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임동의 마지막 설 장날(글/임세권)
벌써 더워져버린 5월말, 잃어버린 안동풍경을 찾아 필름다발을 뒤지다가 더위도 식혀볼 겸 썰렁한 사진 몇 장을 골라들었다. 손주 입을 털잠바라도 하나 골라볼까… 빈 장바구니를 들고 걸음을 옮기는 할머니 발길이 바쁘다. 장터 뒤를 가로지른 다릿발 위로 벌써 상판이 걸쳐졌다. 1988년 설 장날, 아마 이게 임동에서 맞는 마지막 설장이었을게다.
1987년의 뜨거웠던 6월의 민주항쟁을 승리의 매듭으로 엮어 보내고 다시 찾아온 겨울. 6월 항쟁의 열기는 대통령선거에서 삼김씨의 패배로 싸늘하게 가라앉아 버렸고 해가 바뀌어 다시 찾아온 설을 앞둔 임동장은 이제 곧 물에 묻힐 운명에 대한 체념으로 썰렁하기만 하다. 벽에 붙은 선거포스터의 구호가 공허하기만 하다.
이 아저씨는 도대체 장사할 마음이 안난다. 마지막 세모를 맞은 휑한 장터에는 손님도 없는데 모처럼 찾아온 할머니의 손길이 옷자락만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다. 먼데 뒤로 보이는 산비탈이 이제 옮겨갈 새 임동터라는데 사람들은 산자락만 보아도 한숨이 나왔다.
이제 어느 장터에서 이런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파는 사람이나 물건사러 나온 손님이나 도무지 팔고 사는데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당초 뭘 사러 나온 것은 아니었을게다. 사돈 영감이나 만나면 장국 한그릇에 탁백기 한 대접 마시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