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면 태자리 금용탁씨 이야기(글/이미홍_객원기자)
태자1리 터줏대감
온혜에서 청량산 가는 방면으로 얼마쯤 가다 보면 왼쪽 산비탈을 따라 나 있는 외길 입구에 태자1리라는 표지석이 있다. 언덕배기 모퉁이 돌자마자 나타나는 외길이라 표지석이 없었더라면 초행길에 자칫 지나칠 뻔 했을 만치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길은 외통수 좁은 길이었다. 중간에 더러 피할 길이 있었지만 그래도 큰 차라도 만날까 하는 걱정을 하며 마을로 찾아들었다. 그 길을 따라 들어간 끝, 사방이 산으로 폭 감싸여 있는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 큰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마을이어서 눈 밝은 이들이나 더러 찾아드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마을이지만 알고 보면 인재가 근동에서 제일 많이 난 동네라고 금 할아버지는 말한다.
제법 너른 공터가 보여서 차를 세우고 나서 보니 널매길. 그곳이 하루 두 번 마을까지 들어오는 67번 버스가 서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공터 바로 뒤에 있는 집이 금용탁(76) 할아버지 집이었다. 집을 찾아드니 금 할아버지는 안동 시내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두 시 버스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라 하시며 오후 한낮이라 집안에서 쉬고 계시던 김노미(75) 할머니가 우리를 맞으신다.
이웃에 사는 모자가 조용한 동네에 낯선 이들이 웬일인가 싶어 마당을 기웃거리다가 나가고, 동네 개가 한 차례 짖다가 조용해지고 할머니가 주시는 물 한 잔을 마시고 있노라니 어느새 버스가 들어오는 소리가 나고 이내 금 할아버지가 어깨에 뭘 지고 들어오신다. 새로 공사를 한 건넛방에 깔 장판을 사러 갔다 오는 길이라고, 한숨 돌리신 할아버지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놓으신다. 까만 비닐봉지에 담긴 그것은 다름 아닌 따끈한 찐빵이었다. 장판 사러 갔다가 할머니가 좋아하셔서 생각나서 샀다며 내놓으시는 찐빵,
“고마우이더. 내 좋아한다고 사 오신 거니 하나 먹어보지요.”
손인 우리에게도 건네고 할아버지의 생색이 싫지 않으신 듯 본인도 하나 들고 드시는 할머니, 그렇게 여름 한낮 찐빵 하나씩 들고 먹는 사이, 두런두런 어느새 이야기가 시작됐다.
오지마을, 삼십리 길 걸어 예안장에
사람은 자고로 뿌리가 중요하다고 했던가, 옛날 어르신답게 일단 본인의 이력부터 읊으시는 할아버지다.
“우리 증조부 대에서 이 마을에 들어와서 내가 증손까지 봤으니 우리가 칠 대에 이르러 이 마을서 살고 있지요. 우리 아버지가 사남매 막내셨지만 고향 산소 지키며 사셨고, 그 뒤를 이어 내가 여서 살고 있지요. 우리 아버지, 할머니 계신 곳인데, 그러니 나는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야말로 이 마을서 나고 자란 금씨 문중 토박이 어른이시다.
김노미 할머니도 재 너머 마을 녹전서 열아홉에 이 마을로 시집을 와서 지금껏 마을을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여 안사람도 열아홉에 내한테 시집와서 진짜 고생 많이 했어요. 사형제 하고 딸 둘하고 육남매 아~들 다 공부시켜 시집장가 보내고 고생 끝나고 손주 보는 재미에 살 나인데 젊어 농사짓느라 고생을 많이 해서 여기저기 아파서 병원 다니고 약 먹고 하는 거 보면 좀 안됐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태자1리로 들어오는 마을길이 없어서 열아홉에 녹전서 저 재 너머 고개를 넘어서 시집을 왔다고 한다.
“와 보니 시조부모님에 시어머니에 시동생들까지 층층시하에 식구는 많은데, 살림은 없고 일거리는 많고 그랬지요. 예안까지 장 보러 가자면 저 건너 보이는 산 너머 토끼길 같은 고갯길을 삼십 리를 걸어서 갔다 와야 했어요. 장에 갔다 오면 하루가 다 갔지요. 일도 일도 참 많이 했지요. 그런데다 첫째 놓고 나서 애 아부지가 군대에 징집이 돼서 끌려가는 바람에 그때는 진짜 눈물바람도 많이 했지요. 그래도 육남매를 낳아 키워 시집장가 보내고 나니 어느새 환갑진갑 다 지나고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센 꼬부랑 할머니가 돼버렸네요.”
한 삼사십년 전에 방송국에서 산골 오지마을 취재 한다고 와서 이 동네에 와서 며칠 머물면서 산중에서 마늘하고 담배 농사짓는 거하고 나무해서 새벽에 불 때서 밥 하는 거 그런 사는 것들 몽땅 찍어서 간적이 있단다.
그러니까 그때 그 무렵 우리가 설핏 봤을 수도 있는 그 장면, 산골 부부가 새벽에 가마솥에 불 때서 밥하고 소 죽 끓이고 하는 장면에 나왔던 분들이 바로 이 두 분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오래 전 방송국에서 취재 왔다간 일을 어제 일 인양 이야기하는 할아버지. 부모님을 어린 나이에 잃고 조부모를 차례로 보내드리고 자식들은 잘 키워서 다 대처로 내보내고, 그렇게 하나 둘 다들 보낸 그 자리, 부부는 마치 붙박이처럼 그렇게 고향 마을을 지키며 살았다. 허리가 휘도록 뒷바라지해
키워 놓은 자식들이 대처에서 그저 무탈하게 살기를 바라며 그렇게 고향을 지키고 앉아 계신다.
열두 살 때 소년가장이 되었지
우리가 금 할아버지가 안동시에 노인들을 위한 급식비에 지원해 달라고 백만 원을 기탁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자,
“실은 온혜에 살고 있는 강규창(안동지 130호 ‘이웃이야기’에 소개)씨랑 내가 잘 아는 사이래. 그 분이 농사지어서 장학금 기탁도 하고 노인회관에 좋은 일을 많이 하더라고. 나는 내 살기 바빴는데 그이는 같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폐품도 모으고 용돈도 안 쓰고 모아서 좋은 일 하는 데 쓰는 걸 보고 나도 언젠가 적으나마 내 힘으로 남 위해 좋은 일 하나라도 하고 살아야지 싶더라고. 그러던 것이 이번에 마침 백만 원이 만들어져서 내가 마음을 먹었지. 큰돈도 아니고 동네 입 내어 말하기도 부끄러워 입 다물고 있었는데 시에서 어디 올린 걸 보고 더러 인사를 하더라고.”
하며 쑥스러워 하시면서도 웃는 모습이 싫지는 않으신 듯한데, 옆에서 할머니는 뭐 그런 걸 자랑을 하냐며 통박 아닌 통박을 주신다.
자식들도 어엿하게 다 자리 잡았고 이제는 옛 말하고 살고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그때 공부를 더 못한 건 살면서 두고두고 한이 되는 듯한 금 할아버지다.
“난 초등학교도 3학년 1학기까지 밖에 못 다녔어요. 6.25사변 나고 바로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먹고 사느라 학교는 엄두도 못 냈지요.”
“부모가 있어야 학교를 하지.”
라는 할머니의 무심한 한 마디가 참 아프면서도 맞는 말이다. 그 말끝에 할아버지 조실부모한 사연을 풀어 놓으신다.
“나를 낳아주신 친 어매는 한 살 때 돌아가시고, 조모 밑에서 자라다가 아버지가 새장가를 들어 새어머니를 친어머니로 알고 컸는데, 열두 살 되던 해 도산면 일대에 전염병이 돌아서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금 할아버지는 말라리안가 뭔가 하는 걸로 알고 계셨지만 사실 그때 전국적으로 맹위를 떨친 건 1951년 발생한 발진티푸스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 통에 먹을 것도 없고 열악한 환경에 전염병까지,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한국전쟁을 담은 기록 필름을 보면 하얀 가루로 사람들 몸을 소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살충제 DDT라고 한다. 인체에 독한 DDT를 뿌릴 만큼 그때 전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쳤던 발진티푸스의 피해가 그만큼 심각했다는 이야기다.
-이 병은 전염성이 너무 강해서 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그리고 병이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집 안 전체가 전염됐고, 온전한 몸으로 병자를 돌봐줄 사람이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고 당시 기록에서도 말하고 있다.
전쟁의 상흔
한국전쟁은 온혜를 비롯해서 도산면 일대에도 많은 상흔을 남겼다. 그 무렵 공비들이 자주 출몰하곤 했다. 공비가 마을을 한 차례 거쳐 가고 그 지나간 마을을 국군이 들이닥쳐 협조한 사람들을 잡아가고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다행히 난리 소식을 듣고 충남 쪽으로 미리 내려갔던 금 할아버지네는 그런 피해는 면했다고 한다.
“6.25사변이 일어나고 충남 대전 쪽에 외삼촌이 살고 있어서 우리 식구는 그리로 갔어요. 당시에 큰아버지가 중국 가서 돌아가신 터라 큰어머니와 사촌들도 우리 집서 살았는데, 열 한 식구가 방 한 칸을 얻어서 지내다가 전쟁이 길어지고 나중에는 돈도 떨어지고 거기도 안전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고향으로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고향으로 왔는데 식구들이 그만 돌림병에 걸리고 만 거지요. 내하고 동생하고는 덜해서 살아났고 그 전에 큰어머니 먼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설 지내고 약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죽은 이를 제대로 장사 지낼 여력도 없어 친척 형이 어디로 구해온 널 위에 시신을 삼베로 둘둘 감아 얹어서 공동묘지에 산소를 쓰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당장 끼니를 이을 일이 걱정이었다. 고향에는 아무 것도 난리 통에 남아있는 게 없었다. 농사지을 변변한 밭뙈기도 없었고 끼니를 이을 좁쌀 한 톨 없었다. 조모하고 어머니와 삼남매, 그리고 큰어머니와 사촌들 넷까지, 우선 끼니 때울 양식 한 되라도 구해야 했다. 온 식구가 사흘 내내 굶고 난 다음 날 아침 피죽도 못 먹은 얼굴로 그는 당시 토계에 있던 도산면사무소로 갔다. 원래도 체구가 작은 와중에 돌림병을 앓고 난 후라 배짝 말라 형편없는 몰골의 아이가 면사무소로 들어서자 다들 쳐다보았을 것은 당연했다.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가서 무작정 먹을 것 좀 달라고, 먹을 것 안 가져가면 우리 열 식구 굶어죽게 생겼다고 버텼지요. 처음에는 난감해 하며 6.25를 겪으면서 다들 먹을 게 없어 와서 조르는 통에 면소에도 창고 안에 남아있는 게 없으니 가라던 부면장 되시는 분이 내가 죽어라고 조르며 안 가니까
보다보다 나중에는 소사를 시켜서 안남미 싸래기쌀 서 되를 주더라고요. 그걸 가지고 와서 한줌씩 넣고 나물 뜯어 넣고 해서 물을 많이 붓고 풀죽을 끓여 먹으면서 살았어요.”
굶어본 사람만이 아는 결초보은
먹고 살기 위해 식구들은 궂은일도 가리지 않고 했고 그도 열두 살 나이에 나뭇짐도 지고 남의 집 일도 해야 했다.
하루는 나뭇짐을 한 짐 해서 뒷산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는데 동네 사람들이 마을에 있는 부잣집에서 일을 해주고 새참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먹을 게 없어 배가 고파도 참고 나무를 한 참이라 빨리 내려가서 새참 한 술 얻어먹고 싶은데 나뭇짐을 버리고 올 수도 없고 허기는 지고 마음은 급한데 할 수 없이 나뭇짐을 지고 다 내려오니 어느새 새참 먹던 일꾼들은 다 밭으로 가고 아무것도 없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 한다. 어린 금 할아버지가 그때 탄식하며 한 말이,
“나는 복도 복도 이렇게 없노? 부모 복도 없는데 새참 한 그릇 얻어먹을 복도 없나?”
였단다. 탄로가도 아니고 먹을 복 없다고 탄식했던 열두 살 머슴아가 눈물겨우면서도 우스웁다.
그 머슴아가 어느덧 일흔 여섯의 나이가 되어 문득 다른 이들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하기 위해 기부를 했다. 노인들 무료급식비 백만 원, 큰 액수도 아니고 그저 밥 한 끼 나누는 거지만 배를 곯아 본 기억을 잊지 않고 있는 금 할아버지에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선택이었던 거다.
“이제는 다들 먹고 살기가 좋아져서 밥 한 끼 맘 놓고 편히 먹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요즘 사람들은 모르지. 우리 세대는 아직도 한 끼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내가 생각하기에 사실 안노인들은 어
디 가서 식당 허드렛일이라도 하고 애들이라도 봐주고 할 수 있지, 우리 남자들은 나이 들고 늙으면 어디 가서 일할 데도 없고 집에서 매끼 얻어먹는 것도 눈치 보이고, 그렇다고 한 끼 사 먹는 것도 눈치 보이고 부담이라. 젊은 사람들이야 무얼 해도 먹고 살지만, 노인들은 가서 편하게 점심 한 끼 할 수 있는 데가 있다는 게 좋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노인들 점심 급식비를 내가 조금이라도 지원하고 싶더라고. 이제 텃밭 농사나 짓지 농사를 접다시피 했으니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내 용돈을 모아서라도 앞으로도 또 형편이 되는 대로 조금이나마 남도 돕고 그러고 싶지. 안사람한테는 사실 말도 안하고 내 복안대로 한 일이라 안에서는 조금 섭섭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진작부터 하고 싶던 걸 한 거라 나는 마음이 좋아요.”
얼마 전 할머니나 이웃들도 모르게 노인 급식 지원으로 100만원을 기부한 금 할아버지의 변이다.
“남 돕는 일을 뭐라 할 수 있나요? 말하기 전까지 나는 까맣게 몰랐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남들처럼 큰 부자도 아니고 그저 우리 밥 먹고 살 정도인데 남들한테 흉이나 안 될까 그런 걱정이지요. 나한테는 만날 돈 없다 그러면서 언제 그런 돈을 모았는지, 나한테 준다는 돈은 통장만 보여주고 내 손으로 만져본 적은 없는데 제대로 그 돈이나 잘 있는지 모르겠네요?”
할아버지 기부에 대한 할머니의 소감 속에 촌철살인 노부부의 일상이 살짝 엿보인다. 어찌되었든 할아버지는 하고 싶던 일을 한 터라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뭇한 모습이다.
활동적인 남편과 조용한 아내
이참에 앞에서 할머니가 슬쩍 언급한 할머니 이름으로 되어 있다는 통장에 얽힌 이야기를 짚고 넘어
가자면, 7여 년 전, 대구지하철 2호선 공사가 한창일 때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지하철 공사를 맡은 사장과 신뢰가 깊어서 그 인연으로 지하철 공사장에서 현장을 지키고 관리하는 경비 일을 맡아 몇 달 동안 일을 해서 목돈을 이천만 원을 벌었다고 한다. 그 돈을 할머니 이름으로 통장에 넣어서 할머니한테 그동안 고생했다고 선물로 주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머니는 이천만 원이 찍힌 그 통장을 보기만 했을 뿐 관리는 여전히 할아버지가 한다는 사실이다. 돈 얼마 필요하다 하면 할아버지가 찾아주시고, 명절이나 무슨 날이면 아들이 얼마, 딸이 얼마를 부쳤더라고 확인해 주는 것도 할아버지다.
“그까짓 거 이름만 통장에 있으면 뭐하누, 내 손에 쥐어야 내 돈이지.”
라는 할머니와,
“그 돈이 어디 가나, 내가 돈 심부름 다 해주고 그 돈 통장에 고스란히 다 있으니 다 자네 거지. 그 돈은 내 안 건드린다고 카니까 그러네.”
하는 할아버지의 실랑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듯한데, 어쨌든 통장은 여전히 할아버지의 손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만 보니 오늘의 이 사단은 할머니에게도 원인이 있지 싶다. 다른 게 아니고 할머니가 마을 밖 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 까닭이다. 할머니가 관절이 좋지 못해 조금만 걸어도 힘이 든다는 이유도 있지만, 평생을 자식들 키우며 농사일 하느라 바빠 할아버지에게 온갖 심부름을 부탁하던 것이 오늘 날에 이른 것 같으니 말이다.
농사만 지어서는 식구들 먹여 살리기 힘들다 생각한 할아버지는 젊었을 적부터 부지런히 일거리를 찾아 헤매었고 한때 산판을 사서 송진 사업도 하고 담배 농사 마늘 농사 지어놓고는 전국 여기저기 안 가본 데 없이 건설 현장을 찾아다니며 노가다 일도 했다.
그뿐이랴 온갖 마을 일이며 학교 일이며 앞장서서 일을 도맡아 해온 할아버지는 천성이 부지런하고 활동적인데다, 할머니 말마따나 나다니는 걸 좋아하시는 지라 요즘도 집에 붙어있을 새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출타를 하는데, 산악회 사람들하고 한 달에 한 차례씩 등산도 해야 하고 금씨 문중 종회며 각종 모임에다 면의 일이며 은행 일이며 다 할아버지 차지다.
못 배운 설움 한이 돼 자식농사에 공 들였지
가만 들어보니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두드러지는 두 가지는 밥 벌어먹는 일과 배움에 대한 열망이다.
“내가 열한 살에 고향에 돌아와서 먹을 게 없으니까 할머니하고 고모네 집에 얻어먹으러 갔어. 가서 밥 얻어먹는 대신에 일 년을 공짜로 머슴을 살았어. 우리 고모부가 성질이 대단한 분이셨는데 일을 참 지독스레 시켰어. 우리 고모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엄처시하라 편도 안 들어주고 어린 나이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어. 그러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러 돌아왔지. 그리고는 할머니하고 어머니는 집에서 길쌈을 하고 나 혼자 다시 머슴을 살러 갔어. 가는데 이번에는 내가 삯을 받기로 하고 갔어. 일 년에 나락 한 가마니를 받았는데 이 년을 꼬박 머슴을 살아서 나락 두 가마니를 벌었어.”
그런데 그때부터 셈에 밝았던 할아버지는 첫 해에 나락을 받지 않고 나중에 한꺼번에 받는 대신에 일 년에 이자로 나락 반 가마니를 더 받았다. 그러니 이년 뒤에 나락 두 가마니 반을 번 것이다.
그걸 가지고 집에 와서 팔아서 송아지 한 마리를 샀다. 그리고 그걸 밑천삼아 농사를 지어서 돈을 조금씩 모았다. 그러다가 정권이 바뀌고 화폐 교환이 있었다. 그때 그동안 모아둔 삼만 환인가를 주고 논 너마지기를 샀다. 그때는 이전이고 뭐고 모르고 그냥 돈을 주고 땅을 사고팔고 하던 시절이었는데 나중에 지 정리가 되면서 할아버지가 산 논 중 그전 땅 임자의 토지 일부가 분배 토지로 당국에서 몰수를 당하는 바람에 따로 이전 서류가 되어 있지 않던 할아버지 땅 구백 평을 앉아서 눈뜨고 뺏기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그때 못 배워서, 몰라서 당했던 그 설움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더 자식 농사에 공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자식들 공부라면 열 일 제쳐두고 쫓아다니며 뒷바라지를 했다. 허리가 꼬부라지는 지도 모르고 농사를 짓고 노가다를 뛰더라도 학비를 미루지 않았고 학교 일에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열심이었다.
“애들이 한참 학교를 다닐 때에는 거짓말 안 보태고 우리 내외가 우리 농사 말고도 도산면의 남의 품팔이라는 품팔이는 다 하고 다녔어요. 우리 일 하는 짬짬이 하루도 안 쉬고 일을 했어요.”
담배 농사를 한 삼십 년을 지었는데, 그 시절에는 일일이 불을 때서 담배를 쪄서 말렸는데, 담배 잎을 열 굴을 찌려면 나무 백 짐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 나무를 등짐으로 다해서 담배를 쪄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거기다 고추 농사 마늘 농사까지. 일을 태가 나도록 했다는 할머니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들이 저렇게 우리를 공부시키고 먹여 살리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느새 잊고 산 건 아닌지. 할머니 무릎이며 허리가 안 아프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했지요. 그런 걸 애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 몰라도 애들이 하나같이 일 이등 하며 공부도 잘하고 해서 내가 초등학교도 못 마쳤지만 태자초등학교 육성회장, 도산중학교 육성회부회장을 몇 년 씩이나 했어요. 자식들이 다 사 년제 대학을 졸업했고 두 놈이나 국가공무원이 돼서 나라의 녹을 먹고 사업하는 놈도 있고 연구원도 있고 자동차 디자인 하는 놈도 있고 다들 번듯하게 자리를 잡아서 지금도 도산면에서 나만큼 자식농사 잘 지은 사람 없다고 친구들이 만나면 그래요.”
정말로 공부 잘하고 반듯하게 커 준 자식들 덕분에 힘든 걸 잊고 산 세월이었다.
다들 가난했던 시절이었고 상급학교를 진학하는 일은 없는 사람들에게는 공부를 월등히 잘하지 않는 이상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배움에 대한 할아버지의 관심은 남의 집 애들이라도 그냥 지나쳐 뵈지 않았다.
“우리 둘째가 도산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형편이 어려워서 고등학교에 진학 못하는 애들이 많았어요. 그때 산업체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대구에 갑을 방직이라고 섬유공장에 다니면서 야간에 고등학교를 다니는 제도라 내가 주선을 해서 진학 못하는 학생들 많이 연결시켜 주기도 했어요.”
길만 있으면 젊었을 때 우선 하나라도 더 배우고 봐야 한다는 게 할아버지 생각이었다.
책임감과 강단으로 장남 역할
어렸을 때부터 책임감과 강단 하나는 타고난 할아버지였다. 그런 책임감과 강단은 큰 일 앞에서 더 힘을 발했다. 비록 새어머니가 낳은 두 동생이지만 친형제보다 더한 책임감과 정을 동생들한테 쏟은 할아버지다.
둘째 동생이 장가를 들 때 할아버지가 형이 되어서 마을에 밭 여덟 마지기를 주어 살림을 내주었는데, 그 동생이 그러 팔아 대구로 가서 일을 하다가 사업장에 불이 나 징역을 갈 지경에 처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길로 사장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고 한다. 동생이 일을 하다가 실수로 그런 건데 한 사람 감옥에 보낸다고 사장님 손해난 거가 보상받는 것도 아니고 선처를 해 주면 그 손해난 돈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 갚아주겠노라 약속하고 면죄를 받고는 삼 년 넘게 걸려서 결국 그 돈을 다 갚아주었다는 할아버지다.
“동생이 그렇게 불이 나고 나니 사는 게 어려워졌는데, 빚도 빚이지만 사형제 애들 학비가 걱정이라, 당시 나는 우리 애들 대학을 시키고 있었는데 우리 애들만 학교 시키고 동생네 애들은 나 몰라라 하면 얼마나 큰아버지를 야속해할까 싶어서 논 팔고 밭 팔고 해서 그 애들 학비를 대주었지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그리 마음이 쓰여지는 걸 보면 참 할아버지는 타고나길 장남으로 가장으로
타고났다 싶다. 아무나 쓸 수 있는 마음자리는 아니다.
여동생이 약혼을 할 때는 할아버지가 군대에 복무할 때였는데, 그 직전에 휴가를 갔다 온 터라 연이어 휴가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자 꾀를 내어 할머니가 위독한데 장손을 보고 싶어 한다는 장문의 편지를 직접 써서 집에서 온 편지 봉투에 살짝 바꿔치기해 넣어서 기어코 휴가를 얻어 약혼식에 참석을 했을 만치 동생들에 대한 정이 각별했던 할아버지다.
조모 돌아가시고 친어머니처럼 모자간에 정이 도타웠던 어머니는 같이 사시다가 오년 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달리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으로 살면서 조모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건사하고 자식들을 뒷바라지 하면서 살면서도 할아버지는 자신의 먹을 복 없음을 탓했을지언정, 자신의 책임을 소홀히 하거나 무겁다 불평한 번 한 적 없어 보인다. 그저 묵묵히 그 길을 걸어오셨고 그래서 모든 짐을 내려놓으신 지금은 솔직히 큰 소리 좀 치시며 사시는 모양새시다. 그래도 그 모습이 내 보기에 과해 보이거나 지나쳐 보이지 않고 한편으로 웃음이 나는 것은 할아버지가 체구는 작지만 그 책임감과 배포가 누구 못지않게 크고 당당하실 뿐만 아니라 제 몫 단단히 하며 살아오신 박수 받아 마땅한 어른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동네반장 45년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할아버지의 이력 중에 빛나는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동네 반장을 45년을 했다는 것이다. 스물두 살 때부터 동네 반장을 맡아서 군대 간 삼 년을 빼고는 줄곧 이 마을 반장을 했으니, 마을 사람들의 할아버지에 대한 무한 신뢰를 알 수 있는 일이고, 달리 말하자면 태자 1리에 일어난 일치고 할아버지 손을 거치지 않거나 할아버지가 모르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동네 사람들 한 집 한 집 사정을 할아버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더러 급할 때 학자금을 융통해 준 집도 있고 사정이 딱한 걸 뻔히 알아 무슨무슨 성금이니 회비니 하는 걸 거둘 때면 알아서 면해 준 집도 있었다. 그래서 다들 고향 떠난 지 오래고 윗대 어른들이 돌아가신 집도 많지만 간혹 그 아랫대 되는 이들이 고향 쪽에 오거나 부모님 산소에 들를 때면 할아버지를 찾아 인사를 하고 가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고 한다.
학생들이 많던 삼사십 년 전에는 잘 다니던 마을버스가 학생들이 다 떠나고 주민들도 도시로 많이 나가고 가구 수가 많이 줄어들면서 끊겼던 것을 몇 년 전 다시 운행을 재개하게 되었을 때 집 앞 텃밭을 무료로 제공해서 버스 정차장으로 쓰게 한 것도 금 할아버지다.
“요 앞집에 새로 이사 온 정재영씨가 같은 산악회 회원이었는데, 어느 날 어른신이 좋아서 어르신 동네 들어가 살고 싶다고 하더니 정말 집을 짓고 들어왔어. 그이랑 같이 세 곳 버스회사를 찾아가고 시장실로 찾아가 버스를 운행하게 해 달라고 담판을 지었어요. 버스 기사들이 길이 좁아서 위험하다고 해서 또 민원을 넣어서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다리도 넓히고 우리 텃밭도 제공하고 그렇게 해서 버스가 다시 다니게 되니 너무 좋아서 잠이 안 와요. 그리고는 또 걱정이 손님이 너무 없어서 버스가 안 다닐까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을 해서 처음에는 번갈아 가며 일없이 버스를 타고 안동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내가 참 악착같이 열심히 살았지만, 우리 마을을 위해서 하는 일에는 아까운 줄 모르고 뭐든 힘껏 했어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무렵에는 마을에 자체적으로 청년들을 모아 마을부흥회를 조직해서 마을길도 넓히고 구판장도 운영하고 마을에 버스를 들어오게 하는 일에도 서명을 받아서 시에 가서 조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하고 동네 잔치도, 하고 마음 맞춰 놀러도 다니고, 나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마을을 위해서라면 참 다들 너나없이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45년을 맡아 하던 반장 일을 몇 년 전에 마을로 들어 온 젊은 사람한테 넘겨주었다.
이제는 뒤에서 지켜봐 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일이라고 한다.
남한테 좋은 일 하는 게 자식들한테 돌아올 복
“안사람이나 남들은 뭐라 할지 몰라도 내 맘은 그래요. 앞으로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고 싶고 밥 한 끼라도 사 먹여 보내고 싶고 우리 나이 노인들이 할 수 있는 봉사도 찾아서 하고 싶고 그래요.”
그런 할아버지 옆에서 할머니가 한마디 거드신다.
“봉사도 좋고 다 좋은데 내 혼자 힘든데 텃밭 농사도 농산데 좀 돌보면서 하소.”
할머니의 타박에 이게 다 자식들 얼굴 서게 하고 후손들 복 받게 하는 일이라는 게 할아버지 변이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는데 이제는 맛난 것도 먹고 좋은 데도 다니고 하며 살라는 할아버지와 나는 남들 맛있다는 모양내고 비싼 음식보다 시장 골목에서 사 먹는 보리밥에 된장 한 그릇 주는 그 밥이 제일 맛나다는 할머니는 오늘도 그렇게 티격태격 하며 태자리 산골마을에서 된장국에 푸성귀 나물 밥상 앞에 놓고 이 여름을 나고 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