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마르고 닳도록(글/임지희_안동대 국문과 겸임교수)
지난 5월 16일에서 17일까지 안동문화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마르고 닳도록>은 매력적인 연극이었다. 극단 ‘차이무’와 희곡작가 이강백, 그리고 연출가 이상우·민복기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 이 연극은 탄탄한 극본, 배우들의 연기력 그리고 연출력이라는 삼박자가 잘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잘 만들어진 연극(well made play)’이라는 수식어를 부여해도 좋을 만큼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이다.
웃음을 통한 비판적 현실인식
<마르고 닳도록> 리플릿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애국가 저작권료를 향한 스페인 마피아들의 코믹 사기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을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애국가 저작권료를 향한 스페인 마피아들의 코믹 사기극에 녹아있는 뒤틀린 현대사에 대한 풍자희극이라고 할 수 있다.
희극에서 담보해야할 정신을 ‘축제정신’과 ‘비판정신’을 꼽는다. 축제정신은 민중들이 축제를 통하여 현실의 삶에서 배태된 가슴에 묵혀두었던 응어리를 풀어나가는데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비판정신은 권력과 우민에 대한 분노를 가지게 하여 관객들이 진정하게 자기 성찰을 하며, 이를 통하여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희극은 이러한 축제정신과 비판정신을 담아내면서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풍자하면서 관객들에게 웃음을 제공한다. 그래서 희극의 웃음은 사회의 비판적 웃음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교정을 꾀하는 희극적 태도가 유효하게 된다. 연극 <마르고 닳도록>은 희극이 가지는 사회 비판적 웃음을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마르고 닳도록>은 한국의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 선생이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사망한 역사적 사실을 착안하여 구상된 작품이다. 1965년 안익태 선생이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사망하자 마요르카 마피아들은 안익태의 아내 롤리타의 친척을 가장하여, 한국정부에 애국가 저작권료를 챙길 사기극을 벌이러 한국을 찾아온다는 기발한 발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마요르카 마피아들은 1965년부터 2000년까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한국을 찾아와서 대통령에게 저작료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 연극의 중심점은 한국의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이야기되는 한국의 현대사에 있다.
이 연극은 박정희 정권과 새마을 운동. 전두환 정권의 12.12군사 쿠데타와 80년 5월의 광주. 노태우 정권과 88올림픽. 김영삼 정권과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김대중 정권과 외환위기에 대한 30년간의 정치사를 상징적이면서도 익살스럽게 풀어나가고 있다.
한국에 온 스페인 마피아들은 다섯 명의 대통령을 만나지만 거절당하고 배신당하면서, 저작권료는 받지도 못하고 스페인으로 다시 돌아갈 뿐이다. 다섯 명의 대통령 역할은 정석용이라는 배우가 역할바꾸기로 배역을 소화해냈다. 마치 그림을 그릴 때 크로키와 캐리커처를 그리는 것처럼 역대 대통령들의 특징을 잡아 하는 연기는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을 때 “내가 너희들에게 저작료 줄 돈이 어디 있어? 내 통장에는 20만원 밖에 없어!”라는 대사와 능청스런 연기에 관객석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한국에 온 스페인 마피아들이 최루탄을 맞아 눈물을 흘리며 생고생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다음 한국원정대를 파견할 때 “한국은 이상한 나라입니다.”라며 한국에 파견가기 싫어하는 내색을 할 때, 이 대사가 가지는 뉘앙스 때문에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한국에 온 스페인 마피아들이 성수대교 붕괴에 죽는 장면과 마피아 보스의 아내가 백화점 쇼핑을 하겠다며 삼풍백화점에 가서 시체로 돌아오는 장면은 익살스럽게 연출되었지만 웃음 뒤에 밀려오는 진한 무엇인가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한국에만 가면 다치거나 죽어서 우리 식구들이 이제 몇 남지 않았다.”라는 스페인 마피아의 대사는 익살스럽게 연출되는 장면을 통해 웃음을 유발했지만 또한 동시에 참혹함을 느끼게 했다. 그것은 이 공연이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한 달가량 후에 공연되었기 때문이다. 삼풍백화점 참사가 있은 후에 정부는 재난 관리법을 신설하고 재난관리 체계를 법제화한다고 공표하였다. 그러나 십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세월호 참사로 국민들은 분노와 비애로 마음이 마르고 닳는다. 세월호 참사 속에서 한 명의 생존자도 구하기 못한 책임은 시간의 흐름 속에 묻혀갈 뿐이다. 정부가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세상이 아니라 국민들이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는 이 아이러니 한 세상은, 연극에서 바뀌는 대통령이 앉는 왕좌가 바뀌지 않는 것처럼 도대체 바뀌지 않는다.
이처럼 <마르고 닳도록>은 웃음 뒤에 관객들의 마음을 굉장히 불편하게 만드는 연극이다. 스페인
마피아들이 저작권료를 받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마르고 닳도록 끊임없이 도전하는 과정은 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러나 부끄러운 역사의 이면을 풍자하고 일개 마피아의 사기에 농락당하는 무지한 정부의 이면도 보고 있어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그러한 과거의 역사가 현주소처럼 느껴져 가슴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희극의 비판적 웃음은 결국엔 관객 자신에게 되돌아와서 궁극적으로 교정되는 대상은 관객이 되는 것이다. 즉 연극을 통하여 관객이 가지고 있는 개인적 안일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교정하여 대 사회적 질문을 하게 만든다. <마르고 닳도록>은 반복되는 부끄러운 역사의 이면을 보여줌으로써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찬 정치 사회적 현실을 관객들에게 냉철하게 인식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마무리 하며
<마르고 닳도록>의 공연시간은 2시간이었다. 2시간이나 되는 공연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이 연극은 재미있었다. 결국 무대에서 극을 진행하는 재현자는 배우이다. 극단 차이무 배우들의 연기력과 배우들 사이의 호흡이 이 연극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이 연극은 굴곡진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비판적 현실인식을 촉구하고 있지만 전망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건강한 민중의 힘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연극은 정치의 파행성이라는 집단적 공유감은 획득하고 있지만 집단적 공유를 통하여 획득되어지는 민중의 저항정신은 극에 담아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사기극이기는 하지만 스페인 마피아들은 애국가 저작료를 받아내기 위해 마르고 닳도록 고군분투하는 반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권력의 희생양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마치 작가는 반복되는 비틀린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를 조롱하며 세상에 대해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민중들의 집단적 힘이 현실을 변화하여 자연스럽게 민중적 축제의 가능성까지 보여주는 연극에 대한 기대를 버릴 수는 없다. 또한 연극은 어떠한 대상을 두고 행해지더라도 사람의 인식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는 것을 아직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