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 38번 종점, 살강마을을 찾아서(글/서미숙_독서논술 · NIE 강사, 본지 편집위원)
오월 중순이었다. 『안동』지 복간호 발간을 위한 편집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과연 편집위원으로서 도움을 제대로 줄 수나 있을까? 공연히 시간만 저당 잡히는 건 아닐까?’주저하다가 내친걸음이었다. 막상 회의 자료를 보면서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종점기행’이란 새로운 꼭지가 잡혀 있는 걸 보면서 나도 모르게 덥석 덤비고 말았다. ‘안동의 시내버스 모든 노선 타 보기’를 버킷리스트에 추가하고 봄부터 이미 실천하고 있던 터였다. 처음 만난 편집기자와 잘 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여행이 대세이다. 매스컴에서도 여행 프로그램이 넘쳐 난다.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몽골의 후예들은 선천적으로 여행 유전자를 타고났다고도 한다. 누구나 여행할 권리가 있다. 나 역시 일상을 벗어나 충전하고 싶은 열망을 자주 갖게 된다. 먼 곳으로 시야를 넓히는 여행도 필요하지만, 내가 사는 지역을 제대로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가끔은 핸들에서 해방되어 시민의 발에 편승해보자. 아무런 준비 없이도 훌쩍 부담 없이 떠나기 좋은 것이 시내버스가 아니던가.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면 사랑방 『안동』 지의 ‘종점기행’을 열독하며 와유臥遊를 해보는 건 어떨까.
안동에는 현재 32개 버스노선이 운행 중이다. 5, 6월호에 게재할 첫 여행지는 의성군 단촌면 구계2리 외천으로 정했다. 2007년 오월에 귀천한 권정생 작가의 대표작 『몽실언니』의 첫머리에 나오는 살강마을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아직 언니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어린 꼬마 몽실이네는 아버지의 고향 근처 살강 마을 어느 농사꾼 집 곁방살이를 했다.’ -『몽실언니』 중에서
사월 초파일 다음 날, 10시 40분에 출발하는 외천행 38번 시내버스를 탔다. 편집실 소애 씨가 사진기자로 동행했다. 버스 안에는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좌석버스를 일반 버스로 돌리면서 외곽지 노선에 투입한 터라 45인승이다. 평일이라 한산할 줄 알았더니 출발지 승객이 열 명이 넘는다. 신시장 앞에서 제법 많은 승객이 더 탔다. 대부분 수수한 차림의 촌로들이다. 시골버스는 왁자할 거란 예상도 빗나갔다. 서로 낯익은 얼굴들끼리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었다. 앞자리 어르신께 장날도 아닌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쭈었더니 병원에 다녀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태화동과 어가골 입구를 지났다.
5번 국도를 따라 한티재를 지날 때면 권정생 작가의 소설 『한티재 하늘』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정원의 짚신이 눈물겹다. 동학농민의병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지아비 건재가 죽자 순흥 가래실에서부터 어린 삼 남매를 데리고 친정으로 걸어가는 길이다. 생면부지의 남루한 여인에게 자신이 신었던 짚신을 벗어준 낙동강 나루치 노인의 측은지심이라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한티재를 내려가면 몇 년 전까지 남아있던 검문소도 없어졌다. 중앙선 기차가 지날 때마다 통행제한을 하던 건널목도, 근처에 있던 친구의 집도 모두 사라졌다. 대신 안동의 남쪽 관문인 남례문南禮門 이 위용을 드러낸다. 남후면 소재지인 무릉1리로 내려간다. 나의 발자국이 무수히 찍힌 남후초등학교를 지난다. 슈퍼마켓이 생겨서일까. 비가와 고구마깡을 사 먹던 학교 주변 구멍가게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쯤이면 작은 잎사귀 나부끼던 미루나무도 간 곳 없고 전봇대가 가로수처럼 박혀있다.
예전에 신작로에는 흙먼지 풀풀 날리며 버스가 다녔다. 합승이라고 했다. 합승에는 차비를 받고 승객의 안전을 보살피는 차장이 함께 탔다. 아가씨가 대부분이어서 안내양이라고 불렀다. 등하교 시간이면 안내양의 역할이 막중했다. 자취생까지 합류하는 토요일이나 장날엔 더욱 빛을 발했다. 줄곧 선 채로 가는 승객들은 손잡이를 잡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정원에 상관없이 승객의 등을 짐짝처럼 밀어 넣는 기술이 필요했다. 출입문에 묘기하듯 매달린 안내양이 밖으로 손을 내밀어 차체를 쾅쾅 두드리며 “오~라잇!”이라고 외쳐야 버스가 출발했다. 이제는 시스템이 보완되긴 했지만, 운전기사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느라 바쁘다.
버스는 무릉유원지 쪽으로 방향을 튼다. 지난가을에 개장한 백조공원 조형물 앞을 돌아 다시 국도로 올라선다. 암산유원지는 무릉유원지와 지척에서 쌍벽을 이룬다.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미천을 따라 높이 솟은 적벽의 단애가 비경이다. 천연기념물 구리 측백나무가 자생하는 암산은 강 건너 고산서원에서 바라봐야 제격이다. 구안국도의 명물인 암산굴의 환상적인 프레임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초가집이 있던 마을
터널을 나오면 왼쪽 도로변에 보현사 표석이 보인다. 좁다란 골짜기 막다른 곳에 자리한 태고종 사찰이다.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친견할 수도 있다. 한편 그 깊숙한 골짜기는 한국전쟁 당시 피비린내 나던 곳이다. 1950년 9월 29일, 인민군 부역자 27명이 총살되었다는 과거사 진상조사 자료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권정생의 자전적 소년소설 『초가집이 있던 마을』에서도 이곳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자암산 바윗돌이 붉은 빛을 띠는 것조차 무연히 연관을 짓게 된다.
곳곳에 무논이다. 논물전쟁이 시작되었다. 버스에서 만난 어르신은 새벽 두 시에 논물 대러 나간다고 하셨다. 쌀 한 톨에 새겨진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길가에는 못단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보이는가 하면 일찌감치 모내기를 끝낸 곳도 있다.
몽실이가 빚 갚을 차례
일직에서 대 여섯 분이 내렸다. 노인들은 중심을 잡기 힘들어 타고 내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차 벨이 선반 가까이 붙어 있어 불편해 보인다. 일직교를 지나 육교를 벗어나면 점곡·고운사 방면 79번 지방도로 접어든다. 굴다리를 나와 좌우로 펼쳐진 동네가 망호리다. 왼쪽 양지마을은 수은종택과 수옥정, 대산종택, 소산재 등 한산이씨의 세거지다. 길 건너 오른쪽 음지마을은 대구서씨 약봉종택과 소호헌이 자리 잡았다.
소호헌 주차장을 지나 직진하면 ‘권정생 동화나라’에 닿는다. 폐교된 일직남부초등학교를 개축한 곳이다. 몽실이가 개가한 엄마와 댓골 김씨네 집에서 지내다가 고모 손에 끌려 돌아와 친아버지 정씨와 정착한 마을이다. 주민들은 노랫골이라 부르고 책 속에는 노루골로 표기되었다. 망호리 일대는 몽실 마을로 거듭났다. 소호리 교회 건너편에 농어촌 인성학교가 지난해 문을 열었다. 몽실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으로 주민들이 운영하는 체험학습장이다. 지난날 깡통 들고 운산장터까지 밥 얻으러 다니던 몽실이가 이제야 이웃들에게 진 빚을 갚게 된 셈이다.
귀미에는 사과·자두·포도 등 과일밭이 즐비하다. 벚나무 가로수가 그늘을 드리우는 도로가 한가롭다. 도로 우측에 귀암정사와 생담정사 이정표가 서 있다. 몇 년 전에 복원 준공한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선생의 정자 이산정泥山亭이 멀리서 단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안동과 의성의 경계인 팽목삼거리를 지나자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다. 구계2교를 지났다.
불두화 꽃길 따라 고운사 가는 길
법계가 멀지 않은 듯하다. 도로 양옆으로 불두화가 한창이다. 뭉게구름처럼 풍성한 환대에 절로 가는 마음이 절로 환해지겠다. 경유지인 고운사 주차장에서 잠시 내렸다. 11시 30분이다. 20분 후에 출발한다기에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의 규모를 가늠케 하는 산문이 웅장하다. 사찰에서 운영하는 고운노인요양원과 새뜻한 초가집 그리고 사찰음식체험관이 차례로 보인다. 초가집엔 커다란 가마솥 두 개가 걸렸다. 그곳에서 콩을 삶고 발효시켜 청국장과 메주를 만든다. 양지바른 곳에 된장독이 반들거린다. 나직한 담장을 둘러친 장독대가 장맛을 궁금하게 했다. 잘되는 집은 장맛도 좋다고 했던가. 청국장 좋아하는 가족이 생각나서 잡냄새 없다는 청국장 몇 개를 샀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승객은 우리 둘뿐이다. 갔던 길을 돌아 나와 제 2구계교 앞에서 왼쪽 길로 접어든다. 아랫마을에서 외천까지 통틀어 구계2리다. 도로 오른쪽으로 군데군데 실개천이 바닥을 드러낸다. 들판 가운데 기울어진 상엿집이 유폐된 고대의 유적처럼 담쟁이 넝쿨에 묻혀있다. 일 년에 한 번쯤은 낯선 곳으로 가보라고 했던가. 살강마을이 가까워지자 마음에 물결이 인다. 외천교를 지나자 이내 종점이다. 고운사에서 외천까지 10분이 채 안 걸렸다.
회나무가 있는 외천 종점
종점에서 내리자 커다란 회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무 아래 정자에 앉은 사람들의 눈길이 나그네한테로 쏠렸다. 긴 머리 소녀가 상 위에 책을 펼쳐 놓고 있었고 곁에는 남자아이와 엄마인 듯한 여인이 함께 있었다. 호기심이 동했다. 듣고 보니 서울에서 휴가 받은 노암댁 (71세) 따님과 임시방학을 맞아 외가에 온 초등학생 남매였다. 원림에서 온 노암댁과 상주 함창에서 시집 온 청주한씨(70세)는 젊어 보인다 했더니 “그래도 신체나이는 팔십이 넘어 일을 못하는 찌끄레기만 여기 남았니더. 팔십 넘은 할매도 일할 수 있으면 다리를 끌고라도 다 갔니더.”라며 푸념 장단을 맞추었다. 멀리 나간 자식들 기다리며, 날마다 만나는 이웃사촌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리라.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에는 살가리를 사갈리沙葛里라고도 했다. 외천外川 동쪽 갈라산 및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고 나와 있다. 몽실이가 살던 살강마을이 바로 ‘살가리’라고 하니 모두 신기해했다. 나그네의 틈입이 신경 쓰였던지 아이들은 책을 덮고 체험 학습하러 간다며 반두를 들고 개울로 향했다. 요즘 보기 드문 정경이다. 그들의 뒷모습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회나무 그늘이 두텁다. 두 할머니가 시집왔을 때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노거수다. 정확한 수령이나 유래를 아는 사람이 없어 아쉬웠다. 오랜 세월 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마을의 모든 일을 지켜봤을 것이다. 예전엔 그네도 매었는데 새댁 때라 많이 타지는 못했다고 한다. 요즘은 그네 맬 사람도 없거니와 나무아래 정자를 지어 공간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회나무 앞으로 개울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다리가 놓였다. 건너편 언덕에 조립식 건물이 경로당이다.
마을 어른들이 정자로 모여들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일터에서 돌아오고 시내에 볼일 보러 갔던 분들도 다음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종점이 마을 입구라서 회나무 쉼터는 참새 방앗간인 셈이다. 노암댁 외손녀가 엄마와 같이 만들었다며 유부초밥과 계란초밥을 배달했다. 얌전하게 모양을 내어 정성을 쏟은 흔적이 역력했다. 노암댁은 손수 담근 오갈피 음료까지 들고 왔다. 정자 가득 앉아 있던 어르신들과 특별한 간식을 맛보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마을 어르신이 땡볕에 살가리까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다며 차를 태워주겠다고 한다. 고맙지만 찬찬히 둘러보기 위해 사양했다. 서둘러 마을 구경을 나섰다.
안동시민이 되고 싶은 사람들
외천外川은 구계동의 머리 쪽에 위치하여 ‘머리기’라고도 한다.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다. 남쪽이 고운사가 있는 등운산이고 북쪽으로 갈라산 줄기와 닿아있다. 마을 뒤로 갈라산 등산로가 나 있어 가끔 관광버스도 들어온다. 고무줄처럼 꼬불꼬불한 고무재는 마을 사람들이 안동 읍내로 장 보러 다니던 옛길이다. 골짜기엔 등산객이 다녀간 듯 산악회 이름을 붙인 노란 리본이 달려있다. 산새 소리가 유난히 많이 들리는가 싶더니 입구에 설치된 솟대도 사실적인 새 모양이었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채 씨고 다음으로 안동김씨가 들어왔다. 지금은 해주오씨, 흥해배씨, 풍산류씨, 평산신씨 등 각성바지 마을이라 할머니들은 마을시집을 살지 않아서 편하다고 한다.
스물다섯 가구에 전체 주민 수가 서른일곱이다. 서로의 집안 사정을 제 손금처럼 꿰고 있다. 마을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 54세 총각이다 보니 평소엔 아이들 구경하기가 힘들다. 제일 고령자가 82세이고 육칠십 대가 주류이니 시골치고는 비교적 초로의 노인들이 많은 편이다. 아직 마음은 청춘인 어르신들은 가까운 곳에서 스포츠댄스를 배우고 싶어 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고래 등 같은 고택은 찾아볼 수 없다. 고만고만한 개량 주택과 낡은 한옥이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돌로 지은 집과 콘크리트 블록 담을 파스텔 조로 칠한 집이 눈길을 잡는다. 개울 건너 남쪽 고샅길엔 잎담배를 말리던 황토 건조장이 고단한 노동의 역사를 증언한다. 허물어져 내린 흙돌담이 정겹다. 담장을 넘어온 연초록 감잎이 눈부시다. 잎사귀 아래 감꽃은 수줍게 웃는 산골 아이처럼 해맑다.
과거에 외천은 오지였다. 시내버스 막차가 들어오면 기사가 마을에서 자고 아침 첫차를 운행해서 나갔다. 고운사 관광객이 늘어나고 도로포장이 되면서 교통이 좋아졌다. 요즘은 안동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가 하루에 여섯 번, 의성에서는 두 번씩 운행한다. 마을 사람들은 안동시로 편입되길 원했다. 행정구역상 의성사람이지만 시장을 보거나 농협을 이용하는 등 생활은 다 안동에서 한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상수도 혜택도 받고 있다. 가뭄에도 물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응달에 묻은 수도계량기가 겨울이면 얼어 터지는 집이 많아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오랜 가뭄으로 개천이 메말랐다. 조금 흐르는 물에도 청태가 끼었다. 피라미와 버들 메기가 제법 보였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보다 민물고기가 예민하다더니 새끼를 떼로 거느린 어미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곳 사람들은 버들 메기를 ‘중고기’라고 했다. 스님들이 기거하는 청정지역에 사는 물고기라는 뜻인가 보다.
5대 독자 국가유공자의 집
개울가 빨래터 앞에 자그마한 앵두나무와 대추나무가 마주 서 있는 집으로 들어섰다. 오 남매 모두 객지로 내보내고 혼자 쓸쓸히 집을 지키는 할머니 성함은 배수노미(81세)이다. 어릴 적에 보채지도 않고 워낙 순해서 친정엄마가 지어준 이름이다. 아들을 얻고 싶은 바람이 담긴 듯하다 했더니 남동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기둥에는 문패 아래 ‘국가유공자의 집’이라고 적혀있다. 할머니는 열여섯 살에 다홍치마 입고 가마 타고 시집왔다. 5대 독자였던 신랑은 6.25 때 전쟁터에 나갔다. 떠날 때 각시 배 속에 있던 첫 딸이 다섯 살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시어른도 안 계신 시집에서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며 숱한 고생을 했다. 한 장 동안 산나물을 뜯어 고무재를 넘어 안동 장에 팔아서 좁쌀 두 되 받아 겨우 먹고 살았다. 고무재를 넘어 안동까지는 왕복 60리가 훌쩍 넘는 길이다. 몇 년 전에 작고한 할아버지는 경기도 이천 국립묘지에 모셨다. 당신도 훗날에 영감님 곁으로 갈 거라며 한때는 힘들었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다고 하신다. 신랑의 생사도 모르고 무작정 기다리며 살았던 어린 각시의 모진 세월도 지나가면 다 희석이 되는가 보다.
이 동네 사람들은 수껑 구워먹고 사나
민가를 지나 살가리 가는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청석이 깔린 개울을 바라보며 찔레꽃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개울가에 갈대도 마른 잎이 사라지고 연초록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야외에서 모처럼 김밥을 먹으니 소풍 기분이 난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다. 볕은 따가워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그늘은 시원하다. 먼 산에 빼곡히 들어선 참나무가 군무를 춘다.
개울을 끼고 논밭이 펼쳐졌다. 군데군데 정갈하게 흙을 매만져 놓은 논도 보인다. 구계리가 영양 못지않게 고추농사를 많이 한다는 말이 실감 난다. 밭고랑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밭은 넓고 길다. 그 많은 고추를 심고 수확하는 것도 큰일이겠다. 정자에서 노암 댁이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할수록 절창이었다.
“처음 시집와서 마을에 농토가 보이지 않아 대체 이 동네 사람들은 수껑 구워 먹고 사나 싶었다. 시누이한테 논이 어디 있나 물으니 저 우에, 밭은 어디 있나 물으니 또 저 우에 그랬다. 진짜 있는가 싶어서 멜롱 멜롱 뛰어다니는 철없는 시누이를 앞세워 산골짜기로 갔더니 참말로 논밭이 있더라.”
초행길이라 점을 치면서 개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산딸기가 익어도 따는 이가 없는 모양이다. 뜻밖의 간식에 정신을 팔다 보니 들쥐의 양식을 축내는 것 같아 미안하다. 안내판도 없는 허허벌판을 지나 산길을 올라가니 갈림길이 또 나왔다. 왼쪽 길로만 걸었다. 포장된 도로도 끝이 났다. 외진 산길이라 동행이 있어 위안이 된다. 몇 구비를 돌아가니 갈라산 등산로에서 내려오는 곳에 ‘살갈지 0.4km’란 유일한 이정표를 만났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높다란 저수지 둑에 올라섰다. 가뭄에도 물을 어깨까지 채우고 있다. 머지않아 산골에도 저수지 물을 빼서 정갈하게 매만져둔 논에 모내기를 할 것이다. 산 그림자가 커다란 얼굴을 비추고 소금쟁이가 물무늬를 만든다. 새소리 외에 주위는 적막하다. 고요한 사원에 온 것 같다. 저수지를 끼고 옛 마을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이어졌다. 울창한 수림 사이로 햇살이 얼비친다. 들꽃 향기가 오솔길의 정취를 더했다. 수초가 섬처럼 모여 있는 곳에서 시계를 보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저만치 회나무 정자가 보이자 어른들이 빨리 오라고 소리쳤다. 포도와 사과를 드시는 중이었다. 사과 농사하는 김시박(69세)씨는 동네 사람들에게 사과를 팔지 않고 집집이 나누어 준다며 마을에서 칭송이 대단했다. 어느 집에선 튀긴 꽁치와 약주를 들고 왔다. 왁자하게 새참을 먹으며 마을 전설을 듣는 중에 막차가 왔다. 환한 얼굴로 손 흔드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리워만 하던 살강마을이 이제는 그림으로 그려진다. 곱게 물드는 서녘 하늘처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람들을 만나 뿌듯한 하루였다.
왕재에 묵묘가 많은 까닭
이틀 뒤 오전에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외천을 찾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것도 병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김시박 씨를 만났다. 회나무 아래서 왕재 전설을 마저 들었다.
“옛날 지골에 이부자가 살았거든. 세도를 부리며 얼매나 교만했던지 형편이 모한 사람을 무시하며 너무 떵떵거렸던 모양이래. 한 날은 풍수 보는 사람이 그 집안을 마훌라고 일부러 붓 끄트메기 거치 뾰족한 낭기 서 있는 바우산을 바라보게 묘터를 잡아줬어. 그라고 나서 정말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여기 사람들은 왕재라 하는데, 거기에 아직도 묵묘가 여러 기 남아있어.”
산딸기 머루 다래 따 먹으며 학교 가던 길
바위산을 보러 가는 길에 모자 쓴 여인을 만났다. 마을 사람 같지 않아 인사했더니 서울에서 친정아버지 제사 모시러 온 신분자(55세) 씨였다. 뙤약볕 아래 혼자서 깨밭을 매고 오는 길이었다. 살강마을 얘기를 했더니 마침 오후에 산딸기를 따러 갈 계획이라며 선뜻 안내하겠다고 했다. 친정에 가서 차 한 잔 하고 가자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싶은 욕심에 따라나섰다. 그녀는 즉석에서 비빔밥까지 뚝딱 만들어 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녀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어릴 적 그녀가 살던 곳이 바로 살가리였다. 익숙한 길잡이를 따라 본격적인 살강마을 답사를 했다. 구계 초등학교에 다닐 땐 학교가 멀어서 가다가 힘들면 중간학교도 자주 했다. 개울이 넘쳐 비가 많이 와도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지금도 농로 포장은 거의 됐지만, 장마철이면 곳곳에 길이 묻힐 것만 같다. 군데군데 물놀이 할 만한 웅덩이도 보인다. 산길엔 다래 꽃이 향기롭다. 신 씨는 계절마다 산딸기며 머루 다래를 따 먹느라 학교에 오가는 데 종일 걸렸다고 한다.
왼쪽에 두충나무 숲이 나타났다. 오래전에 그녀 아버지가 심은 나무다. 그녀는 열여덟 살에 살강마을을 떠나 외천으로 이사했다. 육남매 맏이였다. 동생들 뒷바라지 하느라 중학교 졸업하고 스물다섯에 결혼할 때까지 농사를 도왔다. 개울을 건너고 우북한 잡초투성이 묵정밭을 지났다. 저만치 잡초 속에 나뭇가지 사이로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퇴락한 일자형 집이다. 방마다 문짝은 뜯겨 나가고 툇마루도 없어졌다. 벽이 허물어져 전설의 고향 세트장을 방불케 했다. 다만 기둥이 남아 있어 방앗간이며 솥을 걸었던 부엌과 방의 칸 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른쪽 끝 방에 일본에서 온 가족이 툇마루에서 풍로에 밥을 지어 먹으며 살았다. 감나무가 있는 자리에 이웃이 한 집 있었는데 저수지 안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고향 집을 찾은 신씨는 옛 추억을 더듬느라 분주하다. 토종벌을 치고 닭을 풀어놓고 키웠다. 소외양간이 있던 아래채 자리를 일러주었다. 메밀과 감자 고구마를 심었던 자리를 기억해냈다. 둑 위에 노란 돼지감자와 해당화가 피고 지던 두메산골이다. 일손이 부족하여 산나물을 뜯으러 오거나 물건을 팔러 오는 장사꾼들을 며칠씩 묵게 하며 일을 시켰다고 한다. 마당가에 있던 대추나무 엄나무는 사라지고 예전에 없던 복숭아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아마도 권정생 작가는 이 집을 염두에 두고 <몽실언니>를 쓴 게 아닐까? 몽실이네도 해방 후 거지가 되어 살강마을 어느 농사꾼 집 곁방살이를 했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몽실이가 우물 앞 대추나무 아래까지 끌려가다가 밀양댁 손을 뿌리치고 희숙이와 놀던 소꿉을 가지러 뒤란 담 밑으로 뛰어갔던 것처럼 그녀의 집에도 대추나무가 있었다. 권정생 작가 또한 해방 이듬해 일본에서 귀국하여 몽실이네와 비슷한 처지였다.
살강마을 가는 길목에 예전엔 나무 공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목재들이 부산의 판자촌을 짓는 데 쓰이기도 했다. 한 때 신씨 외할아버지도 이곳 나무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신씨 아버지를 만났다. 골이 깊어 망호리 사람들도 예전에는 나무하러 이곳까지 왔다. 외촌 사람들은 나뭇짐을 지고 고무재 넘어 읍내 장터까지 팔러 다녔다.
과거엔 저수지 물이 마르지 말라고 중복에 동제를 지냈다. 외천과 살강마을 인근에 논농사를 짓는 집들이 돌아가며 제관이 되었다. 제관은 상가에 가도 안 되고 우환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어야 했다. 못에는 물을 막고 수위를 측정하는 종이 있었다. 제사를 지내면 자라가 종위에 올라와 있곤 했다. 정월 열나흘에는 밤 11시에 갈라산에 올라가 동제를 지냈다고 한다. 작은 마을에도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풍습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며 외천에서부터 저수지까지 걸어가는데 1시간 35분이 걸렸다. 그녀 덕분에 오래도록 그리워만 했던 살강마을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해마다 오월이면
찔레꽃이 하얗게 핀 산길 들길을 되짚어 왔다. 해마다 오월이면 상복을 입고 서럽게 피어나는 꽃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오래전 날품팔이 일자리라도 구해보려고 몽실이 아버지 정씨가 터벅터벅 걸었을 길이다. 굶다가 구걸하다가 개가를 결심한 밀양댁이 방문 꼭꼭 걸어 잠그고 남들이 일하러 간 사이에 도망치듯 떠났던 길이다. 소꿉을 싼 치맛자락을 오불치고 엄마 손에 끌려가던 몽실이가 종종걸음으로 걸었던 그 길을 오늘은 내가 걷는다. 객지로 떠난 동생들 뒷바라지하느라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던 신 씨, 난세에 홀로 아이와 살기 위해 산나물을 뜯으러 온 산천을 헤맸던 배 할머니 또한 이 시대의 또 다른 몽실언니다. 몽실이가 살던 살강마을을 찾아 떠난 길, 힘든 시간을 견뎌낸 순박한 사람들을 만나며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네 삶이 오월이라고 날마다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닌 것처럼 길섶엔 보랏빛 엉겅퀴와 꿀풀이 피었다. 군데군데 백선도 꽃대를 내밀었다.
세상살이가 팍팍하다고 느껴지는가. 아직도 시골 인심이 살아있는 외천행 38번 버스를 타보라. 자연에 기대어 정을 나누는 그들에게 세상이란 도저한 강을 건너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청정한 공기와 새소리는 모두 덤이다. 사람에게 지치고 복잡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날이면 고요한 살강마을로 가라. 그곳에 가면 절로 마음이 넉넉해진다.<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1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