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최초의 외과병원 백병원(글/조창희_아동문학가, 의성감리교회 목사)
안동교회 유치원 건물에서 개업한 백병원
1909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의사 플레처(A.G.Fletcher)가 화성동 소재 안동교회 교육관에 애린원을 개설한 것이 오늘날 성소병원의 시작이었다. 1932년 성소병원 원장인 내과의사 여성 선교사가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가서 성소병원에 외과의사가 필요하다고 하므로 백태성 외과의사를 추천받아서 부원장으로 영입했다. 한국인 의사로서 부원장이고 보니 실질적으로는 대부분 원장의 직무를 다했다. 또한 안동에 있으면서 세브란스 의전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후에 일본 경도(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 3년간 유학하여 의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1943년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이 극에 달했다. 한국사람이면서도 한국말과 한글을 못하게 했고 오로지 일본말과 일본글만 쓰게 했으며 한국 성씨도 말살하고 일본식 성씨로 개명을 해야만 했으며 청년들은 징용으로 끌려갔고 젊은 여성들은 정신대로 끌려갔다. 또한 전쟁물자를 만들기 위해 놋그릇과 놋수저를 비롯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조리 압수해갔다. 전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종도 몰수해 갔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만행이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강제 추방시키고 기독교 병원과 학교는 강제로 폐쇄하므로 서울 세브란스 병원과 안동성소병원도 폐업을 했다.
백태성 박사는 어쩔 수 없이 개인병원을 차려서 새출발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형편을 안동교회(그 시절엔 ‘안동중앙교회’였다) 김광현 목사님이 아시고 먼저 제안을 했다. 개인병원을 개업하려면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아 빨라도 여러 달이 걸리니 교회 안에 유치원을 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 두 채 있으니 하나는 유치원을 하고 하나는 병원으로 할 수 있으니 먼저 ‘백병원’간판을 걸고 개업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이다. 실상 내막적으로는 일제가 유휴재산 몰수라는 명분으로 개인이나 기관이 소유하고 있는 넓은 땅과 여러 채 되는 건물은 강제로 차압해가던 시절이므로 건물 하나를 몰수당할 것 같으니까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먼저 선수를 쳐서 병원시설로 변경해두려는 것이었다. 백태성 박사도 김광현 목사님의 의중을 알고 먼저 안동교회 안에 있는 유치원 건물 하나에 ‘백병원’ 간판을 걸고 김광현 목사님의 집례로 개업예배를 드렸다. 이로 인하여 안동지역 최초의 외과병원이 안동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백병원이 세워지므로 성소병원에 몸담고 있던 모든 직원들은 백병원에서 일하게 되어 실직되는 이들이 없었다. 오히려 병원이 더욱 발전하여 현재 성소병원 길 건너편 광석동에 넓은 대지를 장만하여 안동에서 제일 큰 병원시설과 입원실 시설을 갖추어서 광복 전에 이전을 했다. 빠른 시일 안에 안동교회 백병원에서 광석동 백병원으로 크게 발전한 것이다. 이 시절에 금융조합(현재 농협의 전신)이사대우로 근무하던 필자의 선친이 월급 60원을 받았는데 백병원에 서무과장으로 왔을 때 월급이 120원이었다고 한다. 백병원의 하루 일과가 끝나면 그날의 수입이 방안에 수북이 쌓였다고 한다.
한편 안동교회에서 유휴재산을 몰수하지 못한 일제는 아예 본당 예배당 건물을 몰수해가므로 주일 예배 드릴 건물이 없어서 선교사들이 추방당하여 비어있는 사택을 임시 예배 처소로 삼아 주일예배를 드릴 때 협소하여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다들 선 채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교회당을 몰수당한 탄압에 소리 없이 눈물을 쏟으며 예배를 드렸고 김광현 목사님도 눈물로 예배를 인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필자의 선친 조상국 장로님이 생전에 들려주신 말씀이다. 또한 김광현 목사님과 최의숙 사모님을 통해서도 생전에 누누이 들은 말씀이다.
백병원의 평범한 직원이 사실은 독립운동가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므로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시절에는 안동 백병원이 제일 큰병원이었다. 이때 안동지역의 독립운동가 이주헌 선생(훗날 안동교회 장로 취임)은 백병원에 직원으로 몸담고 있었다. 외관상으로는 백병원에 근무하는 평범한 조선사람이었지만 그는 극비리에 독립운동 거사를 꾸미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말없이 저 혼자 거사를 꾸미고 펼쳐나간다지만 백병원에 몸담고 있는 직원들은 직감으로 눈치를 채고 무슨 큰일을 준비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필자의 선친이 백병원에 서무과장이었으니 그때에 일본인 형사가 불시에 백병원에 나타나면 모든 의사와 간호사와 직원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애간장을 졸였다고 한다. 일본인 형사가 여기저기 훑어보고 병원을 떠나가면 그때에 비로소 안도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한다.
2000년대에 성소병원 직원예배시간에 초청을 받아서 예배드린 후 원목실장인 김무년 목사와 이주헌 장로님의 자부되시는 과장님의 안내로 성소병원 길 건너편 빌딩에 거주하시는 이주헌 장로님을 찾아뵙고 반갑게 인사드린 일이 있었다. 이때 이주헌 장로님의 백병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극비리에 독립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백태성 원장님의 묵계와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곧 어느 날 백태성 원장님이 “오늘 퇴근 후에 조용히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 다른 직원들이 퇴근한 후 두 사람이 나란히 낙동강 제방 뚝길을 거닐게 되었을 때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 후 말씀하시길 “이주헌 선생이 큰일을 하고 있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으나 원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협조할 터이니 절대로 탄로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고 신중하게 하시오.” 이런 요지의 말씀으로 협조를 하겠다고 위로해주고 격려주어 많은 힘들 얻게 되었다고 했다. 실상 만약 원장님이 병원 안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곤란하다고 난색을 표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그날 하루종일 이런저런 생각으로 보냈는데 백태성 원장님이 먼저 협조를 하겠다며 절대로 탄로나지 않게 하라는 말씀에 동지들을 규합할 때에도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나는 그저 의술을 펼치는 의료인
얼마 후 이주헌 선생이 일본군 헌병대에 연행되어 여러 날 심문을 받게 되었다. 백병원 직원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며칠 후 이번엔 백태성 원장이 연행되어 심문을 받았다. 심문하는 작은 방이 여럿 있었는데 어느 방엔가는 이주헌 선생이 고문을 당하며 조사를 받고 있을 터인데 백태성 원장도 어느 방에 집어넣는데 탁자와 벽에는 각종 고문기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어 으스스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참 후 일본군 헌병대장이 들어와서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노려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원장은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오?”
첫 질문이 생각지도 않은 질문이라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우면서도 이주헌 선생의 독립운동은 아직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걱정은 덜었다고 한다. 그러면 뭐라고 답변할 것인가? 궁색하게 아부하지 말고 사나이답게 솔직하게 말하자 이렇게 마음먹고 “조선사람으로서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좋게 생각한다. 쌍수를 들어 독립만세를 부르리라. 그러나 조선의 독립은 정치인이나 독립투사들이 할 일이요 나는 정치인도 독립투사도 아니요 오로지 의술을 펴는 과학자로서 병든 자를 고쳐서 건강하게 살도록 최선을 다하는 의사외다. 일본인도 백병원에 와서 병을 고치고 건강하게 살고 있소.” 이런 요지로 답변을 했는데 처음에는 서슬퍼렇던 헌병대장의 눈꼬리가 나중에는 풀려지면서 “백원장의 사상이 건전한 것을 이제 알게 되었으니 이제부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님 부탁합니다. 협조해 주십시오.”했다 한다. 헌병대장보다 몇 살 나이가 많은 고로 조사 받으러 연행되어 갔다가 일본군 헌병대장의 형님 예우를 받고 당일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주헌 선생은 언제 풀려나올지 알 수 없었다.
백태성 원장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나온 후에 내과와 소아과 전문의인 영남병원 원장님이 내심 불안하여 언젠가는 나도 백박사처럼 잡혀가서 조사를 받을지도 모른다 싶어 그때를 대비해서 한여름 무더위에 접어드는데도 솜으로 누빈 두툼한 속옷 팬티를 만들어 입고 겉에는 여름옷 차림으로 병원일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불시에 연행되어 가서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더라도 덜 아프라는 재치있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남병원 원장은 연행 당하지 않았다. 이런 일로 하루 일과가 끝나면 사타구니에 땀띠가 돋아나서 고생했다고 하니 8.15광복 후에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나라를 빼앗긴 우리 선조들의 슬픈 역사가 아니겠는가.
얼마 후에 이번에는 안동교회 김광현 목사님이 연행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김광현 목사님은 귀가하지 못하고 안동형무소에 구금되기까지 하셨다. 그리고 8.15광복 후에 안동형무소에서 풀려나셨다. 김광현 목사님은 1946년 과도기 때 초대 입법위원으로 안동에서 선출되었고 백태성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안동에서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부인인 조은희 여사는 대한부인회 회장이, 안동농고에 다니던 둘째 아들 백낙승 씨는 학년간부와 학도호국단 간부로 우익진영에서 크게 활약을 했다. 둘째 아들 백낙승 형님은 6.25전쟁이 터지자 7월에 즉각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학도병 1기생으로 참전, 훗날 공군사관학교를 3기생으로 졸업하여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고 공군소장으로 1983년 전역하였다.
아들이 학도병 지원을 했을 때 아버지 되시는 백태성 박사는 묵묵부답으로 아들의 결단을 장한 뜻으로 용인하였고 7월 10일 안동역에서 200여 명의 학도병 지원자들을 대구행 임시열차에 실어 보낼 때 “집안 걱정 말고 남자답게 씩씩하게 싸워라. 그리고 자중 자애하라”는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주는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백병원이 고스란히 파괴되므로 마음의 상처가 컸었는데 1951년에 백태성 박사는 안동도립병원 원장이 되었다. 1961년 도립병원 원장직을 사임하고 백병원 개업을 재개(현재 시내 중앙농협 맞은편 자리)했으나 2-3년 버티다가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여 잠시 투병생활을 하다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5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