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 같은 책(글/이은경)예술은 번역이라 했던가. 자연 만물이 화가의 심미안을 빌어 다시 태어난 그림을 글로 통역하는 그림 DJ 한젬마, 그녀는 화가이지만 아름다운 글을 쓰는 글쟁이 이기도 하다. 그녀가 이번에 낸 책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미술과 문학 두 길 사이에 오솔길을 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7월 25일자 모 일간 신문에서 첼리스트 장한나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지휘자 로린 마젤 등 여러 음악계 선배들이 예술가로서 내면적 성숙을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라고 조언한 것을 받아들여 하버드대에 입학해서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게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덧붙여서 장한나는 최근에 갑자기 타계한 지휘자 지우제페 시노폴리 한테서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슈만 협주곡을 협연할 때 드레스덴에서 슈만이 걷던 길을 걸으면 좋은 곡 해석이 떠오를 거라고 가르치거나 독일 낭만파 그림책을 선물하기도 하면서 작품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던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길이 잘 닦여졌으며 간선도로 또한 곳곳에 나있어서 자유자재로 곳곳을 넘나들며 예술의 밭을 풍부하게 일구어 가는 한 음악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나라 예술계는 분야사이에 벽이 높으며 장르간의 넘나듦에 대해서 무척 인색하다. 한젬마는 첫 번째 책『그림 읽어주는 여자』를 내고 미술계는 물론이고 문학계에서조차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번째 책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를 냈다. 안에서 끓어 넘치는 그림에 대한 사랑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엮어 사람들한테 내보이는 그녀가 사랑스럽고 고맙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낸 용기가 장하고 화가로서 그림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보인 친절이 어여쁘다.
이 책은 1부 「나는 그림에서 사랑을 배웠다」, 2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화가 이야기」, 3부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로 나뉘어 있으며 부록에는 우리가 미술 시간에 놓쳐버린 것들, 그림과 친해지는 9가지 방법, 그림 사이트 즐겨 찾기 따위를 적어 놓았다. 그녀의 심미안은 구상미술이니 추상미술이니 하며 흔히 벌이는 입씨름을 넘어서서 조각이나 설치 미술 등 모든 미술 장르에서 아름다움을 건져 올린다. 균형이 잘 잡힌 그녀의 심미안에 탄복을 할뿐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정작 그림은 뒷전이라 책을 볼 때 먼저 나름대로 그림을 느껴보고 그 다음에 글을 읽을 걸 하는 후회도 없지 않다. 상상력이 더 이상 확장되질 않으니 말이다.
1부에서 그녀는 그림마다 사랑에 대한 단상들을 풀어놓는다. 첫 장에 그녀는 위태롭게 쌓인 벽돌 그림을 들이댄다. 보는 이마다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 그림을 보며 지독하게 서로 사랑하나 힘겹게 살아가는 한 후배의 사랑이 무너지지 않기를 기원한다. 미술 작품 앞에서 주눅이 들어 맘껏 느끼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녀는 작가가 어떤 의도에서 작품을 제작하였건 간에 그 작품을 자유로이 해석해 낼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700년대 초,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작 「그네」처럼 외국의 고전적인 작품에서부터 1999년 이만익 작 「소나기」처럼 향토적인 우리 나라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그녀의 내밀한 언어로 소개하고 있다.
2부엔 화가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설악에 깃든 화가, 김종학이라 소개한 글은 참으로 반가웠다. 내가 김종학의 그림을 처음 만난 것은 95년 초겨울 부산에서였다. 그 해는 나도 마침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에 걸쳐 화구를 들고 들판을 쏘다니며 감성을 벼리던 때였는데, 4호쯤 되는 화폭에 달랑 나팔꽃 두 송이와 벌 한 마리를 그려 넣은 그림 앞에서 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팔꽃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게 내 느낌이었다. 명암이고 뭐고 다 무시한 채 물감을 두텁게 발라 그린 그 그림은 내 마음속에 새겨졌다. 그 후로 그의 개인전에서 본, 흰눈을 배경으로 서 있는 시든 들풀 그림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한 해를 들판에 나가 살면서 뜨인 눈에 시든 들풀이 어찌나 아름답게 보였던지. 그 그림은 아주 맘이 잘 통하는 친구처럼 내게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 때 나는 마음속으로 시든 들풀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면 모두 다 내 친구 라고 되뇌었던 것 같다.
시든 들풀에서 생명력을 건져 올리는 화가 김종학 외에도 "좋은 그림을 그리고자 서두르기보다 먼저 바른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 그런 것들이 안심하고 찾아와 서식할 수 있는 마음을 닦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인생길을 예술로 닦아간 최종태, 나이 마흔에 속으로 치미는 그 무엇을 견딜 수 없어 결혼 10년만에 남편 월급을 통째로 들고 가 50호 짜리 캔버스와 유화 재료를 사 버린, 그 뒤로 20년이 흐른 지금 우리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가 된 윤석남 등 인생에 교훈을 주는 화가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정명화 작 「여름창」이라는 작품에서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글을 퍼 올리는 것처럼 3부에서 그녀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누구에게나 나누지 못할 자기 몫의 슬픔이 있다는 존재의 자각을 드러내는가 하면 누군가가 내미는 손을 지나치지 않고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기도 한다. 또한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늘 새로움을 발견해 내는 삶을 꿈꾸기도 한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그림을 감상하며 오솔길을 걷다보니 아름다운 음악이 들려 오는 듯하다. 마르크 샤갈의 「바이올리니스트」(1912-1913)란 그림을 감상할 때 바이올린 선율을 실제로 듣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는 한젬마이고 보면 이 책을 덮을 때쯤 독자들이 음악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어디 없을까 하고 기웃거릴 지도 모르겠다. 음악과 그림 사이에 난 오솔길이 있다면 다정한 벗들과 함께 걷고 싶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