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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의 먹고사는 문제(글/정진영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전답의 확보와 경영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지만, 조선시대에도 토지는 기본적 생산수단이 되고,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계층은 부유한 양반신분이었고, 토지가 없는 사람들은 양반의 지배를 받는 노비나 작인作人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재정도 이 토지에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전기에는 토지보다 노비가 더 중요하였다. 노비를 많이 보유하면 토지를 획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무지가 곳곳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러나 양반들에게 토지와 노비는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16세기에 신분적 지위를 확고히 한 양반들은 무엇보다도 많은 노비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한편으로는 무거운 세금을 견디지 못해 몰락하는 농민을 포섭하여 노비로 삼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노비를 적극적으로 양인良人과 혼인하게 하였다. 천민인 노비가 양인의 처나 남편을 맞이하는 것을 양천교혼良賤交婚이라 하였다. 양인과 혼인하지 못한 노비들은 주인인 상전에게 아주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했다. 농민을 노비로 포섭하는 것이나 양천교혼 모두 법으로 금지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노비를 급격히 늘려갔다.

양반은 이렇게 확보된 노비 노동력으로 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6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읍치邑治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아직 본격적으로 개간되지 않았다. 양반들은 이런 곳을 개척하여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묵혀두고 있는 땅[진전陳田]을 자신들의 소유물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확보된 대규모의 토지를 당시 사람들은 농장農庄이라고 불렀다.

농장의 구조는 고래 등 같은 양반 주인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10여 채의 노비들의 집이 자리 잡고, 하천이나 계곡의 물을 이용하여 쉽게 관개할 수 있는 곳을 따라 크고 작은 전답이 흩어져 있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양반들은 이러한 농장을 여러 곳에 보유하고 있었다. 자녀균분상속이 이루어지고, 개간이 활발히 진행된 결과였다.

농장이 각처에 산재했기 때문에 양반들은 농장의 위치에 따라 관리 형태를 달리하였다. 집 근처에 소재한 농장은 지주인 양반 자신이 노비를 동원해서 직접 경영했다. 이런 경영형태를 가작家作이라 하였다.

가작은 양반들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를 동원하여 논밭갈이에서부터 씨 뿌리고, 김 메고, 거름 주는 전 과정에 대해 직접 지시하고 감독하는 경영형태였다. 양반들은 농업경영에 아주 열심이었다. 농사철에는 함부로 외출하는 것도 삼갔다. 농사의 성패는 전적으로 지주 자신의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먹고사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양반 지주들은 가작지 경영을 통해 더 많은 소출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집 부근의 농장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먼 곳에 있는 농장은 작개제作介制라는 방식으로 경영되었다. 작개제란 농장의 토지를 작개지와 사경지로 나누어 작개지는 주인이, 사경지는 노비가 수확물을 차지하는 경영형태를 말한다. 물론 농사를 짓는 것은 여기에 소속된 노비이다. 노비가 주인의 땅을 경작해 주는 대신에 사경지를 받아서 먹고사는 것이다. 얼마 전 머슴들에게 1년 단위로 주는 품삯을 새경이라 한 것은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가작지를 제외한 대부분의 농장은 작개제로 경영되었다. 작개지의 소출은 가작지에 미치지 못하였다. 노비의 입장에서는 양반의 작개지에 더 많은 정성을 쏟을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몫이 되는 사경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자 했다. 멀리 있는 양반의 눈을 피해 수확물을 숨기기도 했다. 그래서 양반들은 면적당 일정한 기준을 정해두고는 여기에 미달한 노비들에게 매질을 가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노비들의 태업과 저항은 거세졌다.

노비노동에 근거한 가작이나 작개경영과는 다른 병작제竝作制라는 경영방법도 있었다. 병작제란 지주와 작인의 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영형태를 말한다. 즉, 지주는 땅과 종자와 소를 제공하고, 작인作人들은 경작을 책임지는 것이다. 경영에 함께 참여했으니 수확물도 지주와 작인이 똑같이 나누어 가졌다. 계약기간 곧, 농사철이 끝나면 작인을 바꾸거나 경작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조선전기 양반들의 농장은 이런 다양한 형태로 경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병작은 아직 극히 부분적으로만 실시될 뿐이었다. 16세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어 갔다. 이전에는 토지를 함부로 사고 팔 수가 없었다. 토지소유권이 확보되자 지주들은 농장의 경영을 노비에게만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토지를 병작지로 대여하더라도 지대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법적인 권리가 확보된 것이다. 점차 병작경영이 확대되어갔고, 따라서 17세기쯤에는 작개제가 거의 소멸되어 갔다.

이앙법, 최첨단의 농법

양반들이 인仁과 의義 또는 이理니 기氣니 하는 문제에만 몰두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먹고 사는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생존에 필요한 현실의 문제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가작지 경작을 진두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논농사를 크게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농법을 도입하는 데도 앞장섰다.

새로운 농법이란 이앙법移秧法을 말한다. 16세기 까지만 하더라도 벼 재배 방법은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하는 직파법直播法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앙법은 못자리에서 키운 모를 뽑아 본 논에 옮겨 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성행하던 농법이었는데, 경상도 북부지역의 양반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이앙법은 직파법에 비해 김 메기 횟수뿐만 아니라 노동력도 크게 줄여 주었다. 그러나 이앙법의 가장 큰 매력은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벼를 수확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또한 벼 재배가 끝난 후에는 보리농사를 지음으로써 1년에 두 번 추수를 할 수 있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경상도 북부지역은 주곡이 보리였다. 양반들도 대부분 보리로 연명하였다. 경상도 ‘보리 문둥이’는 다름 아닌 보리를 주식으로 삼는 학동 즉, ‘보리 문동文童’에서 온 것이다. 경상도 선비들이 서울에 발을 드려놓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였다. 기껏 보리밥이나 먹고 ‘촌티’를 벗지 못한 경상도 젊은 선비들이 그 모양새와는 달리 학문적 수준이나 예의범절에 있어서 서울의 관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에서 붙여진 이름이 보리 문동이었다.

아무튼 이앙법은 이제 논에서도 벼와 함께 보리의 수확을 가능하게 하였다. 봄철부터 시작되는 굶주림의 대명사인 ‘보릿고개’ 또한 이 보리의 수확과 함께 사라지게 하였다.

이앙법은 밭농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밭에 한 해에 보리와 콩을 교대로 경작하는 그루갈이와 보리가 자라고 있는 봄철에 조나 콩을 함께 파종하는 섞어짓기를 빠르게 확산시켰다. 이앙법으로 논농사에 일손을 덜 수 있었기 때문에 밭농사에도 더 많은 손길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앙법이 농민의 삶에 얼마나 큰 보탬이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하지 않을 것이다.

이앙법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농법이었다. 이 최첨단 농법을 수용하고 보급시킨 것은 영남의 양반들이었다. 동시에 영남의 선비들은 이 최첨단 농법을 통해 16세기 후반 국정을 주도해 가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어느 시대 없이 성장의 동력을 장악하는 세력이 정치 주도세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앙법은 위험부담이 높았다. 모내기시기에 물을 얻지 못하면 농사를 그르치게 된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이를 적극 금했다. 이앙을 요행을 바라는 행위로 생각했다. 경상도의 양반들은 산곡 간에 흐르는 내를 막아 천방川防이나 보洑를 설치함으로써 이를 극복해 나갔다. 이앙법은 이런 과정을 거쳐 17세기경에는 전국적으로 일반적인 농법으로 정착되었다.

태백산 남쪽자락에 위치한 경상도 북부지역에는 산곡 간을 흐르는 조그만 내들이 발달했다. 이곳을 막는 데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았다. 위쪽을 막아 아래쪽 계단식 논에 얼마든지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이런 곳이 이앙에 최적지였다. 산업이 발달하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양반들은 이런 산골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어 나갔다. 오늘날 양반들의 집 거의 대부분이 읍내가 아닌 산자락 몇 구비 돌아들어 가는 이런 산골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이앙법의 보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반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산골마을이 16세기를 거치면서 세상의 중심이 되고, 점차 동성마을로 발전해 갔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하면서는 점차 서울과 읍내에 밀리게 되고, 산업사회가 도래한 이후에는 더욱 빠르게 쇠락해 갔다. 농업은 이제 사양 산업이 되었다. 산골짝에 위치한 전일의 옥토들은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거의 대부분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더불어 사람들도 떠났다.

공장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는 농촌의 젊은 일꾼들을 도시로 내몰아야만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저곡가 정책이다. 쌀값을 낮은 수준에서 통제해 버리면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게 된다. 거대한 국가권력 앞에 농민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결국은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룩한 산업화는 농촌과 농민들의 희생이라는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농촌과 농민들의 몫은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황폐한 농촌으로 늙고 무기력한 풍경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앙법은 5백 년 동안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었다.

지주가 된 종가

양반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16, 17세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지방의 양반들이 중앙의 벼슬자리에도 많이 나아갔고, 개간이나 매득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많은 편차는 있었지만, 영남 양반들의 일반적인 형편은 대체로 수백 두락에 이르는 토지를 소유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토지는 할아버지 아버지뿐만 아니라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거나 처가로부터 상속받은 것이었다. 여기에 자기 당대에 개간이나 매득을 통해서도 많은 토지를 모으기도 하였다. 이렇게 모아진 토지는 다시 아들과 딸들에게 상속되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상속에 있어서 아들과 딸의 차별이 없었다. 이것이 나라 법이었다. 이를 흔히 자녀균분상속제라 한다. 부모의 생시에 혹은 사후에 자식들에게 토지뿐만 아니라 노비와 집, 솥 등을 똑 같이 분배했던 것이다. 그 방법은 들[원員]이나 지역별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대개 한 필지 한 필지단위로 나누었다. 이렇게 세분하여 나눈 것은 관리에 편했고, 만약의 사태에도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로부터 소송이라도 당하게 되면 혼자가 아니라 여러 아들딸이 함께 대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확보되고 상속된 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세전지물世傳之物]이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말기를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무렵 이후에는 종법宗法이라는 제도가 일반화되면서 점차 아들과 장자 중심으로 상속제도가 바뀌어 갔다. 종법이란 가계를 장자로 계속 이어가게 하여, 이 장자가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는 아들딸들이 돌아가면서 조상의 제사를 모셨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외손봉사도 흔하게 행해졌다.

또한 17세기를 거치면서는 영남 양반들은 관료로의 진출에도 한계가 있었고, 이에 따라 토지 소유규모도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에 자손은 계속해서 늘어갔다. 똑 같이 나누다가는 모두가 가난해 지게 되고, 그러면 조상 제사를 받드는 것도 어려워지게 될 형편이었다.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장자에게 더 많은 토지를 몰아주고, 더 많은 전답을 제사 몫[제위전祭位田]으로 돌려 가문을 지키며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이제 종가 자체가 지주가 되었다. 이런 지주를 ‘종가형 지주’라고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큰 기와집은 대부분이 이런 장자로 가계를 계승해 온 종가이다. 물론 종가와 종손이 아닌 집에서도 장자 중심의 상속제도를 따랐다. 따라서 종가와 종손 또는 맏아들이 아닌 양반들의 토지소유 규모는 더욱 영세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지속됨에 따라 점차 보다 많은 양반들이 생계조차 이어가기 어려운 이른바 ‘몰락양반’의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들 몰락양반 또한 가난한 농민들과 더불어 종가와 종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명문 양반가에서는 제위전답이나 문중답門中畓 종계답宗契畓 등 일종의 공동기금을 통해 가난한 지손支孫들의 생계를 보전해 주어야 했다. 이런 사정에서 가난한 양반들은 대대로 살아오던 터전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신분제도가 허물어져 가는 상황에서 가난한 양반들이 종가나 종손의 위세에 힘입지 않고서는 흥부처럼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인구의 증가는 토지의 부족을 심화시켰다. 토지를 가진 지주가 더욱 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제 종가와 종손은 지주로서 병작제도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갔다. 점차 종자도 부담하지 않았고, 토지세도 경작농민인 작인作人들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타작打作 마당에서 수확량의 반을 챙겼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지賭地라는 이름으로 미리 액수를 못 박아 두기도 했다. 가까운 곳이라면 타작이 유리했지만, 먼 곳의 토지는 도지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병작지의 작인들은 점차 노비에서 상민이나 양반으로 바뀌어 갔다. 지주들은 이들 작인들을 이런저런 잡일에 무상으로 동원할 수도 있었다.

집 부근의 전답은 역시 가작家作으로 경작했다. 가작지 경영에는 여전히 노비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굳이 노비에게만 의존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옛날과 같이 많은 노비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양반들의 노비에 대한 관심과 보호는 상대적으로 덜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노비들의 도망은 아주 폭넓게 전개되었다.

양반의 수족, 노비

조선 전기에는 토지보다 노비가 더 중요한 재산이었다. 양반들은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자 했다. 그 수는 가문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16,17세기 영남의 양반가문에서도 많은 경우에는 5,6백 명에 달하였다. 퇴계와 아들들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확인되는 노비만도 130여 명에 달하였고, 그 손자녀

의 분재기에 등장하는 노비는 370여 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명문 양반가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노비들은 흔히 양반의 수족이라 불리었다. 양반들의 팔다리나 손발 역할을 했으니, 노비가 없으면 양반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노비들은 농사는 물론이고, 유모노릇을 하거나, 땔감을 해 와 불을 지피고, 물을 길러서 밥을 짓고, 명주나 삼배를 짜서 옷을 짓는 등 일상생활에필요한 모든 일들을 도맡아 했다. 심지어는 양반들의 첩이 되는 경우도 많았고, 춤과 노래를 담당하거나, 초상初喪 시에는 주인을 대신하여 밤새 울어주는 곡비哭婢의 역할도 하였다.

노비들은 역할이나 상전가에 대한 의무에 따라 대체로 앙역노비仰役奴婢와 외거노비外居奴婢로 나누어진다. 앙역노비는 양반 주인집의 가사노동이나 가작지 경영에 동원되는 노비들을 말한다. 이들을 한 때 ‘솔거노비’라고 불렀다. 그러나 주인집의 행랑채 등에 ‘솔거(率居)’되어 생활하고 있는 노비는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노비들은 그 주변이나 마을의 개별 가옥에서 독자적인 경영 주체로 살았다. 앙역노비의 수는 시대에 따라 또는 주인집의 규모에 따라 달랐지만, 16,17세기에는 20,30명 혹은 40여 명 정도였다. 주인집에서 기거를 하지 않는 앙역노비들은 오늘날 출퇴근 하듯이 주인집을 드나들면서 이런저런 일들에 사역되었다.

주인은 이들의 노동력을 제공받는 대가로 매달 양식을 보조해 주거나, 경작할 토지를 주어 생계를 보장해 주었다.

어떤 양반집에서는 노비들의 급료를 매월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형식으로 지급하고자 했다. 물론 노비들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지급액을 달랐다. 노와 비의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수노首奴와 수비首婢에게는 각기 벼 12말과 9말, 일반 노와 비에게는 9말과 6말을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벼를 쌀로 환산하면 대략 1/2이 되고, 옛날의 도량형은 오늘날의 또 1/2이 되니 대략 수노에게 쌀 3말 정도 주어졌던 셈이다. 적지 않은 양이다. 초하루 혹은 매달 지급하는 급료라는 의미에서 삭료朔料 혹은 월료月料라고 하였다. 경작지를 준 경우에는 사경지와 마찬가지로 수확물 전부를 노비가 가지거나 형식적인 소작료만을 받았다. 노비가 주인을 위해 일방적으로 사역되는 존재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해였다.

조선시대 노비들은 주인가의 이러한 배려가 없다면, 그리고 주인가를 떠나서도 살아갈 방도가 있다면 주인집에 얽매여 있지만은 않았다. 도망이라는 방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떠나갔다. 조선시대 노비제도는 이렇게 하여 붕괴되어 갔다.

노비가 수 백 명에 달하던 시절 대부분의 노비들은 주인집과는 무관하게 혹은 인근의 여러 고을이나 아주 먼 타도에 살기도 하였다. 이들은 말 그대로 외거하고 있었다. 외거노비들은 가족단위로 자신 또는 다른 사람들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대신 주인집에 신공身貢이라는 몸값으로 남자 종[노奴]은 삼베 2필, 여자 종[비婢]은 1필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매년 이렇게 의무를 다하는 노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콩이나 참깨, 꿩․닭 등을 조금 바치거나 아예 납부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외거노비들은 주인에게 내는 몸값뿐만 아니라 호적에 독립된 호로 올라가 있는 경우에는 나라에

호세戶稅라는 세금도 내어야 했고, 일반 양민들만의 의무였던 군역까지 지는 경우도 많았다. 속오군束伍軍은 노비를 근간으로 하여 편성된 군대이다. 이렇듯 조선후기의 노비는 점차 양민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의무를 지고 있었다. 의무가 같게 되면 권리도 따라서 같게 된다. 권리란 신분이다. 노비의 해방은 이렇듯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한 것이었다.

노비들은 원래 노비와 혼인해야 하는 것이 국법이었다. 그러나 더 많은 노비들이 양민과 혼인을 하고 있었다. 이를 양천교혼이라고 했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이런 양천교혼을 주선한 것은 다름 아닌 양반들이었다. 노비가 재산이었으니, 재산은 많을수록 좋다. 노비끼리 혼인시키는 것보다 양민과 혼인시키는 것이 노비를 증가시키는 데에 훨씬 유리하였다. 부모 어느 한쪽이라도 노비신분이면 그 자식들 모두 노비가 되는 법을 적극 활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라에 세금을 내는 양인들은 점점 줄어들고 양반들의 노비는 엄청나게 불어나게 되었다.

나라에서도 이를 계속 묵인할 수만은 없었다. 공민公民이 줄어들면 군역자원도 줄어들고 국가재정에도 큰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를 통제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영남 남인들의 반대가 완강하였다. 영남 남인들은 농업경영에 아직은 더 많은 노비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영조 연간(1731년)에 이르러 마침내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에 따른다는 법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비록 종이더라도 어머니가 양인의 신분이면, 그 자식은 이제 더 이상 노비가 아니었다. 이 법으로 말미암아 양반들은 엄청 타격을 받았다.

18세기 후반을 지나 19세기에 이르면 양반집의 노비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전일의 수백 명에 이르던 노비들이 많아야 고작 십여 명이었고, 겨우 한두 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노비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노비에 대한 법이 바뀐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비들이 적극적으로 도망을 했기 때문이었다. 농업이 발달하고 장시場市도 발달함에 따라 주인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더구나 사회 전반적으로는 신분제도도 흔들렸으니 크게 두려워 할 일도 아니었다. 물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주인집에 의지하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노비 신분에서의 해방과 신체의 자유는 그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값진 것이었다.

점차 양반들의 노비 통제는 어려워지고 있었다. 어렵기는 나라와 관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국가나 양반들은 노비들에게 거두는 몸값을 그 반으로 줄여주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노비의 도망은 계속되었다. 노비도망은 외거노비뿐만 아니라 주인집에서 함께 기거하던 앙역노비에 까지 이르고 있었다. 국가와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였다. 공노비의 도망으로 1801년 국가에서는 노비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노비제도가 혁파된 것일 뿐이었다. 사노비의 경우에는 20세기 초반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명무실하였다. 양반들은 그들의 새로운 수족을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정기간 돈을 주고 고용하는 고공雇工이나 머슴들이 이제 부족하지만 노비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옛날의 노비와는 같을 수가 없었다.

고공이나 머슴은 신분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다만 계약으로 맺은 한시적인 고용인에 불과했다. 싫으면 그만이었다. 이제 전일의 노비나 가난한 농민들도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세상이 변하고 바뀌었다. 역사의 인간관계에서 계약이란 이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평등은 이렇게 하여 왔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