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인생 50년, 류윤형 화백(글/이희수_프리랜서 작가)
미술관 옆 동물원
지하철 4호선의 서울대공원입구는 내게 꽤나 친숙한 곳이다. 혼자인 것이 외려 더 편했던, 남의 이목이 어떻건, 그날의 수업을 마음 편히 재끼고 코끼리 열차 타고 현대미술관에서 마음껏 시간을 쏟아도 아깝지 않던 그때가 참 그립다. 그림이 뭔지도 모르고 볼 줄도 모르지만 그저 누군가의 화폭 안에 머무르던 그 짧은 몇 분은 온갖 곳에 마음 써 정작 내 안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마다 참으로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스물 한 살의 대학생이 갖기에 호사스런 여가였지만 기꺼이 그럴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나이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해 본다.
코끝이 찬바람에 무뎌지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뎅과 붕어빵 포차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겨울이다. 계절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한다니 왠지 꼭 눈이 와야만 할 것 같은 설렘을 가진 것은 화가에 대한 나의 동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그림이란 초등학교 시절 반공포스터 그리기 장려상, 불조심 포스터 우수상 그리고 좋아하는 만화가의 그림을 몇 번 따라 그리다 이제는 노트 한 구석에 끄적거리는 낙서가 전부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말 없는 친구가 수더분하게 늘 내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것 같은 작은 위안이 아마도 오랫동안 화가에 대한 동경으로 자연스레 우러난 것 같다.
류윤형 화백의 서후면 저전리 작업실
서후 저전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시내중심가에서 차를 얻어 타니 10분 남짓한 시간에, 그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앞 산 드문드문 놓여있는 하얀 눈들이 아직 채 녹지 않은 곳이 보일만큼 그곳은 풍경을 좋아하는 화가의 작업실로 안성맞춤인 외진 곳이기도 했다.
류윤형 화백을 만난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동 서양화계의 원로인 그는 어느덧 일흔을 앞두고 있는 나이다.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선 이력은 으레 예술 하는 사람들이 다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결심을 하기까지 오랜 소망이 얼마나 컸는지 또한 그러한 결심이 낳을 또 다른 결과에 대한 마음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과연, 짐작할 수 있었다.
류윤형 나와, 이거 누가 대신 그려줬어?
일흔 화가의 손은 생각보다 투박했다. 거칠고 큼직한 그의 손이 한 번씩 오르내릴 때마다 그윽하게 석유 냄새가 풍겼고 짧게 잘려진 손톱 밑은 거뭇했다. 수채화에 물이 필요하다면 유화에서는 기름이 필요하니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손마디가 굵은 것은 본래 그의 풍채 탓도 있겠지만 그림 그리는 일이 중노동이라 표현한 그의 말을 수긍케 하는 부분이었다.
본래 그림을 좋아했다는 류윤형 화백은 6.25 전쟁 몇 해 전인 1946년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촌 깊숙이까지 전쟁의 화마가 잘 미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하 수상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어린아이의 놀이거리란 자연이 전부였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주 강하게 남아있어요. 물새 따라다니며 새알 줍고 고기 잡고 하던 것이 다였지만 말이죠.”
아마도 유년을 함께한 자연에 대한 기억들이 풍경화를 그리는 데에 많은 여운을 남기지 않았을까, 또한 그 시절 화가에게 그러한 기억들이 강하게 남을 만큼이라면 얼마나 예뻤을까,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냐는 질문에 ‘사람이 무엇을 시작하는 데 정확하게 수치화해서 딱 언제부터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며 그냥 그림이 좋았고 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노라 현답을 줬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2km남짓한 거리였다. 여학생들은 신작로 길로, 남학생들은 산길로 학교를 갔다. 가다보면 저 멀리 중간쯤에서 6학년 형들이 ‘스톱!’하고 소리쳤다. 그러면 코 찔찔이 1학년들은 뭣도 모르고 형들이 하란대로 했다. 같이 고기 잡고 산으로 들로 놀다 학교도 빠졌다. 6.25 전쟁 직후였을 테니 땟국물 흐르는 저고리 한 장 걸치는 게 옷을 입은 것, 전부였다고 한다. 간혹 한두 명 신발을 신었다하니, 텔레비전에서 익히 보던 시대극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굴러다니는 아무런 종이에 크레파스 하나 뿐이였던 류윤형 화백의 어린 시절 그림이 문득 궁금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방학숙제 검사를 하던 선생님이 “ 류윤형 나와! 이거 누가했어?” 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어 “제가 했습니다.” 라고 답 했으나 선생님은 그 말을 믿지 못하고 크레파스와 종이를 내밀며 그 자리에서 그려보라 했고 그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가 그 자리에서 숙제로 해 온 것보다 더 잘 그려내자 선생님은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린 시절, 그림이 좋아, 오롯이 독학으로 그림을 해온 그는 고향인 안동 풍천에서 영주로 이사를 갔다.
길에서 만나 도화지 천장 사주던 선생님
지금은 4형제뿐이지만 본래 6형제 중 맏이인 그의 집안은 그리 넉넉지 못했고 식구들은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 그가 풍천국민학교에서 1년을 보냈을 즈음 영주로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 그림 선수였단다. 영주에서 어머니는 해장국집을 했고 아버지는 식구들을 위해 이일저일 막일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 류윤형 화백은 줄곧 그림을 놓지 않은 채, 영주에서 영광고등학교를 마치고 안동교대 1회로 입학을 했다. 식구들은 이내 다시 아버지의 직업을 찾아 울산으로 이사를 갔다.
고된 유년의 마디, 마디에 그가 그림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아마도 그의 재능을 알아채고 이끌어주던 선생님들과의 인연의 덕도 있지 않을까.
시골 학교에서는 그림을 가르쳐줄만한 미술교사가 없었다. 어쩌다보면 음악 선생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있을 때도 있었다. 한 번은 고등학생 때, 초등학교 시절 그림을 더러 가르쳐주던 선생을 만났더랬다. 길에서 마주친 선생님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계셨다. 이내 선생님은 그를 영주 동부중학교 앞 문방구로 데리고 가 도화지 천 장을 사 손에 들려줬다. 세월이 지나도 선생에게 ‘ 류윤형은 그림을 잘 그렸다’ 라고 기억될 만큼 그가 그림에 대해 타고난 꾼 정도였다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월남전에 가서 탈영한 후 프랑스에 가고 싶었지
시절이 어려우니 그는 돈이 안드는 교대에 가야했으나 정작 교대를 나오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문경동로국민학교에서 1년 정도 부임한 후 이내 사표를 내고 군대를 가버렸다.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치를 받아 군 생활을 한 후 월남을 가려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신체검사 ‘3을종’을 받고서도 군대가 가고 싶었다는 그에게 뜬금없이 월남전에는 왜 가려했냐며 묻자, 농 삼아 월남전에 가서 탈영해, 프랑스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한다. 농 뒤에, 껄껄껄 시원한 웃음 뒤에 ‘정말 그랬을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림이 좋았던 것일까.
중 1때부터 공부 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고3이 되어서야 미대를 나온 미술 선생님이 학교에 오게 되었다. 미대를 갓 졸업한 미술선생은 당시 류윤형 화백과 고작 6살 정도 차이였으니 형뻘이나 다름없었고 서로 그림이 좋아, 함께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1년간이 류윤형 화백에게 그림을 ‘제대로’ 배운 시간의 전부였다.
서울서 온 미술선생 덕에 당시 홍대에서 열린 전국학생미술 대전에 처음으로 참가를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촌에서 왔다고 한 자리 끼워줬다는데 아마도 입선을 했다는 말이었을 게다.
스스로가 좋아 그림을 달고 살았지만 여전히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그림도 딴따라로 취급받던 때였다. 문득 집 안의 장남에, 시절도 그러하니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그를 반대하지는 않았을까 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부모님의 반대가 나오게까지 앞뒤 안 재고 무작정 결심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림도 그림대로 그리면서 교대를 갔고, 교대를 가보니 정작 그림을 그릴 수 없어 그가 군대를 다녀와 선택한 차선책은 중고등 미술교사 임용시험이었다. 그렇게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는 화가로서의 끈 또한 놓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학교 복도에서 첫 개인전
일찍이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기에 그의 그림은 종종 학교 복도에 걸렸다. 국민학교 5학년 때 학교 복도와 교실에 걸렸던 그림들이 그의 생애 첫 개인전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생애 최초 개인전을 시작으로 그는 지금까지 이십 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각종 특별전 등의 여러 곳에 그의 자취를 남겼다.
그의 취향은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이다. 서양화를 해도 디자인이나 혹은 추상화로 많이 나가고 있지 구상화를 다루는 화가들이 드물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사진 기술이 점점 발달하고 사진을 찍는 것 또한 하나의 예술 분야가 되면서 정물과 사람, 풍경을 그리던 것이 사진에 밀리기 시작했다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다소 이해할 수 없으나 어찌됐든 잘 나오는 사진 덕에 풍경이나 정물은 그만하고,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추상 이상의 것을 대신 그림은 표현할 수 있다하여 많은 미술인들이 추상화를 선호하게 됐다는, 썰이다.
이것은 순전히 필자의 생각이고 소문일 뿐이고, 굳이 오랜 시간 풍경화와 정물화를 고집해온 류윤형 화백의 뜻이 궁금했다. 그의 일침이 여기서 그닥 멀리 떨어진 얘기는 아닌 듯 했다.
“요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그림을 아주 잘 그립니다. 일찍부터 배워온 탓도 있지만 어찌됐든 다들 기교가 뛰어나요. 하지만 그림은 잘 그리지만 뭔가를 그 안에 담아내려 하지 않습니다. 풍경도 정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예쁘죠. 인물도 요즘은 인기가 없어요. 요즘은 너도 나도 다들 추상화를 많이들 선호하죠. 구상화는 돈이 안 된다고 그러고.”
좋은 그림이 좋은 그림입니다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한창 그의 말에 귀 기울이던 중 좋은 그림이란 무엇인지 물어본다.
“좋은 그림이 좋은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는 데에 특별한 기준과 가치관을 제시하는 어려운 그림풀이에 대해 늘 반감을 가지고 있던 필자는 왠지 그의 대답에 마음이 가벼워 졌다.
그의 작업실에는 풍경화로 가득 차 있다. 언젠가부터 구상(풍경이나 정물화 등)과 추상의 중간 즈음도 그리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고 했다. 풍경화를 그릴 때는 주로 현장으로 작업을 하러 나가지만 대작을 그릴 경우,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경우는 꼭 사진으로 남겨서 작업을 해야 한다. 다소 놀랐던 것 중에 하나가 전시회에 쓰이는 리플릿에 들어가는 그의 작품 사진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는 것이다. 언뜻 봐도 보통의 솜씨는 아닌 듯했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화폭에 담을 수 없는 경우는 사진을 찍어둬야 하기에 화가에게 사진 찍는 일 또한 자연스러운 일상 가운데 하나인 듯 했다.
에피소드
가능하면 남들 출근할 때 출근하고 퇴근할 때 퇴근한다는 게 화가의 규칙이라면 규칙이었다.
누드화나 풍경화를 그릴 때 다른 때 보다 준비와 작업의 양이 많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예전에는 누드화를 찾는 이도 많아 곧 잘 그렸는데 서로 코드가 맞는 모델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몇 년 동안 같이 작업을 해 오던 모델의 몸매가 이제는 변해서 그릴 수 없다며 그는 아쉬움을 웃음으로 달랬다.
풍경화는 대게 야외로 나가 작업을 하는 데 대부분 현장을 물색하고 자리를 잡아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린다. 하루는 영양 어디쯤인가 지나다 맞춤한 풍경이 있어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지나가는 노인 둘이 “캬, 그림 좋다!” 라며 그에게 존칭을 하더란다. 언뜻 봐도 연배가 있어 뵈기에 장난기 그득한 그가 노인 둘에게 나이를 물었다. 나이를 듣고 나니 외려 그들이 류윤형 화백의 형님뻘이었다. 그는 ‘내가 더 젊은데 나이 많은 이 취급 받은 것이 속상하다’ 하여 속으로 어떻게 복수를 하나 싶던 찰나, 존칭하는 두 노인에게 하대를 한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하였다고 했다. 나이보다 덜 들어 보이길 원하는 것은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은 모양인 게다.
우리집에 내 그림은 하나도 없소
자연은 계절과 모양새가 금세 바뀌니 하루 이틀 가서 끝날 일이 아니면 바로 바로 사진으로 남겨 남은 작업은 작업실에서 하게 된다. 이렇게 1년, 2 년 그려내 한 아름 작품들이 모이면 그를 찾는 전시회 혹은 그가 마음먹은 전시회로 그림들을 내 걸었다.
개인전이 아닌 이상 간혹 여러 분야의 예술인들이 한데 보여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하는데 얼마 전 안동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전시에서 다른 작가와 작품을 맞바꾼 일도 있었다. 도자기를 빚는 김상구 작가의 ‘달 항아리’ 와 그의 그림을 바꿨는데, 흔한 일은 아니지만 서로의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그리도 하는가 보다 싶었다. ‘달 항아리’를 집에 잘 모셔놨다는 그에게 집에 그의 작품이 걸려있는 지 물으니, ‘내 그림은 하나도 없다’한다.
반면 작업실에는 아직 이름도 써 놓지 않은 유화를 입은 캔버스가 벽에 하나, 둘 세워져 있었다. 앉았다 일어서거나 이래저래 돌아다니다 눈에 익히 들어오다 보면 고칠 곳이 보인다 한다. 사인을 해서 액자에 집어넣는다 한들, 부모의 눈에 자식이 완성되어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쩌면 집에 굳이 자신의 그림을 걸어놓지 않는 이유인가 싶었다.
교직생활 20년 딱 채우고 전업작가 길로
3살 씩 터울이 진 아래 동생들을 업어 키웠다는 류윤형 화가는 집안의 맏이였다. 학생신분에 벌이를 나서지는 못했지만 학교에서 공납금을 면제해준다고 해서 그는 고등학생 시절 배구선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제대로 못해도 후보로라도 따라다녀야지 싶은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주전으로 뛰기도 했다고 하니,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던 듯하다. 배구 외에도 농구나 핸드볼 같은 다른 운동들도 두루두루 했다. 그림도 잘 그리고 운동도 곧 잘 했으니 이성에게 인기깨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젊은 류윤형의 연애사를 물어본다.
군대를 마치고 중고등 임용시험을 본 그는 단번에 합격해 이내 의성으로 부임을 맡았다. 젊은 총각이 하숙을 하니 하숙집 주인과 친한 동네 아주머니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를 보고는 사위를 삼고 싶다 노래를 불렀다. 말이 씨가 됐다며, 그는 의성 아가씨를 만나 그대로 결혼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자녀는 아들만 둘이다. 큰 아들은 어렸을 때 한반도 지도를 실수 없이 한눈에 그려내는 것을 보고는 자신처럼 미술을 하면 어떨까 싶어 몇 년을 시켜보았다. 하지만 저마다의 길이 있는 것이라 큰 아들은 미술을 하다 접고 다른 길을 택해야만 했다. 아버지 류윤형에게 그림은 배고픈 어린 시절에도 놓을 수 없었던 맹목적인 열정이 담겨있었으니 아들이 그리는 것을 보고는 ‘그러고 먹고 살 수 있겠나’ 싶어 냉철한 판단으로 그만두게 했다 한다. 부모에게 그런 결심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말은 좀처럼 꺼내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것은 아마도 그만큼의 애정이 담겨있는 것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둘째 아들은 토목을 전공했다는 데, 류윤형 화백이 6년 전쯤 지금의 서후면 저전리로 화실을 옮긴 이후 마당도 치우고 집안 여기저기 손이 필요할 때는 곧잘 와서 도와준단다.
그의 아내 박화자 여사에게 남편으로서는 그는 한 쪽은 빵점 다른 한 쪽은 그럭저럭이란다.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와 남자가 좋아하는 남자는 다르다하니, 친구와 사회에서는 그럭저럭 인정받고 아내에게는 빵점이란 소리다. 스스로를 집안의 독재자라 부르며 그가 이십 년 간의 교직생활을 정확하게 이십 년을 딱, 채우고 그만두게 된 이야기를 꺼냈다. 이십 년 교직생활을 하면 그때부터 퇴직을 하더라도 다만 얼마간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그림이 그리고 싶어 초등교사를 그만두고 중고등 미술 선생이 되었으니 이십 년간의 긴 계획도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것이다. 상의도 없이 이미 사표를 내고 와서 통보만 했다고 한다. 작업실에 마실 나와 옆에서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지인이 “형수님 속이 새까맣게 탔지 뭐” 라고 말했다.
한 번은 새벽녘에 옆에서 훌쩍훌쩍 아내가 울고 있더란다. 자다가 뭐하노 하니, 아내는 연금증서를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제사 학교를 그만둔 게 실감났다 보더라며, 그가 그렇게 학교를 그만둔 지도 시간이 이십 년을 넘겼지만 그때의 아내 모습을 지금까지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보니 미안했던 마음을 감추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속을 태웠으니 그림 그리는 남편이 미웠을 법도 한데, 외려 요즘은 평론가가 다 됐단다. 그의 그림을 보고 딱 기다, 아니다 하고 코치도 한단다.
예술은 기교가 아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학창시절 밥은 굶어도 그림에서는 손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그림에 대한 애정이 끊이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 뒤에는 류윤형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채고 어깨를 다독여주며 인정해준 선생님들의 덕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박기태 선생과 고등학교 때 만난 첫 미술 선생. 그가 지난 어린 시절에 그림을 어떻게 그려왔는지 얘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얘기했던 부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도 미술 선생이 아니었는가. 예전의 그처럼 미술에 재능을 보이는 제자를 발굴하고 이끌어주지는 않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서 세월의 흐름 속에 인정이 사라진 쓸쓸함이 느껴졌다.
“요새 애들은 그림 그리라고 해서 안 그려요. 국선에서 대상을 타도 전화 한 통 없는 학생도 있어요. 예전의 사제지간은 없어진지 오래지 뭐.”
여럿 보기에 안 예뻐 보여도 두루뭉술해도 예뻐 보이는 게 있다. 기교만 있는 것은 인간미도 없고 속이 거북하다. 요새 텔레비전을 보면 똑같이 생긴 연예인들이 나오는 거랑 같다고 한다.
재능을 일으켜준 제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겠으나 그 서운함 뒤에 요즘 그림에 대한 기교만 넘쳐나는, 그저 잘 그리는 것이 우선이 된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일흔을 바라보는 화가 류윤형에게 유난히도 안동, 경북북부지역에서 풍경을 고집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래도 서양화를 한다면 한 번쯤 유학이라는 것을 가보고 싶지 않았을까.
“갈 데가 없으니까, 내 같은 게 서울 가서 어떻게 살겠나.”
하지만 그는 비교적 오지 그대로, 아직까지 개발이 덜 된 안동, 예천, 영양, 청송, 의성 등의 그가 사는 지역 곳곳의 자연을 많이 아끼고 좋아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에 취해 안동을 떠나고 있지 못했나 보다.
꾀 좀 부려볼까 했더니 어느새 쭈글쭈글해졌다
“교직 생활 20년 하면 다만 연금이 얼마 나온다. 그래서 20년 되던 해에 딱 그만뒀다. 나는 어떻게 생활하더라도 식구들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 20년 되던 해, 내 나이 45살에 학교를 그만 뒀다. 그 뒤에야 비로소 그림을 그리 수 있었다.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요령 없이 꾀 없이 했다. 요즘 꾀 좀 부려볼까 하니까 이제 쭈글쭈글 해졌다.”
세월의 노곤함이 묻어나는 그에게 화가로서의 삶에서는 아직도 청춘인 마음이 느껴졌다.
운안동 KBS방송국 밑에 첫 화실을 얻었던 것이 학교를 그만 두던 바로 그 해다. 화실을 얻을 돈이 없어서 점포 비슷한 것을 얻어 놓고 출퇴근 했고 스스로를 대표이사라 부르며 오롯이 그림만 그릴 수 있게 된 그 날, 어쩌면 그에겐 해방의 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물은 잘 팔리지도 않고, 구태여 매달려 그릴 이유가 없으나 풍경은 그림이 잘 안 되도 마음은 시원하다고 한다. 그렇게 정물화도 더러 그리고 인물화도 더러 그리고 풍경화도 더러 그려놓은 작품이 어느 새 500점이 넘어섰다. 정확한 계산은 안 되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라 한다.
풍경화는 현장 작업을 많이 하니 오갈 때 한 시간씩 두 시간 소비하고 현장 가서 3시간 정도 그림을 그리면 하루 5시간 정도는 중노동을 하는 셈이라고 했다. 그래도 그렇게 보내는 하루는 알차나 어쩌다 그림 그릴 곳을 찾다 그만 공치는 날도 있다.
그리 편치도 않게 그림과 살아온 지 50년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공을 들이고 혼을 실어 논 작품들이 남의 손으로 가게 될 때는 또한 화가의 심정이 어떨까 싶었다. 그는 단 한마디로 모든 것을 말해줬다.
“작품에 사인하면 내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 손을 떠난 작품도 내 것이다.”
그의 작업실 한 쪽에는 미완성인 작품들이 놓여져 있다. 그림에 완성이라는 순간은 사인이 되는 순간일까 그렇지 않으면 화가가 더 이상 손댈 곳이 없구나 하고 마지막 터치를 남기는 순간일까. 그가 한 마지막 말을 되새겨 보니 화가의 손을 떠나서도 완성이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 문턱을 넘어서니 쌀쌀해진 날씨 덕에 서걱거리는 언 잔디 위에서 그의 화실을 바라봤다. 그림 속 한 풍경 같다. 인터뷰를 마치고 화실을 나오는데, 뒤를 터서 개조해 놓은 그의 승합차를 얻어 탔다. 덜컹덜컹 돌길 위에서 붓마냥, 이젤마냥 나와 함께 간 편집기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화가의 차는 그림 도구 태울 자리는 있어도 사람 앉힐 일은 없는 모양이다. 우리도 재미있게 웃고 백미러를 보는 화가의 눈도 잠시 웃음이 묻어난다.
오던 길로 그냥 가면 돼. 욕심부리지 않고
백미러 뒤로 흐르는 구불구불 긴 길 위에 작은 점처럼 남은 그의 화실이 마치 그의 그림과 함께 한 50년을 그려놓은 듯 고즈넉해 보인다. 올 한해를 마무리할 안동 전시회를 끝으로 내년에 서울서 그림과 함께 산 50년을 기억할 전시회를 제대로 열 계획을 갖고 있다. 허나 몇 해 전 수술을 한 뒤로 건강이 예전만 못해 바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그는 아쉬워했다.
깨끗하게 비워져 물감이며 캔버스 대신 우리를 태우고 가는 그의 뒷자리가 오늘따라 쓸쓸해 뵌다. 추운 날씨 탓이려니 했더니, 동네 언저리에 있던 어느 한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좀체 끊기 힘들다던 그의 굵고 거친 오른손 마디에 끼워진 얇고 보드라운 담배 한 개비에서 스물스물 꺼질 듯 피어오르던 연기, 그 연기인가 하여 잠시 백미러 속 그를 바라봤다. 초로의 화가의 잔주름은 세월을 비껴가지 못했으나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은 아직도 다부지다. 마치 그의 붓끝처럼. 우리는 캔버스 한 구석에 가지런히 갈겨진 그의 사인처럼 조용히 앉아, 눈이 채 녹지 않은 낮은 흙길을 벗어나 이내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