 가난한 집안의 경우에는 맏아들이나 총명하다는 소리라도 들을 만해야 공부를 하거나 과거에 응시해 볼 수가 있었다. 과거공부에는 많은 시간과 자금을 필요로 했다. 경상도에서 한양에 한번 오르내리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준비하는 양반 자제들을 흔히 유생儒生이라고 하였다. 과거 준비는 사람들의 개성과 형편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었지만, 많은 경우에는 수십 명씩 집단적으로 특정한 곳에 모여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를 ‘거접居接’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합숙훈련인 셈이다. 거접의 장소로는 향교나 서원보다는 사찰이 대부분이었고, 기간은 10여 일 전후였다. 향교나 서원이 명목상으로는 교육기관이었지만, 향교는 조선 초기를 제외하고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고, 서원 또한 구조상 유생들을 장기간 수용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사찰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에 위치하여 조용히 공부에 몰두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장기간의 숙식 또한 가능했다. 거접에 필요한 생필품은 본가에서 수시로 보내오고 있었지만, 승려들이 유생들의 접대에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조선후기 사찰은 지방의 양반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숭유억불이라는 국가정책 아래에서 사찰과 승려들은 지방의 유력 층인 양반들의 보호가 절실했고, 유력 양반들은 종이나 짚신 등 일상 생활용품을 승려나 사찰로부터 공급받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과거科擧에는 소과인 생원, 진사시와 대과인 문과, 그리고 무과와 잡과가 있다. 양반들은 주로 생원 · 진사시와 문과에 응시하였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을, 진사시는 문학을 시험하는데 1차[초시初試]와 2차[복시覆試] 두 차례의 시험을 치러 각기 100명을 선발하였다. 생원,진사시를 합하여 흔히 사마시司馬試라고 하였다. 대과인 문과는 유교 경전, 문학, 정책에 대해 1,2차를 거쳐 33명을 뽑고, 마지막 전시殿試에서는 석차만을 정하였다. 이들 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子,卯,午,酉年)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식년시式年試가 있고, 이 외에도 부정기적인 증광시增廣試, 알성시謁聖試 등이 있었다.
과거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인재의 선발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공정한 평가가 그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따라서 이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오늘날에도 각종 시험에는 원서를 내고 수험표를 받고 시험장에서 본인 여부를 확인하듯이, 조선시대 과거에서도 이와 비슷한 절차를 거쳤다. 대,소과를 막론하고 과거응시를 위해서는 우선 등록을 해야 했다. 등록 시에는 자신의 성명과 본관, 거주지와 4조[부,조,증조,외조]의 성명, 관직 등을 적은 서류[단자單子]와 현직관료의 신원보증서 등을 제출하였다. 등록관은 이를 통해 범죄자, 국가재산을 횡령한 자의 아들, 두 번 시집갔거나 행실이 나뿐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의 자손 등 응시 부적격자를 가려내었다. 그리고 소학小學이나 가례家禮 등에 대한 기초적인 구두시험에도 통과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응시 부적격자나 기준 미달자들을 사전에 걸러 과거 시험장[과장科場]의 혼잡을 다소간 피할 수도 있었다.
과거 응시자는 시험장에서 쓸 시험지를 직접 준비하여 검인을 받았다. 검인은 등록 시에 주로 시험지 첫머리 윗부분에 본인의 관직,이름,나이,본관,거주지와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의 이름과 본관을 다섯줄로 쓰고 봉한 뒤 확인 도장을 받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험지에 응시자의 인적 사항을 보이지 않게 봉하는 것이다. 이를 피봉皮封 혹은 비봉秘封이라고 하였다.
시험지[과지科紙]는 원래 질이 낮은 종이를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문벌가문 자제나 시골의 가난한 선비 할 것 없이 모두가 두텁고 좋은 종이를 사서 사용하였다. 좋은 종이에 쓰여 진 답이 더 그럴듯하게 보일 것이고, 무엇보다도 합격한다면 그것은 자손만대로 전해질 가문의 영광이었으니 어찌 질 낮은 것을 사용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응시자는 자신이 준비한 시험지에 문제와 답을 기술하여 제출하였다. 채점은 제출된 답안지 자체로 하기도 하지만, 붉은 글씨로 베낀 다음에 평가하기도 하였다. 채점관이 글씨체를 보고 정실에 좌우되어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합격한 시험지 원본에는 순위와 점수가 기재되었다. 오늘날 이런 과거 시험지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시험을 앞둔 유생들이나 부모들은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앞서 합격여부를 점쳐 보거나, 운세를 따져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한 밤 중에 목욕재계를 하고 북두칠성을 우러러 과거 길에 나선 아들의 급제를 간절히 기도하는 부정父情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 이런저런 금기사항도 많았다. ‘낙落’자를 기피하거나, 가까운 추풍령이나 죽령 길을 굳이 마다하고 문경새재 길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추풍령과 죽령은 추풍낙엽과 죽죽 미끄러지는 의미를 연상하는 데 반해, ‘문경聞慶’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끝내 낙방하면 불운이나 부정을 탓하거나 과거가 진정한 유자儒者의 길이 아니라는 것으로 애써 위로하기도 하였다.
과거급제, 가문의 영광
문과 · 무과 합격자들의 영광은 과거 합격증서[홍패紅牌] 수여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수여식은 문무 모든 관료와 급제자의 부모형제는 물론이고 국왕이 직접 착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된다. 호명에 따라 국왕에게 절[사배례四拜禮]를 올리고 나서 합격증서와 술, 과일, 어사화, 일산 등을 하사받았다. 뒤이어 시험을 주제했던 시험관과 급제자들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다. 다음날에는 궁궐로 나아가 국왕에게 감사하는 의식[사은례謝恩禮]을, 그 다음날에는 성균관 문묘에 가서 공자의 신위에 참배하는 의식[알성례謁聖禮]을 올린다. 그리고는 사흘 동안 일종의 축하행진이고 퍼레이드라 할 수 있는 유가遊街가 행해진다. 유가를 할 때는 춤추는 아이[천동天童]와 악대[악수樂手] · 광대가 앞에서 흥을 돋우고, 어사화를 쓰고, 일산을 바쳐 든 급제자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면서 일가친척을 찾아 다녔다.
지방 출신 급제자들에게는 귀향한 후에도 축하연이 계속되었다. 귀향하는 날 고을 사람들과 관리들이 모두 나와 환영하였고, 이후 다시 고을에서의 유가가 시작된다. 고을 수령은 급제자와 부모를 관아에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었고, 집에서는 동네 사람들과 일가친척이 모여 축하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는 주위 이곳저곳 온 친척들과 사대부가를 찾아 과거 합격 인사를 다니기도 하였다. 이렇듯 과거 급제란 자신과 가족만이 아니라 고을 전체의 영광이기도 하였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니 누가 과거를 마다할 것이고, 어느 부모가 이를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급제의 영광이 크면 클수록 낙방한 선비들의 낙심과 좌절도 그만큼 더 커졌다. 그러나 한두 번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은 십여 년 이상, 심지어는 평생 동안 과거에 매달리는 경우도 허다하였지만 행운은 끝내 외면하기 일쑤였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영남에 기반을 둔 남인은 정치적으로 몰락하면서 과거마저도 쉽지 않았다. 3년마다 오는 정기 시험은 경쟁력이 더욱 치열하였고, 다양한 특별시험은 서울 세도가 자제들의 잔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남 선비들의 낙심과 좌절은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중앙과의 단절, 학문의 고루함을 의미하였다.
문과 급제자 수는 지역에 따라 크게 달랐다. 안동,상주,경주 등 큰 고을에는 양반의 수도 많았고, 과거 또한 수백 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반면에 경상도의 몇몇 고을에서는 조선 5백 년 동안 한 명의 대과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하였다. 또 생원,진사 합하여도 10여 명이 되지 않는 경우도 17개 고을이나 되었다. 따라서 문과 급제란 개인이나 가문만이 아니라 고을의 영광으로 치부되기에 충분했다.
양반은 다름 아닌 각 고을의 토착세력인 토성土姓으로부터 나왔다. 토성세력의 강약이 결국 고을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였다. 이들은 양반이 되기 전에 주로 향리로 존재했다. 향리의 자제들은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지방행정실무를 담당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 무신정권이후 중앙으로 진출하여 재경관인이 되고 양반이 되었다. 재경관인이 된 이들은 그들 출신지의 인재들을 중앙으로 이끌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작은 고을보다는 큰 고을의 양반들이 과거와 출세에 보다 유리하였다. 춘양,재산,내성 등의 지역이 안동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안동에 소속되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양반들에게 과거급제란 벼슬길에 나아가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비록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과거 합격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양반으로서의 신분과 지위가 보장되었다. 국가에서 파악하는 양반[사족士族]의 조건은 자신이 생원이나 진사인 자, 문과,무과 급제자와 그 자손, 그리고 6품 이상의 정직에 올랐던 현관顯官의 자손이었다. 물론 이 같은 규정이 늘 그대로였던 것도, 향촌사회에서 항상 통용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같은 범주를 벗어난 명문가문의 존재란 상상할 수 없다. 과거급제란 양반사회에서 양반이, 그것도 명문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을 구비하는 것이었으니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과거가 가문의 영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특히 18세기 이전의 경우 문과급제는 벼슬을 보장해 주었고, 벼슬은 부귀를 보장해 주었다. 물론 벼슬 그 자체가 오늘날과 같이 고액 연봉을 보장해 주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직의 있고 없음과 높고 낮음이 한 가문의 경제적인 흥망성쇠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관직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도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선물’을 취득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공적 자원의 사적 전용도 가능하게 된다.
선조 연간의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은 전라감사 등을 역임하면서 쌀과 반찬류 등 일상생활품에서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을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월 평균 40여 회 이상 받고 있었다. 어떤 해에는 선물로 받은 쌀이 200여 석에 이르기도 하였고, 해남에 가옥을 신축할 때에는 집터에서부터 목재, 기와는 물론이고 노동력의 동원 등에 이르기까지 인근 수령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지원이란 국가의 재산과 농민의 노동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17세기 말 경상도 칠곡의 이담명李聃命은 경상감사를 물러난 뒤에도 한 해 동안 587명으로부터 꿩이나 감 등 1,404종의 물품을 선물 받고 있었다.
개인이나 지방 수령들의 이 같은 선물과 지원은 물론 반대급부를 염두에 둔 뇌물의 의미도 없지 않았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부정부패의 전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 시장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경제적 행위이기도 하였다. 곡류나 어물, 찬류가 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조선전기의 선물이 시장과 상품경제가 발달한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수수의 빈도나 양에 있어서 현격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 같은 사정을 말해준다. 조선후기에는 붓이나 먹, 종이류 등 문방구가 선물의 주된 내용이 되었다.
아무튼 조선 양반사회에 있어서 선물의 교환은 당연한 관행이었고, 도리어 특권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특권은 오늘날에도 은근하게 기대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조선시대 양반가문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에서 중앙의 벼슬살이를 한 경우와 시골의 선비는 비교되지 않는다. 막대한 토지와 노비는 그 자체의 소유만으로 수입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적절하게 경영되고 통제되어야 생산성이 높아진다. 경영과 통제에는 상당한 권위와 힘을 필요로 한다. 벼슬에 나아간다는 것은 강력한 권위와 힘을 확보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급제와 벼슬이 영광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의 양반이라면 누가 과거와 벼슬을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과거에도 부정합격이 있었다
과거가 사회적으로 중요하였던 만큼 시험의 관리도 엄격하고 철저하여야 했다. 그래서 다양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시험관이 응시자의 이름이나 글씨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름을 봉하거나 붉은 글씨로 베껴서 채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응시자가 시험장에 들어갈 때는 옷과 소지품을 검사하였다. 책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는 경우에는 처벌되었다. 시험장에서는 한 길 정도 간격으로 떨어져 앉게 하였다. 정기시험에서는 보통 밤 9시까지[인정人定] 답안지를 내게 하였고, 당일로 합격자를 발표해야 하는 특별시험의 경우에는 시간이 조정되었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의 과거는 아주 엄정하게 시행되었고, 응시자들 또한 선비답고 유학자답게 시험에 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때 없이 시험에는 부정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부정은 시험장에서부터 채점과 합격자의 발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과거 응시자가 급증하였다. 여기에 권세가의 자제들은 심지어 10여 명에 이르는 하인들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시험장에 수 천, 혹은 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몰려 난장판이 되고 짓밟혀 죽는 자가 속출하기도 하였다. 하인의 대동은 물론 금지사항이고 불법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하인들의 역할이 자리 잡기, 음식 운반만이 아니라 책 숨겨 가기에서부터 시험답안 작성과 베끼기 등에 까지 이르렀으니 사실상 조직적으로 부정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뿐 아니었다. 대리시험이나 시험지 바꾸기 등의 부정행위도 행해졌다. 또한 응시자들이 너무 많아 서리들이 모든 시권을 베끼고, 채점관이 모두 읽을 수가 없게 되자 먼저 제출한 시험지 앞부분 몇 줄만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험관과 응시자가 짜고 부정합격을 꾀하는 방법도 다양하였다. 시험문제 미리 알려주기, 답안지에 암호 기재하기 등에서부터 아예 합격한 남의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표를 붙이는 시험지 도둑질[절과竊科]에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수법의 부정행위들이 자행되었다. 물론 이러한 부정행위를 제재하기 위한 법이 없거나 허술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엄한 단속도 늘 강조되었지만 그 대상자가 권세가의 자제들이고 그 부형父兄들이라는 점에서 부정은 근절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의 부정행위가 큰 사건으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숙종 25년(1699)의 증광문과 2차 시험에서는 남의 시험지로 합격한 경우가 무려 13건이었고, 이외에도 다양한 부정행위가 뒤늦게 발각되었다. 이로써 전체 합격이 취소되고 시험관 등 수십 명이 먼 섬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머지않아 석방되어 벼슬길에 다시 나아갔으니 처벌이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오늘날에도 권력이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멀쩡하다가도 범죄사실이 발각되기만 하면 곧잘 중환자가 된다. 그래서 병원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해 휠체어 타고 마스크도 끼고 부축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다. 그러고는 곧 풀려나거나 사면되어 버젓이 잘도 돌아다닌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도 생기게 되었다. 어떤 나라가 선진국이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잣대는 경제력만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법이 공평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면, 세상이 투명하지 않다면 아무리 경제가 발달했다 하더라도 그 나라는 여전히 후진사회일 뿐이다.
과거科擧의 문제는 이러한 부정행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과거 공부는 실천이 없는 자구의 해석에 매달린다거나 좋은 말이나 글귀를 끌어다가 문장이나 만드는 것으로 평가절하 되기도 하였다. 또 그것을 입과 귀로만 하는 학문[구이지학口耳之學]이라거나 이름과 이익[名利]만을 쫓는 말단의 폐습으로 지탄받기도 하였다.
18세기 영남의 큰 유학자였던 대산大山 이상정 李象靖은 과거제의 폐단으로 그 종류가 지나치게 많고, 너무 빈번하며, 내용 또한 단순한 암기와 형식적인 글짓기 따위의 말단적인 것만을 추구한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과거 시험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생각을 한 선비들이 참으로 많았다.
아무튼 과거공부가 이익만을 쫓고 실천 없이 입으로 중얼거리고 귀로 듣기만 하는 학문에 불과하고, 부정 또한 극히 개탄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그래도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한편에서는 과거제도에 대한 비판과 그 개혁을 역설하였지만, 정작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을 때에는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조선후기 노론 전제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이어지면서 영남의 선비들은 과거에 크게 불리하였고, 또 양반 인구의 증가로 경쟁력은 더욱 치열하였다. 영남의 많은 선비들은 평생을 두고 과거에 응시했지만, 급제라는 영광을 안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낙방한 대부분의 선비들은 과거에 뜻이 없었으며, 부형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응시했으나 곧 포기했다는 식으로 짐짓 과거에 무관심했던 것처럼 보이길 원했다.
이러한 사정에서 자의든 타의든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영남에서는 이 같은 처신을 사회적으로 아주 높게 평가하였다. 과거에 연연해하거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草野에서 학문하는 선비들을 영남에서는 특별히 ‘처사處士’라고 불렀다. 영남에서 처사란 벼슬 못지않은 명예로운 호칭이었다.
역사상 조선왕조만큼 학문을 숭상한 나라도 시기도 없었다. 그것은 지식인들이 주체가 되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다양한 학문의 발전과 세상의 진보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학문의 다양성도 독창성도 인정해 주지 않았지만, 학문이라는 것이 맹목적인 외우기와 형식적인 글쓰기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평생을 고시공부에 매달려, 설사 합격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일신의 부귀영화를 보장해 줄지언정 학문의 발전이나 세상에 유익한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축, 고시합격’이 시내 길거리나 동네어귀뿐만 아니라 대학 교정에까지 나붙는 우스꽝스런 풍경을 낮 설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우스꽝스런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도 출세지향주의 권력지향주의의 조선시대나 마찬가지이다.
뜻있는 사람들이 과거의 병폐와 외우기 공부로는 독창적이고 쓸모 있는 유능한 인재를 길러낼 수 없음을 누누이 지적했지만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오랜 인습이기도 했고,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노론 집권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에도 아주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 집권세력은 개혁을 통해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할 의지도 그럴 능력도 없었다. 영남의 남인들 또한 개혁안을 보다 치밀하게 하거나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적 조직적으로 계승해 갔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피상적인 당위성의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진정한 개혁에 대한 요구와 충실한 대안은 우리가 실학자라 부르는 일부 재야 학자들의 목소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의 간절한 외침을 집권층은 끝내 무시하거나 도리어 탄압으로 일관했다. 스스로를 바꾸어 나갈 능력을 상실한 권력은 망할 수밖에 없다.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성들에겐 엄청난 고통일 따름이다.
망해야 할 권력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식인과 백성들을 억압하고 탄압하거나 외세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세상을 맨 몸으로 감당해 내야 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시대 없이 그들의 개별적인 불만을 하나의 정당한 생존의 요구로 뭉쳐내게 마련이다. 이를 억누를 능력조차 가지지 못한 권력은 끝내 외세에 의존하는 길을 택한다. 역사상 이 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오늘의 두려움은 진정 여기에 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