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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의 숨결을 따라 장사에서 무이산까지(글/이윤화)

지난 5월 하순, 필자는 "해동주자(海東朱子)"라 칭송되는 퇴계선생의 탄신500주년을 맞이하여 퇴계사상의 원류를 찾아보는 기획프로그램을 준비하던 대구 모 TV방송국 관계자들과 함께, 공맹(孔孟)이래의 유학을 성리학으로 집대성한 주자(이름: 熹, 1130-1200)의 숨결과 자취를 찾아 중국의 관련 지역 몇 군데를 답사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유학의 창시자 공자의 고향 곡부에 있는 공묘(孔廟)·공부(孔府)·공림(孔林) 등을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주자와 관련한 유적지 답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 일행은 5월22일-23일 양일간 곡부의 공자관련 유적과 추성(鄒城)에 있는 맹묘(孟廟)와 맹부(孟府)에 대한 간단한 촬영을 마친 후, 본격적인 주자 유적지 답사를 위해 5월 24일 아침 산동성의 수도(省會) 제남(濟南)을 떠나 호남성 장사(長沙)로 날아갔다.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경이었지만, 장사는 중국의 7대 화로(火爐) 중의 하나라는 별명답게 찜통에 들어온 듯 더웠다.

우리가 도착한 바로 전 날이 5월 기온으로는 기록적이었단다. 도착한 날도 37도라고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 온도가 40도를 넘지만, 40도가 넘으면 모든 직장이 무조건 휴무임으로 매일 37-8도라고 발표한단다. 운전기사의 그 말에 더위가 몸을 더욱 휘감는다. 숙소에 짐을 풀기도 전에 우리 일행은 곧장 장사를 가로지르는 상강(湘江)을 건너 목적지 악록서원(嶽麓書院)으로 향하였다.

호남대학(湖南大學)의 구내에 위치한 악록서원은 1167년 38세였던 주자가 당시 호남지역의 유학을 대표하는 소위 호상(湖湘)학파의 대표적인 인물 장식(張　)과 함께 2개월에 걸쳐 학문을 교류하던 곳이었다. 주자는 이 서원의 강당에서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식과 함께 태극(太極)·심성(心性)·인(仁) 등에 관하여 격렬한 토론을 진행하였다. 당시 악록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호상학파는 현실문제에 적극적인 경세적(經世的)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악록서원에서의 강학(講學)과 토론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이제 막 유불(儒彿)을 넘나드는 학문적 갈등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세우려는 주자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고, 특히 주자의 사상이 경세적 성격을 띠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악록서원은 이후 많은 인재를 배출함으로서 응천서원(應天書院)·숭양서원(嵩陽書院)·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과 함께 중국 4대 서원 중의 하나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악록서원이 배출한 인재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명말청초 올곧은 생애와 심오한 사상체계를 정립하였던 왕부지(王夫之)와 청말의 위원(魏源)·증국번(曾國藩)·담사동(譚嗣同) 등 주요 역사적 인물의 정신적 요람이기도 했다.

악록서원은 여러 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중요한 건물로는 학생들의 숙소로 쓰였던 교학재(敎學齋)와 반학재(半學齋), 서원의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강당(靜一堂 혹 忠孝廉節堂), 강당 뒤 지붕 끝이 하늘로 날아갈 듯 세워진 3층의 어서루(御書樓), 어서루 오른쪽으로 사묘(祠廟)에 해당하는 염계사(濂溪祠)·숭도사(崇道祠)·육군자당(六君子堂)·선산사(船山祠) 등이 있었다.

혹시나 어서루에서 중요한 자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어렵게 허락을 받아 올라가 보았지만, 최근 간행된 일반적인 자료 이외에 특별한 자료는 없었다. 두 사람이 앉아 소장 자료의 목록을 컴퓨터에 담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답사 후 악록서원 원장 주한민(朱漢民)교수를 만나 필요한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장사에서의 유일한 일정 악록서원 답사를 마쳤다.

일행은 5월25일 아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위치한 강서성(江西省) 여산(廬山)으로 이동하기 위해 7인승 봉고에 올랐다. 오전 7시 반경 장사의 호텔을 출발하여 의춘(宜春)·신여(新餘)·남창(南昌)을 거쳐 오후 5시 반이 넘어서야 여산에 도착하였다. 여산은 송대 시인 소식(蘇軾: 호-東坡)이 읊은 "제서림(사)벽(題西林(寺)壁)"이라는 시 구절 중 "...여산진면목(廬山眞面目)"이라는 문장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곳이었다.

한 시간 가까이 숨가쁘게 가파른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올라가자 차안에 있던 일행 중 중국인 젊은 친구 하나가 차멀미를 시작했다. 장사에서 하루 종일 차를 달려 와 다시 산길을 꼬불꼬불 오르내렸으니 멀미를 할만도 했다. 운해(雲海)로 들러 쌓인 산정을 향해 올라가던 중 오르내리는 차 사이에 발생한 교통사고를 두 차례나 목격하였다. 안개가 심할 때는 2-3미터 앞이 안 보인단다. 얼마 전 다녀 온 태산(泰山)이 바위와 수목이 한데 어우러져서 장관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안개가 그리 많지 않은 산인데 반하여, 여산은 울창한 수목으로 둘러 쌓인 장중함이 돋보이는 산으로서 특히 사계절 모두 안개가 심한 것이 특징이었다.

여산은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도 이름이 나있지만, 역사적·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었다. 특히 장개석이 1932년 이곳에서 반공(反共)군사회의를 개최한 직후 이곳을 여름수도로 정하였고, 아울러 공산당 타도의 깃발을 걸고 하급 군관 수만을 훈련시켜 배출한 곳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정치적 상징성을 중요시하여 모택동을 비롯한 주은래·유소기·등소평 등이 이곳을 다녀갔고, 특히 모택동은 이곳에서 1959년·1961년·1970년 세 차례 중요한 중앙회의를 개최함에 따라 그가 거처했던 숙소와 함께 그와 관련한 일화가 지금도 많이 전하는 곳이다.

도착한 날 저녁 산 정상에 조성된 시가지인 고령가(　嶺街)를 돌아보기 위해 숙소인 여산빈관을 나서니 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친다. 그 비바람 속에서도 앳된 여자애들이 두 세 명씩 짝을 지어다니며 관광객을 상대로 노래방에 가자고 유혹한다. 어린 소녀들의 교태가 측은하게 느껴지니 객기가 발동할 이유가 없다. 그러한 모습이 여산의 진면목일 수는 더욱 없을 터이라 마음이 안타까웠다. 개혁과 개방이 가져다 준 잘못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잠자리에 누었으나 창 밖의 바람소리, 빗소리로 인해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5월 26일 아침 일어나 보니 날씨가 말끔히 개어 있었다. 웅장한 여산의 자태가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듯 했지만, 그래도 높고 깊은 곳은 여전히 운무에 가려 있었다. 여산에 온 목적이 자연을 감상하러 온 것이 아닌지라, 아쉽지만 여산의 풍광을 일견하는 것으로 만족한 채 백록동서원을 찾기 위해 다시 산을 내려갔다.

백록동서원이 위치한 성자현(星子縣)까지는 약 한 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다. 하산 도중 동행한 여산관리국 당위원회 선전부장이 가는 길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주창자로서 송대 성리학의 선하(先河)를 이룬 주돈이(周敦　: 호-濂溪)의 묘소가 있다는 말을 했다. 귀가 번쩍 뜨여 들렀다 가자고 하니 그 위치를 확실히 모르는 눈치였다. 차를 세워 몇 차례 위치를 물은 끝에야 연화진(蓮花鎭)에 있는 주돈이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사상사적 중요성을 제외하더라도, 나는 평소 주돈이가 세속에 영합하기를 거부하고, 강직하면서도 남을 위하는 인품이 마치 비 갠 후 일출과 함께 부는 바람이나 만리 청공(晴空)에 뜬 달과 같았다는 황정견(黃庭堅)의 평가에 동감하던 터라 내심 반갑기 그지없었다. 나에게는 기대 밖의 수확이었다.

길가에서 한 1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묘소는 최근 정리한 듯 매우 깨끗해 보였지만, 언덕에 비스듬히 조성된 약 2-300평 가량 되어 보이는 묘역에는 풀이 무성하였다. 공림(孔林)에서도 보았지만 중국사람들은 묘역의 풀을 베어내지 않는단다. 자손의 번창함을 빌기 위해서라고 한다. 묘소는 57세로 사망한 주돈이와 함께 그의 모친 그리고 두 부인 등 4명이 함께 합장되어 있었다.

참배 후 묘소를 돌아보니 묘 뒤로는 태극도가 설명과 함께 석각되어 둘러져 있었고, 그 옆에는 그가 평소 순결과 청아함의 상징이라 좋아하던 연꽃을 노래한 애련설(愛蓮說)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 일정은 여산의 북록(北麓)에 있는 염계서원(濂溪書院)의 유지(遺址)를 찾을 계획이었지만 묘소 참배로 대신하기로 했다. 동행한 그곳 선전부장 말로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와서 촬영하는 것이라 했다. 차를 세워 둔 묘소 입구 부근 민가의 대문 위에 자그마한 태극도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삼 우리의 태극기가 연상되어 친근감이 들었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백록동서원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 입구의 큼지막한 돌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표식과 함께 당시 이곳을 조사한 유네스코 조사위원의 이름과 그들의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서원의 부원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백록동서원은 여산 줄기 오로봉(五老峰) 아래 위치하고 있는데 당나라 때 이발(李勃)이 이 곳에 은거하면서 흰 사슴을 기르고 독서하며 지내던 곳이라 하여 백록동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후일 이 곳에는 여산국학(廬山國學)이라는 학교가 설립되었다가 송대에 와서 백록동서원이라 개칭되었지만 곧 쇠락하였다.

후일 주자가 이곳을 관장하는 남강군(南康軍)의 지사로 부임하였을 때 건물들을 다시 수리하고 직접 강학을 함은 물론 천하의 이름난 학자들을 초청하고 좋은 책과 자료들을 수집함에 따라 점차 유명해져 천하 제일의 서원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주자는 자신과 학문적 입장을 달리하던 육구연(陸九淵:호-象山)을 초빙하여 의리지변(義利之辨)을 강의케 함으로서 자신의 도량을 널리 드러낸 일도 있었다.

백록동서원 앞으로는 작은 계곡 물이 흐르고 있었고 동쪽 끝 독대정(獨對亭) 아래로 "침류(枕流)"라 새긴 주자의 글씨가 선명하고 바로 그 위에 옛날 서원 입구로 통하는 침류교(枕流橋)가 곱게 서 있다. 지금은 새로 난 도로 쪽인 서쪽으로부터 서원에 들어오도록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앙의 왼 편 뒤쪽으로 단계정(丹桂亭)과 보공사(報功祠)·주자사(朱子祠)가 있고, 그 오른 편에 천하의 인재를 배양하는 장소로 출입하는 문이라는 영성문(　星門)과 반지(泮池)·예성문(禮聖門)·예성전(禮聖殿)이 있다. 다시 그 오른 편으로 어서각(御書閣)·명륜당(明倫堂)·백록사(白鹿祠)가 역시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옆으로 다시 숭덕사(崇德祠)와 1927년 유소기(劉少奇)가 와서 묵었다고 하는 춘풍루(春風樓)가 서 있다. 이 춘풍루 앞에는 홍콩 공교학원(孔敎學院)의 탕은가(湯恩佳) 원장이 기증했다는 주자동상이 서 있고, 그 주변 회랑에 서원 관련 비문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은 바로 이 백록동서원을 본 뜬 것이다. 물론 워낙 유명한 곳이다 보니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다녀간 듯 부원장은 누가 다녀갔고 또 이곳에서 언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고 등등을 자랑한다. 서원의 위상과 그에 담겨진 정신으로 보자면 크게 자랑할 만도 하겠지만, 서원 안 건물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기념품이 가득할 뿐 어느 곳을 보아도 주자의 정신을 되새길만한 계기를 찾기 어렵다. 정신은 간 곳 없고 "시장경제"만 살아있는 셈이었다. 오는 길에 동행한 그 곳 당위원회 선전부장에게 서원 안의 상점을 모두 서원 밖 주차장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보아 건성으로 듣는 것은 아닌 듯 했지만, 실제로 개선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5월 27일 아침 우리 일행은 마지막 답사지인 복건성(福建省)에 위치한 무이산(武夷山)과 건양(建陽)으로 이동하기 위해 여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일단 소무(邵武)시로 향했다. 오전 11시경 서안(西安)에서 하문(厦門)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 일곱 시간 반을 달린 끝에 오후 6시 30분경 소무시에 도착, 기다리고 있던 건양시 문물국 부국장의 안내를 받아 작은 버스를 타고 무이산으로 다시 달렸다.

옛날 길로는 약 3시간 걸리던 거리가 요즈음은 새 도로가 만들어져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가는 도중 지난 한 두 달 한국에서 그렇게 고대하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착할 때까지 비는 계속 내렸고 빗줄기 또한 제법 굵었다. 무이산장에 여장을 풀고 하루 종일 차에 시달린 곤한 몸을 누이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창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한국에도 내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뒤척이다 곧 잠에 빠져들었다.

5월 28일 아침 여전히 비가 간간이 뿌리고 있었지만 계속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간단한 여장을 꾸려 우선 무이산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복건성 건양시 황갱진(黃坑鎭)에 있는 주자의 묘소를 찾았다. 주돈이의 묘소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흥분이 가슴에 밀려왔다. 묘소 입구에는 한국의 신안주씨중앙종친회에서 세운 사원정(思源亭)과 관련 기념비 등이 있었다.

작은 구릉을 몇 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주자의 묘소가 보였다. 묘비에는 송선현 주자·부인유씨지묘(宋先賢朱子·夫人劉氏之墓)라 새겨져 있어서 부인과 함께 합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묘역이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크고 작은 주먹만한 천석(川石)으로 봉분을 덮은 전형적인 송대 분묘형식이었다. 주변의 축대 또한 천석으로 둘러져 있었다. 이곳 묘소는 주자 자신이 사위 황간(黃幹)과 함께 정한 장소로서 앞쪽으로 구룡산(九龍山)이 멀찌감치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주자는 효심이 깊었다. 자신의 아버지 주송(朱松)이 대대로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복거지(卜居地)로 정해 놓은 건양 땅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결국 이곳에 묻힌 것이다.

주자의 묘소를 둘러보고 우리 일행은 고정서원이 위치한 건양 방향으로 한 시간 반쯤 달리다 주자가 세운 한천정사(寒泉精舍)가 있던 유지(遺址)를 둘러보았다. 길 옆 한적한 곳에 지하수로만 조성된 자그마한 연못 천호(天湖)가 남아 있을 뿐이었고, 그 곁에 주문공모축부인묘(朱文公母祝夫人墓)라 쓰여진 묘비 아래 축부인의 묘가 주자묘와 똑 같은 형태의 천석으로 된 봉분형태로 조성되어 있었다.

주자는 생모 축부인이 죽자 그 이듬해 지금의 이 자리에 장사지내고 그 옆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건립하였다. 한천이라 이름 한 것은 죽은 어머니와 자신이 다시 상봉할 것을 염원하는 효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열 네 살에 아버지를 여윈 후 어머니에 의지하여 생활한 아들의 지극한 효심을 보여주는 그런 곳이었지만, 정사(精舍)의 흔적은 지금 찾을 길이 없었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고정서원에 도착하니 서원 입구에 그 위치를 알려주는 석패방(石牌榜)만이 남아 우릴 반겼다. 석패방의 위치도 본래는 현재의 위치에서 전방 약 100여 미터쯤에 있었던 것으로서 십여 년 전 저수지 조성으로 높이 10여미터 중 반 이상이 물에 잠겨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 것이라 하였다. 문화대혁명 때 거의 모든 문물이 파괴되었지만, 이 석패방은 물 속에 잠겨져 있던 터라 보존할 수 있었다고 동행한 건양시 문물국 부국장이 귀띔하였다.

또 전하길 자신이 어릴 적에는 반 이상 물에 잠긴 석패방 꼭대기에 올라 다이빙을 하며 놀았다고 했다. 현재는 석패방이 위치한 곳의 뒤편 구릉 위에 역시 한국신안주씨중앙종친회에서 세운 문공사(文公祠)가 자리하고 있었다. 문공사 안 네 기둥에는 독서는 벼슬의 근본이요(讀書起家之本), 도리에 따름은 가문을 지키는 근본이요(循理保家之本), 화목하고 순종함은 가문을 추스리는 근본이요(和順齊家之本), 부지런하고 검소함은 가문을 다스리는 근본이다(勤儉治家之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씌여있다. 고정서원은 주자가 만년을 보내면서 저술과 강학으로 많은 제자를 길렀던 곳이었고,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이기도 했다. 이곳 출신을 고정학파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모두 주희사상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5월 29일 아침 우리 일행은 무이산(武夷山) 일대의 주자 관련 유적을 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무이산은 경관지역의 총면적이 약 60평방킬로미터로서 그 유명한 구곡계(九曲溪)와 36봉(峰)·72동(洞)·99암(巖) 등으로 구성된 자연의 빼어남과 유구한 인문자원을 인정받아 1999년 12월 세계자연과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곳이다. 오전에는 무이구곡 입구 대왕봉(大王峰) 아래 위치한 주자기념관과 무이구곡(武夷九曲) 가운데 오곡(五曲)부근에 위치한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답사하였다.

주자기념관은 본래 충우관(　佑觀)·만년궁(萬年宮)·무이궁(武夷宮) 등으로 불리우며 무이산의 신(神)이라 할 수 있는 무이군(武夷君)에게 제사지내던 곳이었다. 주희도 한 때 이곳에서 제사를 주관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주자기념관으로 변하여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지만 특별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지는 않았고, 다만 국내외 주희 관련 연구서와 잡지들이 정리되어있을 뿐이었다.

무이정사는 주자가 1183년 54세에 거대한 바위 은병봉(隱屛峰) 아래 직접 세운 이래 5년간 강학과 저서에 전념하였던 곳이다. 건립 당시에는 인지당(仁智堂)·은구실(隱求室)·지숙료(止宿寮)·관선재(觀善齋)·만대정(晩對亭)·철적정(鐵笛亭) 등이 즐비하여 가관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가는 두 채의 일부 벽면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오후에는 대나무로 만든 뗏목 위 의자에 앉아 무이구곡을 돌아보기로 했다. 무이구곡을 유람하기 위해 우리 일행은 먼저 버스를 타고 성촌진(星村鎭)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으로부터 뗏목을 타고 구곡(九曲)부터 유람을 시작하여 일곡(一曲)까지 약 9.5 킬로미터를 약 두 시간에 걸쳐 내려가야 했다.

복건성에서 우리 일행을 안내하기 위해 직접 무이산에 온 관리가 한 사람 동행한 탓인지 대우가 아주 좋다. 가장 입담 좋은 뱃사공(櫂夫)을 배치하고 비교적 천천히 구곡을 유람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관광객이 매우 많아 6명을 태울 수 있는 뗏목은 끊임없이 줄지어 출발하고 있었고, 일곡에 도착한 뗏목은 다시 차에 실려 출발장소인 성촌진으로 계속 옮겨지고 있었다.

무이구곡은 그 빼어난 절경으로 유명하지만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원래 구곡은 계곡의 물이 구곡(九曲)으로부터 일곡(一曲)으로 흘러 내려오도록 되어있지만, 주자의 무이도가는 일곡에서 구곡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으로 구비치는 곳의 경치를 노래하고 있다. 주자는 무이구곡 구비를 돌 때마다 만정봉(　亭峯)·옥녀봉(玉女峯)·가학선(架壑船)·은병산(隱屛山)·고루암(鼓樓巖) 등의 빼어난 경관을 때로는 자연 그대로, 때로는 인간의 도리와 관련하여 노래하였다.

퇴계의 경우 비록 무이산에 직접 가 보진 못했지만 서울에 있을 때 무이도(武夷圖)를 구해 보고 그 경관의 신묘함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특히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 십수(十首)를 황홀한 듯 읽고, 화작(和作)도 하면서 주자가 무이산 일대를 추로도의(鄒魯道義)의 마을로 바꾸어 준 데 대한 흠모의 정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퇴계가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읊은 서수(序首에, "신령스런 산이라서 놀라는 게 아니라(不是仙山　異靈), 창주정사 맑은 자취 곰곰히 그려보네(滄洲遊跡想餘淸), 어젯 밤 꾼 꿈에 朱선생 본 감격 살려(故能感激前宵夢), 무이구곡 운을 빌어 다시금 노래하네 (一櫂　歌九曲聲)."라 한 것을 보면 주자가 만년에 자연과 벗하며 건양의 창주정사(고정서원)와 무이산의 무이정사에서 강학에 전념하던 모습을 퇴계가 얼마나 사모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뗏목 위에 앉아 뱃사공(櫂夫)이 신나게 전하는 무이구곡 구비마다 얽힌 일화들을 건성으로 들으면서도 맑은 계곡 물과 빼어난 바위 그리고 운해에 둘러 쌓인 웅장한 산봉우리 등 그야말로 선경(仙境)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 사이에 뗏목은 벌써 일곡(一曲)을 지나 종착지에 도착하였다. 두 시간이 꿈같이 흘러버린 것이었다.

주자가 오곡(五曲)을 지나며 "어기여차 뱃노래에 영원을 되새기네(　乃聲中萬古心)"라고 노래했던 마음이 그제서야 가슴에 찐하게 와 닿았다. 무이구곡 뱃노래를 뒤로 한 채 우리 일행은 짧지만 보람있었던 주자관련 유적지 답사를 마치고 상해를 거쳐 귀국 길에 올랐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