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선각자 혁신유림, 류인식(글/강윤정_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 본지 편집위원).jpg)
류인식은 1907년 협동학교를 세우고, 안동문화권에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킨 뒤, 1928년까지 교육구국운동, 역사서술, 사회운동으로 시대를 앞서 가며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 길은 험난했지만 류인식은 고비 고비마다 ‘민족의 시대과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창’을 열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올해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6월 한 달 동산 류인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을 담은 기획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그리고 예정대로라면 6월 12일 안동시민회관 소공연장에서 학술강연회가 열려야 했지만, 5월 하순에 시작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으로 기약 없이 미루어졌다. 평화로운 일상을 깨뜨리는 것은 전쟁과 같은 큰 일이 될 수도 있고, 작은 불씨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위기가 닥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대의를 향해 꿋꿋하게 희망을 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야말로 바로 그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1. 무너지는 나라! 깊어지는 고뇌
류인식은 1865년 5월 3일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삼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류필영, 어머니는 청주한씨이다. 뒤에 큰집 9촌 아저씨인 기영祈永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6, 7세부터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성장하여 스승 김도화金道和 아래서 학문을 닦았다. 그는 29세 되던 1893년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갔으나, 과거의 문란과 조정의 부패를 목격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귀향하였다.
2년 뒤인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여러 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류인식은 “오백 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려는 데 삼천리 강역에 한 명의 의사도 없단 말인가”, “선비는 욕을 당하여도 안 되고, 나라의 치욕을 설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며 청량산에 들어가 의병항쟁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의병만으로는 국권을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류인식은 새로운 길을 찾는 데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1903년 성균관으로 유학길에 올랐고 이곳에서 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서구의 근대사상과 학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신채호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신채호는 “영남의 학문은 개혁이 불가피하며, 서양의 학문도 마땅히 연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류인식은 이에 강하게 맞섰고, 여러 차례 토론이 벌어졌다. 어느날 신채호는 “나를 믿지 못하거든 이 책들을 한번 보라.”고 하며, 신서 몇 권을 두고 갔다. 그 가운데 류인식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다. 이 책은 중국인 양계초가 쓴 계몽사상서이며, 음빙실은 양계초의 호號이다.
류인식이 이 책으로 깨달은 사실은 우리의 학문이나 서양의 학문이나 그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서양의 학문이 사람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학문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믿어 온 것과는 다른 것이었고,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학문의 본뜻이 다르지 않다면, 지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학문은 진정 어느 쪽인가?’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마침내 그는 신학문을 통해 길러진 선비야말로 나라의 진정한 기둥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신학문을 통해 길러진 인재들이야말로 부강한 나라의 기틀이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경험은 류인식이 구국계몽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돌아온 류인식은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 설립에 매진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 “창자가 바뀌고, 얼굴이 바뀌고, 말과 행동이 전날의 내가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맺은 결실이 바로 협동학교이다.
2. 새로운 길! 그 엄청난 고통
1907년 류인식은 안동 임하 천전리[내앞]에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이듬해는 노비를 풀어주었다. 노비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는데 류인식은 이들을 놓아 준 것이다. 인류평화를 부르짖는 시대에 계급차별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류인식의 새로운 길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랐다. 협동학교를 세우자 아버지 류필영과 스승 김도화는 절연을 선언하였다. 이에 류인식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은 오히려 할 수 있으나, 어버이에게 용서를 얻지 못하면 갈 곳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비방하는 소리는 오히려 참을 수 있으나, 스승에게 버림을 당하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라며 괴로워하였다. 또 친지와 이웃들이 미치광이라고 비난하자, “친척이 꾸짖고, 이웃이 성토하고, 집안 식구와 마을 아낙네도 놀라고 성내니,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워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고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나 류인식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스승에게 긴 편지를 올려, “신학문이 인간의 도리를 어지럽히고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며, 선비들이 배워도 되는 학문임”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그는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 무렵의 그의 심정을 잘 알려주는 시詩가 전하는데, 온갖 비난을 극복하고 자신을 다잡는 모습이 담겨있다.
류인식은 세계정세 속에서 공맹[孔子·孟子]의 전통적인 학문보다는 신학문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우리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갈림길에 서 있으며, 그 현실을 헤쳐 나갈 길은 신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실 안동의 근대식 학교, 협동학교는 류인식의 이러한 절박한 시대인식이 만들어 낸 결실이었다.
안동의 선비 가운데는 점차 그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1908년부터 협동학교 운영에도 참여하였다. 마침내 힘든 과정을 극복한 협동학교는 근대 민족교육의 산실로서 큰 구실을 하였고, 이후 협동학교를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협동학교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시대에 알맞은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3. 옛 발해 땅에서 자유정신을 교육하리라
류인식은 협동학교 설립과 대한협회 발기와 교남교육회 조직에도 참여하여, 계몽운동으로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는 민중대회를 열고 “망국의 근원이 민지民智의 미개未開와 민권의 상실에 있다”고 하며 군중들과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이어 그는 옛 발해의 땅에서 자유정신을 교육하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지사들과 함께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 정착한 류인식은 한인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를 만들고 교육부장을 맡아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데 앞장섰다. ‘민지가 미개하다’고 울분을 쏟아냈던 류인식이 교육부장을 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길이었으리라. 그러나 발해 옛 땅에서 자유정신을 교육하겠다는 그의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동포들이 흉작과 풍토병으로 어려움을 겪자, 류인식은 1912년 7월 잠시 귀국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보였으나, 그는 체포되고 말았다. 붙잡혀 만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는 옥중에서 당시의 심정을 탄식하는 시, 「감탄感歎」을 읊었다.
큰 그물은 삼면의 바다를 뒤덮고
무거운 자물쇠는 팔방을 잠갔구나.
좁디좁은 천 리의 나라에
첩첩이 에워싸인 이 한 몸
이 소굴 속의 사나이는
오직 망명객 되기를 꿈꾸네.
몸은 갇혔지만 망명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있는 류인식의 심경이 잘 드러난다. 풀려난 류인식은 만주로의 재망명을 포기하고, 국내 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다시 협동학교의 일을 맡았다. 이어 1912년 무렵부터 류인식은 역사서 『대동사大東史』저술을 시작했다.
4. 무너진 나라의 역사를 쓰다!
류인식이 『대동사』의 초고를 마무리한 것은 1917년 무렵이다. 그 뒤 1920년대 전반까지 수정·보완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그는 친구들에게 이 역사서의 검토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역사 서술에 그가 얼마나 신중한 태도를 보였는지를 알려 준다.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집필 자체도 어려웠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몰래 저술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동사』는 류인식이 50대를 다 바친 역작이었다. 『대동사』 집필은 교육이 철저하게 억압당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귀중한 작업이자, 그 자체가 바로 적극적인 항일투쟁이었다.
류인식은 ‘동사東史’에 ‘대大’를 더하여 ‘대동사’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우리의 역사를 존중한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역사책에 ‘대동’이라는 제목이 쓰인 것은 대한제국기에 이르러서인데, 이 명칭은 일제강점 이후에는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대동’이라는 용어를 거듭 사용하였다. 이 역시 우리민족에 대한 강렬한 애정을 드러낸 것이다.
『대동사』는 단군에서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의 역사를 담고 있는 통사通史이다. 이 무렵에는 민족주의 역사가로 손꼽히는 신채호나 박은식도 아직 통사를 저술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1910년 국치까지를 대상으로 저술한 통사가 없다는 점에서 그 위상은 매우 크다. 분량 또한 방대하여 모두 3권 11책으로 1,728쪽에 이른다. 왜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처럼 방대한 『대동사』집필에 매달렸을까? 류인식은 자신이 『대동사』를 저술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나라가 건국한 지 반만년이 되어 예의와 무강武强의 기풍이 천하에 떨쳤는데 고유 문명이 노예 역사가들에 의해 말살되어 하나도 완전한 것이 없다. 내가 일찍이 이를 원통하게 여겨 얼마 전에 책 한 권을 모았다. (중략)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도무지 역사 관념이 없어 단군·기자·삼국이 어떤 역사인지 알지 못하고 조국정신이 나날이 없어지니 작은 걱정거리가 아니다.”
류인식은 우리의 고유한 문명이 잘못된 역사가들에 의해 왜곡된 현실을 비판하고, 더불어 청년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조국에 대한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대동사』를 섰다고 하였다. 이는 민족주의 시각에서 역사를 썼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류인식은 역사 인식은 ‘남북조南北朝 사관’으로 표현된다. 그는 단군부터 고려의 후삼국 통일까지를 북조와 남조로 나누어 우리역사를 서술하였다. 이는 단군 중심의 민족사를 영토와 겨레의 계통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남북조사관은 단순히 지역이나 방위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중심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이 밤이 너무 차구나! - 민중을 향한 새로운 꿈
1920년대 들어와 류인식은 대중을 선도하는 사회운동에 눈을 돌렸다. 이는 그가 3·1운동을 겪으면서 대중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나는 것이 그의 시詩 「차야한십절此夜寒十絶」이다.
류인식은 3·1운동 당시 병으로 말미암아 직접 나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슴이 벅차고 통쾌하다’고 3·1운동을 평가할 정도로 고무되었다. 그러나 3·1운동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하였고 이에 그는 1920년 1월 10일 밤, 화로를 끼고 홀로 앉아 좌절한 대중들을 떠올리며 시를 썼다. 모두 10절의 시 가운데 2절을 소개한다.
노동자 여러분이여! 이 밤이 차구나
勞動諸君此夜寒
얼음길 눈벌판에 총알처럼 내닫는데
氷程雪海走如丸
사천여 년 신명스런 이 겨레
四千餘載神明族
어찌 차마 다른 종족 채찍에 신음한단 말이냐
何忍呻吟異種鞭
오막살이 사는 이여! 이 밤이 차다고 한탄하지 말라
莫恨窮廬此夜寒
땅 속으로 양기 돌아온 지 이미 열흘 지났다네
地中陽復已經旬
이제 봄바람이 대지를 부채질할지니
次第春風煽大地
죽은 뿌리 마른 나무 가지에도 새움이 돋으리라
死根枯木向榮欣
류인식은 차가운 겨울 밤, 고통받는 대중을 떠올렸다. 그는 해외 동포·학자·공업인·상업인·노동자를 하나하나 불렀다. 나라 잃은 대중들의 차가운 밤, 밖은 차지만 그의 가슴엔 뜨거운 불덩이가 솟았다. 그것은 희망이었고, 그 싹은 바로 대중이었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 죽은 뿌리와 마른 가지에 새움이 돋듯이, 대중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것은 류인식에게도 새로운 변화였다. 류인식은 1910년대까지 선비[士]가 사회 변혁의 주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3·1운동을 이끌어 낸 ‘민중’의 힘을 알게 되었고, 그 뒤 남은 생을 사회운동에 바쳤다. 1920년에는 최초의 노동운동 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 설립에 참가하고, 노동운동에 앞장섰으며 이어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백정 해방운동인 형평운동에 참여했다. 또 1927년 모든 독립운동단체를 아우르는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안동에도 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계몽운동가, 역사가, 사회운동가로 시대를 앞서 가던 류인식은 1928년 4월 생을 마감하였다. 안동의 운동단체들은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의 삶은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혁신과 변화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기억 한편에 그의 자리를 마련한 것은 치열했던 그의 고민과 험난했던 실천의 길이 여전히 역사 속에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156호]
참고자료: 강윤정, 『사적에서 만나는 안동독립운동』, 지식산업사, 2013; 강윤정, 「시대의 선각자 혁신유림, 류인식」, 『역사에 길을 묻다. 혁신의 멘토 33인』, 대구경북연구원, 2012에서 가져왔으며, 작성 시 『동산문고』, 동산선생기념사업회, 1978; 김희곤, 「동산 류인식의 생애와 독립운동」, 『민족 위해 살다 간 안동의 근대인물』, 안동청년유도회, 2003; 박걸순, 『시대의 선각자 혁신유림 류인식』, 지식산업사, 2009; 사진자료제공-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