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내용

활 잘 쏘는 여무사 박일란 할머니(글/임종교)

요즘 활 쏘는 재미에 빠져있는 김신택씨가 우연히 편집실을 다녀갔다. 얼핏 흘리는 말로 같은 궁도회에 일흔 다섯 되시는 활을 잘 쏘는 할머니가 있다는 것이다. '일흔다섯에 활을 쏜다!' 어떤 분이실까 하는 궁금증과 취재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몇 번 되뇌이고는 무작정 만나보기로 했다.

낮고 걸걸한 목소리, "내보다 더 활 잘 쏘는 사람 많습니다."라며 사양을 거듭하기를 얼마간, "이 늙은이를 책에 실어서 뭐해요"라며 마지못해 취재 승락을 한다. 그리고 시간 약속을 잡아 할머니와 대면한 곳은 할머니집도, 궁도회 사무실도, 활을 쏘는 영락정도 아닌 손님을 맞거나 잠시 쉴 때 자주 들르신다는 다방이었다.

박할머니가 활을 손에 잡은 지는 23년째 된다. 할머니 연세 52살 때 시작했으니 안동에서 여무사(여자 궁사) 경력으로는 상당하다. 궁도(弓道)라 했다. 도 닦는 일이라, 결국 마음을 닦는 일일텐데 편치 않은 세상에서 마음 닦기가 제일 힘든 일 같다. 그러기에 세상과 이별하고, 그것에만 정진하는 수도자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은 우리 속인들이야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일 뿐 다른 방도야 무에 있으랴.

박할머니가 활쏘기를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건강 때문이었다.
"위도 좀 안 좋고, 기관지도 안 좋고, 정신단련도 좀 할려고 시작했지. 주위에 여러 가지 운동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활을 쏘고 싶더라고, 활 쏘는 게 가만히 서 있으니 다리 운동은 안 되는 것 같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야 명중률이 많거든, 그러니까 발끝하고 머리끝하고 또옥 같은 힘이 가야 돼. 그냥 서서 쏘는 것 같아도 안 그래. 그라고 허리 굽은 사람이 없어."
그래서 그런지 일흔 다섯의 나이보다는 정정해 보이고, 게다가 허리도 꼿꼿하다.

건강상의 이유로 활을 쏘기 시작했지만, 무엇보다 할머니에게는 정신적인 위안이 더 컸던 듯 하다. 박할머니는 시집와서 서른 즈음에 할아버지와 별거를 했다. 이유를 물어보기에도 새삼스러울 만큼 4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도록 남이 아닌 남이 된 지 오래지만 그 긴 시간동안 혼자 몸으로 삼남매를 홀로 키우면서 힘들게 사신 할머니의 정신적인 친구 노릇도 톡톡히 해왔던 듯 하다.

그러나 20년 전만해도 여자가 활을 쏜다는 건 흔하지 않았을 때이니 주위의 이런 저런 말들도 있었다.
"여자가 뭐 이런 말이 있었지. 그때만 해도 옛날이니"
나이는 드셨지만, 체격으로 보나, 말품새로 보나 젊은 시절엔, 보통의 사내몫은 더 하고도 남으셨을 것 같다.

할머니는 무엇보다 정신과 육체에 건강을 찾은 것이 가장 고맙다. 활을 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죽을 먹는 일도 없어졌고, 나빴던 기관지도 좋아졌다. 지금 할머니에게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정자도 좋고, 공기도 좋았던 궁도장이 옮겨지게 된 것이다.
"우리 영락정이 안동 영호루 충혼탑 뒤에 있었거든. 지금은 정으로 길이 나서 강변 소방서 옆으로 옮겨왔는데, 활쏘기에는 옛날이 좋았지."

잡념이 돌면 활이 딴데로 가

처음 할머니가 궁도회 들어갈 때만 해도 회원자격이 아주 까다로왔다고 한다. 회원자격을 이사 임원들이 모여서 투표를 해서 결정을 하고, 예의 범절같은 것까지 모두 검증을 받아야했다.
"암만 더워도 난닝구 입고 사대(활을 쏘기위해 오르는 대)에 못선다고, 슬리퍼 신고도 안되고, 양말을 안신어도 안됐지. 근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 요새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면서부터는 많이 달라졌지."

그렇지만 모든 게 달라졌어도 활을 쏠 때 지켜야하는 마음 가짐에는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할머니의 생각이다. 구계훈이라 하여 궁도를 하는 사람들의 아홉가지 마음가짐을 적어놓은 것이 있다며 옛날에는 늘 활을 잡기 전에 몇 번씩 낭독하고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나이 탓인지 다 외지 못한다고 한다. 참고로 적어보면 이러하다.

사랑과 덕행으로 본을 보인다/ 겸손하고 성실하게 행한다/ 행실을 신중히 하고 절조를 굳게 지킨다/ 예의범절을 엄격히 지킨다/ 청렴겸직하고 용감하게 행한다/ 활을 쏠 때는 침묵을 지킨다/ 몸과 마음을 항상 바르게 한다/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타인의 활을 당기지 않는다
궁도를 일컬어, 공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활을 쏘는 것은 군자와도 같은 일이니 정곡을 맞히지 못하면 돌이켜서 그 원인을 자신에게 구할 것이다"라고.

이미 손을 떠난 활은 돌아오지 않는다. 정곡을 맞추기 위해 활이 손을 떠날 때까지 그 과정은 자신과의 싸움인 것이다. 오로지 그 안에 활과 과녁밖에는 없다. 아무생각이 없는 무념 무상의 상태, 진공의 상태에라야 비로소 활은 과녁의 가운데를 뚫을 수 있다는 얘기다. 쉬운 얘기지만 어려운 일이다.
"활을 딱 들고 사대에 올라가면 내가 명중하겠다는 생각 외엔 없는거라. 가보면 알겠지만 사대와 과녁사이는 145미터나 되는데 오로지 육안으로만 쏘는 거지. 암 생각이 없어야 되고, 잡념이 돌면 활이 딴데로 가. 딴 생각해선 또 절대로 안되고, 되지도 않고,"

일흔 다섯 궁사에게 명중의 의미는.

박할머니가 활을 잡은지 서너 해 지나면서부터는 여러 궁도대회를 석권하기 시작했다. 한참 잘 나갈 때가 쉰다섯에서 예순다섯까지 였다니, 그때까지 대회에서 메달을 휩쓸었다. 이후 사진을 핑계삼아 찾아간 할머니 집에는 이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리가 안되었다는데도 궁도대회에서 받은 트로피와 상장, 사진이 이곳저곳 눈에 띤다.

안동궁도회 사두(회장)인 한희섭씨는 할머니에 대해 "여무사 박일란 할머니 하면 활쏘는 사람들 사이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활도 잘 쏘시지만 자세가 좋아서 궁체상도 몇 번이나 받으셨는데 여무사면서도 자세가 흔들림이 없이 조금도 나무랄데가 없으시지요."라며 칭찬이 대단하시다.

할머니 활 시위 당기는 것도 직접 보고 싶고 해서 연습하러 언제 나가시냐고 여쭸더니,
"연습은 뭐, 꼭 1등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요즘은 이리저리 다니느라 잘 못나가. 늘 쏘면 좋지. 활은 꾸준히 쏴야 돼. 그래야 명중률도 많고, 요즘 내처럼 한달 만에 한번 나가고 이래하면 안되지. 옛날에는 일주일에 4번은 나갔는데 지금은 눈도 침침하고, 영 희미한 게 그렇지. 힘도 약해지고…"

잠시 늙음에 대한 안타까움이랄까 한숨이 흐른다, 그렇게 좋던 눈도 이젠 침침해져서 좋아하는 활쏘기에도 자신감이 한 뼘 뒤로 물러나 있는 듯 하다. 이미 할머니 또래의 친구들은 세상을 등졌거나, 몸이 아파서 늘 집 신세라니 한편 남의 도움없이 다니시는 그 정정함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이젠 다 늙었다고 체념하면서도 할머니는 자신의 일을 놓지 않고 있다. 마흔 즈음에 아이들과 살려고 시작한 제비원 다방을 근 20년간 운영해온 여장부이기도 했다. 남부동 상인들로 결성된 남지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그 이후로 시작한 보험 일을 또 10년이 넘게 현재까지 하고 있다. 최고령 보험할머니이기도 하다.
"고객들이랑 나이가 안 맞으니 대화도 잘 안되고 이제 곧 그만 둬야지. 나이도 많고, 댕기기도 이젠 힘들고, 나이가 많아지니 정신도 휘황하고…활쏘기는 거랑 똑같지 뭐."

일흔 다섯이라는 숫자가 뭐 그리 대수로울까마는 할머니는 조금씩 체념하고 비우고 계신 중이다. 명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화살은 이제 과녁 한번 맞추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이젠 점수도 없다고 웃으시는 할머니. 이제 할머니에게 명중한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일런지 모른다. 그저 건강이 허락하는 한 궁도회 회원들과 어울려 비록 과녁을 벗어나는 화살쏘기라도 계속 해나가는 일이 소중할 뿐이다. 늦게 들은 이야기로 13일에 있었던 영주에서 열린 궁도대회에서 할머니가 장려상을 받으셨단다. 여무사 박일란 할머니는 아직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