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호에서 50호까지(글/편집실)‘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 격월간 《안동》지가 해를 넘겨 만 스물여섯이 됐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에도 꼬박꼬박 회비를 내주고, 아낌없는 글 부조에, 발간이 늦어질 때면 궁금증에 전화 주는 독자가 있어 《안동》지는 이렇게 묵묵히 존재해 왔는지 모른다. 어느 인터넷서점의 ‘내 인생의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에 소설가 김중혁은 ‘세상의 모든 잡지’라고 한 적이 있다. 과월호는 기껏해야 라면냄비 받침대로나 쓰일 ‘잡지’라는 존재는 우리네 삶을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담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일 것이다. 그래서 감히, 《안동》지가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이라는 꾸밈 문구가 어색하지 않음에는, 오랜 세월 소박한 우리 안동사람의 이야기를 보탬도 뺌도 없이 해왔기에 가능했노라 말하고 싶다. 인터넷 시대에 넘쳐나는 글 속에서도 여전히 안동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독자들에게 《안동》지의 창간호부터 지금까지의 내용과 변화를 대강이나마 훑어보고자 한다. 《안동》지에 담긴 내용이 곧 안동의 이야기이자 역사이기도 하니까.
전기 없는 마을과 해직교사
1994년 3,4월호인 통권31호의 <산촌기행>에는 전기 없이 사는 용계마을 이야기가 실렸다. 언제나 그러하듯 김복영 발행인과 이동백 시인의 동행길이 그날따라 험난했던 모양이다. 임하댐으로 물난리를 피해 92년 여름 건밭골로 옮겨앉은 용계리 사람들은 마을 남서쪽으로 난 골짜기 산발치에 병아리떼처럼 7가구가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애물단지로 전락한 냉장고며 가전제품은 턱하니 자리차지만 하고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해 낮동안 경운기로 소형발전기에 충전을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한창 번성했을 때는 50호가 넘게 산 마을이었다. 한밤중에 토째비 나올까 무서운 마을에 그럼에도 형형한 눈빛을 하고 “고향을 잃지 않기 위해 여기 산다”던 촌옹의 목소리가 담긴 글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다시 교단에 서며>에는 밤참을 설쳤던 어느 교사의 출근 첫날의 이야기를 다룬 특별한 글이 있다.
김창환 씨는 전교조 활동으로 1989년 여름 해직됐다가 그리던 교단으로 돌아왔다. 1994년 3월 2일 의성 비안고에 첫 출근하여 일주일을 보낸 김창환 씨의 감회를 담은 글이다. 그는 작년 2월 대장암 투병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아직 세상을 등지기엔 젊은 나이였다.
“5년 전, 결단코 잊혀지지 않고 잊을 수도 없는 1989년 초여름 어느 날, 나는 동료 선생님들과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고별인사를 해야 했다. 교문 밖에는 경찰차가 나를 데려가기 위해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뙤약볕에 앉은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전날 밤에 쓴 글을 아이들 앞에서 읽어 내려갔다. 반드시 너희들 곁으로 돌아오마 약속을 했다.”
그렇게 4년 8개월 만에 다시 교단에 선 그는 해마다 학급이 줄어드는 농촌학교에서 우루과이라운드의 파도에 밀려 황폐화 되어가던 농촌에서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고 자주적인 삶, 더불어 사는 삶, 실천하는 삶을 터득하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밝혔었다.
“3월 1일 어둑어둑해질 무렵 책 보따리와 새로 산 침구를 싸들고 집을 나섰다. 둘째는 담임선생님이 아버지 직업을 조사할 때가 아주 곤란했었는데 이젠 걱정할 게 없단다... 운동장에서 시업식이 있었다. 운동장에 줄지어 선 아이들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평생을 교육운동, 민주화 운동에 몸담은 그를 기리는 유고집 〈숲사람〉이 지난 2월 발간되기도 했다.
통권32호에는 안동문화방송 정윤호 기자의 특집 기사가 눈에 띈다. <특집-시군통합에 따른 희망과 과제>인데 시군통합에 의한 주민의견 수렴과정과 통합에 따른 장점과 문제점, 다음해에 있을 자치단체장 선거에 따른 지방자치제의 정착, 그리고 통합 이후의 과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틀을 짜놓고 주민여론을 그 틀 속에 밀어 넣고 있다는 비난과 군지역이 시지역으로 흡수 통합된다는 소문으로 군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따랐다는 내용, 한뿌리 의식과 발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행정 서비스의 편의성 문제라는 반대의 논리를 압도하기는 해지만 내부적으로는 명쾌하게 설명되고 보완되지 못하는 난점도 많았다. 어쨌든 상당한 논란 끝에 1994년 4월 25일 완료된 경북북부지방에 4개 통합 대상은 시군통합 찬성으로 결론지어졌다는 내용이다. 안동시 주민 87.5%, 군지역 주민 86.9%가 통합을 원했다고 한다.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서, 임병호 시인
32호 <안동인이 함께 읽는 시>에는 2003년 5월 세상을 떠난 임병호 시인의 시 ‘명정酩酊’이 실렸었다.
한 닷새쯤 오욕의 땅 밟지 않고
기차에 올라 휘 한 바퀴 돌아올 수 있는 땅을
한 번 찾아가 보았으면 좋겠다
엉긴 피 같은 노역의 홑옷 벗어던지고
생채기뿐인 양단의 사슬 풀어버리고
외딴 집 찌든 처마며 삽짝이며 토담쯤 잠시 잊고
서 말쯤 막걸리라도 들여놓고
낯선 사람들 틈에 끼어 앉아
구름 걸린 높다란 하늘쯤 얘기하며
술잔이나 건네다가
三日 長醉의 酩酊에나 들었으면 좋겠다
들꽃이 두 눈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소나기 퍼붓듯 차창을 때리고
흰 눈이 살같이 흐르는
그런 時速쯤으로
광활한 대륙을 돌아들면 좋겠다
모두들 제 삶의 모습으로
쓰러지고 엎어져 꿈속에나 빠져 헤맬 때
툭툭 몸 털고 몇 번 눈이나 부비며
한 닷새 큰 수림처럼 머물렀던
기차를 배웅할 수 있는 땅이
내 사는 곳이었으면 참 좋겠다.
-'酩酊'전문
그리고 이어진 1994년 통권33호 <안동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 열세 번째 인물로 바로 임병호 시인이 조명됐다. 그는 소문난 술꾼이었다. 술을 왜 마시냐는 근원적인 질문 따위는 필요 없다. 그의 시를 읽으면 되니까.
왜 그리 술을 마시는가// 산이라든지/ 강이라든지/ 꽃이라든지 그 씨앗이라든지// 구름이든/ 저 억수 같은 비이든// 아침이든 / 저녁이든/그믐 그 깜깜한 밤이든//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서.
-'문답'전문
당시 임병호 시인의 인터뷰를 맡았던 안상학 시인에게 그는 집 앞 난전에서 장사를 했으면 좋겠노라고 고백을 했다.
“그곳서 장사를 했으면 좋겠어. 솜사탕장수나 목마쟁이 말이야.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을 못봤거든. 손님들도 하나같이 환하고 말이야.”
이런 그를 그리며 작년 6월, 글밭동인회에서는 임병호 시인 귀천 10주기 추모행사를 갖고 문집 <눈물이 나서 자꾸 눈물이 나서>를 발간했다. 먼지 먹은 낡은 잡지 속에서 사람을, 동네를, 옛일을 추억하기란 어렵지 않다.
사라져가는 것들
32호의 표지를 장식한 <이웃이야기>의 주인공 권임 씨는 지금은 없어진 직업, 영화간판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는 영화 ‘상록수’의 배우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영화간판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당시 30년이 넘도록 그 일을 해왔다고 한다. 안동극장, 아카데미극장, 가고파 극장, 점촌의 삼일극장까지 네곳의 영화간판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당시 그는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간판을 그리던 중 사랑방 취재진과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대구가 고향인 그가 안동에 정착한 것이 1972년, 당시 5급 공무원 봉급이 만6천원이었는데 그의 한 달 수입은 4만 5천원이었다고 하니 “영화 간판쟁이”의 호시절이었다. 한창 때는 무보수로 간판 그리기를 배우고자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고 3-4명의 조수를 두고 바쁘게도 살아왔단다. 점점 사양길에 접어드는 영화간판업을 진즉에 접었을 그의 근황이 궁금하다.
1995년 통권38호에는 도장으로 가업을 잇는 이문당의 젊은 부부 이야기가 실렸다. 요즘이야 컴퓨
터로 뚝딱 만들어지지만 당시에는 장인의 손길이 필요했다. 당시에는 고무인 만드는 데만 2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더러 통지표 도장을 찍으러 아버지 도장을 파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니 그들 덕에 5,7,10,12월 시험 낀 달의 수입이 꽤 괜찮았다고 한다. 같은 장소에서 40년 가업을 잇다보니 단골이 있다는 장점이 있고 제값에 못 받는 단점이 있었던 도장업은 예전만 못하지만 안동 이문당은 여전히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장취재-폐교되는 학교, 내일 없는 농촌>에서는 당시 폐교를 하게 된 서후면 이송천리의 송강국민학교와 와룡면 도곡리의 대동분교를 찾았다. 당시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폐교됐던 국민학교가 10개나 되었으니 농촌붕괴현상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26회 졸업생을 배출한 송강국민학교는 재학생 21명을 스쿨버스에 태워 안동국민학교로 통학을 맡기며 폐교됐다. 와룡면 도곡리의 산꼭대기 절강은 안동에서 댐의 절경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엎드린 안개에 쌓인 아침풍경이 썩 볼만한 곳이라고. 대동분교는 1947년 8월 1일 대동국민학교로 설립되었다. 그러다 74년 안동댐 건설로 학생들은 송천, 천전, 사월국민학교로 뿔뿔이 흩어지고 그 와중에도 꿋꿋이 버텨왔지만 85년 와룡국민학교 대동분교로 불리다 1995년 폐교됐다. 현재는 2006년에 학교 부지를 매입한 개인이 오랜 리모델링과 준비 기간을 거쳐 온라인 헌책방, 북카페가 있는 책마을 문화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안동사람이면 모를리 없는 나이야가라식당
안동지가 오랜 세월 이어오면서 자신 있어 하는 몇 꼭지가 있다. 한 호도 빠짐없이 안동 예사사람의 인생을 담아온 <이웃이야기>가 그것이고 우리네 사는 동네, 마을, 골목 이야기를 담아낸 <산촌기행>이 그것이고 <기획취재-안동의 국도를 따라서> 또한 그것이다. 1994년 첫 번째 구간으로 ‘안동시청 분수대에서 임동 가랫재까지’를 시작으로 기획된 <안동의 국도를 따라서>는 안상학 시인의 취재와 밀도 있는 내용으로 당시의 안동거리를 촘촘히 엮어냈다. 길에서 만난 사람과 안동의 거리, 건물, 길의 사연을 풀어낸 이 기획물은 ‘살아있는 용상의 옛 이름 마뜰’, ‘등짐 장수의 노래를 따라가는 길’ ‘태화삼거리에서 합전교까지’ ‘별재를 찾아서’ ‘강남가는 길1’ ‘미천강이 함께 하는 길’ 등 갈라진 안동 국도의 흔적을 오롯이 담아냈다.
특히 1995년 통권 39호에 실린 ‘또 하나의 서울길1’에서는 옥파네거리에서 영주방향의 안기동을
담아내면서 안동의 유명한 식당,나이야가라식당의 역사를 기록했다. 나이야가라식당은 창업주 김수명씨가 1954년 10월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후 원동삼거리(태화삼거리)에서 참외장사, 주막을 하다 6.25전에 안기동 자리에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식당을 운영한 것이라고 한다. 운안교를 말목박아 만들었던 당시, 식당 이름도 없이 운영했지만 변전소골에 있는 삼안양조장 술은 다 갖다 썼다고 한다. 술과 밥, 안주를 팔던 주막에서 전쟁이 끝나고 새로 집을 짓고는 중화요리사도 두었다. 단골로 드나들던 36사단 군인들이 와서는 ‘나이야가라 식당’이라고 이름 지어줬다는데 냉면 맛이 일품이라 그네들이 배달도 많이 시켜먹었다고 한다.
39호에는 이밖에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시장으로 당선된 민선시장 정동호의 선거공약과 취임사가 실렸고 막 옥동택지개발이 한창이라 어가골과 월남골 사이의 산이 깎여나가는 당시의 어가골을 취재한 <산촌기행> 등이 실렸다.
안동의 터줏대감, 간판 없는 연탄집
1996년 통권47호에는 1968년부터 해왔으니 당시 28년을 연탄배달을 해온 권오종 부부 이야기가 <안동의 터주대감>에 실렸다. 동사무소에 근무하던 그가 박봉에 젊은시절부터 앓아온 늑막염 때문에 귀까지 잘 들리지않게 되자 13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종이봉투 붙이기, 양계 등의 일을 해오다
연탄배달 하던 이웃이 이사가면서 시작하게 된 일이었다. 동사무소 공무원이 연탄배달로 이직이라니, 요즘 세월이라면 어림없는 일이다. 겨울 채비하는 9,10월에는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 봄까지는 그런대로 괜찮다가 여름 한철에는 밭이나 노동판에 나가 품을 판다고 했다. 평화동 일대 배달은 도맡아 하던 부부는 리어카를 끌고 밀며 배달하고 좁다란 골목길에는 예전에는 안아서 날랐지만 1년 전 연탄 10장하고 바꾼 유모차를 끌고 나른다고 한다. 연탄 한 장에 3.6kg가 나간다고 한다. 7남매를 둔 부부는 한 장 배달하면 60-70원 남는 일을 힘닿는 데까지 해볼 요량이하고 했다.
지령 50호, 소녀가장에서 간호사가 된 김순희씨
1997년 5,6월 통권50호. 당시 안동 최고령자 권덕여 할머니(105세, 풍산읍 죽전동)가 첫 장을 장식했다. 창간호 당시 안동의 최고령자였던 김봉이 할아버지(당시 104세)를 담아냈던 안동지는 50호를 맞아 안동의 최고령자를 모시며, 창간 당시의 다짐을 더욱 다지고 확인하는 의미로 삼고 싶어서라고 했다. 100년이 더 지나도 안동지가 친근한 이웃으로 서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다짐은 앞으로 지켜질 가능성이 낮지만 세월이 흘러도 친근하게 다가서고 싶다는 그 의미는 88년 17살의 소녀가장 김순희씨를 50호를 맞아 다시 찾아 만나보면서 확인됐다. 24살 어엿한 간호사로 자란 순희씨의 밝은 모습이 50호 표지를 장식했다. 글짓기면 글짓기, 그림이면 그림, 웅변이면 웅변, 달리기 빼곤 뭐든지 잘했던 그녀. 열 세 살의 어린나이로 어린 세 동생과 한 집안 살림을 떠맡았던 고교1학년 소녀가장 김순희. 열일곱 꿈 많은 소녀로 자라 김용택의 시 ‘섬진강’을 좋아하던,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안쓰러웠던 그녀. 17살 소녀가 24살 간호사로 성장한 모습, 안동의 예사사람의 역사를 담아낸 안동지의 무던한 발걸음이 대견하다. 그리고 지금, 43살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그니의 근황이 궁금하다.
독자와 필자와 편집진이 세월과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옛날을 추억하고 오늘을 살아간다. 만26년 세월을 덤덤하게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아온 안동지의 민낯이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