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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변천은 업장처럼 뻘을 뒤집어쓰고(글/이동백)

햇살이 따갑기는 해도 산천은 이미 가을을 맞이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성미 급한 나무는 자신의 가지에다 노란 이파리를 벌써 갈아 끼우고 있었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고 높은데, 흰 구름이 곱게 떴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을 바라보노라니, 마음 깊은 곳에서 형언키 어려운 덩어리 하나가 치받고 올라온다. 그리움 같기도 하고, 서글픔 같기도 한 것이었다. 고운 것을 앞에 놓고 이 무슨 센티멘털인가. 그것도 지명(知命)의 나이인 주제에 말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목화송이만큼이나 흰 그 구름 떼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눈에서, 나는 물기를 어렴풋이 느꼈다.

햇빛 투명한 초가을 속으로 삽상한 바람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34번 국도를 따라 청송땅 들머리인 부곡리까지 이렇게 기분 좋게 달렸다. 취재를 위해 부곡교에서 잠시 멈추어 반변천을 내려다 보았다.

부곡교 밑에서는 반변천이 온통 뻘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만치에서는 임하호가 룸펜처럼 어슬렁거리고. 지난 번 취재 때, 부곡교 근처의 반변천은 푸르고 또 푸르렀다. 그 푸른 것들을 하나 남기지 않고 칙칙한 흙이 덮어버렸다. 여름 끝에 느닷없이 엄습한 태풍, 루사 때문이다. 반변천은 이 루사에게 찢기고 할퀴고, 또 그리하는 사이에 주체 못할 물벼락을 맞은 것이다. 물벼락은 반변천에 기대어 생명을 이어가던 숱한 생명체들을 일거에 휩쓸어 가고 말았다. 존재의 가벼움을 이 생명체들은 어느 만큼 실감하면서 삶을 도모해 왔길래, 이렇게도 철저하게 무너져 버릴 수 있었을까. 좋던 기분이 싹 가시고 말았다. 입안이 마냥 쓰기만 했다.

반변천의 상처는 진보교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교각의 삼분의 이 지점을 스쳐 지나간 물은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진보교 밑으로 난 옛길을 따라 진보로 가는 강섶에 서 있는 나무들은 비스듬히 균형을 잃고 있었고, 잎사귀도 다 떨어지고 없었다. 물은 길을 넘어 한창 익어 가는 벼의 허리를 무참하게 꺾어 버렸다. 한참을 나가니까 길이 막혔다. 상류에서 떠내려온 쓰레기가 쌓인 까닭이다. 되짚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진보교 아래에는 작은 공한지가 나 있고 그 옆에는 '벚꽃 공원'이라 쓰인 팻말이 서 있었다. 잔디가 심긴 이 작은 공원에는 철봉등 운동 시설이 갖춰 져 있었다. 잔디밭이 끝나는 곳에서 옛 진봇길은 끊겼다. 1991년 현재의 진보교가 놓이기 전에 놓였던 다리가 헐리면서 길이 끊긴 것이다. 잠시 휘어들던 길은 반변천을 만나면서 칼로 베인 듯이 잘려 강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 길의 끝에는 갓길 시설물이, 하나는 누워 있고 몇은 옛 그대로 서 있었다. 끊긴 길은 강 건너편으로 이어지는데, 지금은 숲에 가려 그 자취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길은 협곡을 사이에 두고 끊겼다. 반변천은 이 협곡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반변천은 이렇게 2백여 미터를 흘러가다가 협곡을 서쪽으로 돌려세운다. 진보교 근처에 나타나는 협곡은 그 길이가 얼마 되지 않으나, 그 나름의 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도 태풍의 흔적을 업장(業障)처럼 지고 있었다. 물길이 지난 자리가 시커멓다.

반변천 언저리에 자리잡은 장터마을, 진보

진보는 반변천 언저리에 자리잡은 큰 장터 마을인데, 동으로는 영덕, 서로는 안동에 이르고, 남으로는 청송, 북으로는 영양에 닿아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사위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요새의 형국을 지닌 내륙 분지이다. 특히 마을 앞산인 비봉산, 뒷산인 북방산이 듬직하게 이 분지를 호위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안전을 얻고 있다. 또 서쪽 멀리로는 고산이 솟아 마을을 비보(裨補)하는 반면에, 동쪽으로는 황장재가 있어 동해의 기(氣)를 모아들이고 있다. 비봉산 자락에서 내려다 본 마을은 동서가 긴 장방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어서 활달하고, 야성미가 넘치지만,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안존한 맛이 있어 보였다. 동서로 뻗은 국도를 건너 마을이 장터와 맞물려 형성되어 있고, 먼 산허리를 감싸고는 큰 건물 몇 채가 들어서 있다.

외길인생 옹기장이 이무남씨

산을 내려오는 길에 이무남(李茂男)씨의 옹기 가마를 견학하였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된 옹기장(甕器匠) 이무남씨는 5대째 옹기구이를 가업으로 전승하고 있다. 그는 19세에 오직 이 곳의 흙이 좋아 상주에서 옮겨 와 45여년을 등신같이 외길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1959년에 이 곳의 오색점토(五色粘土)가 좋아 찾아든 것이 벌써 45년에 가까워지네요. 한때 열세 곳이던 옹기굴이 이제는 다 사라지고 이제 내 혼자 가마를 지키고 있자니, 내가 등신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이 업을 사명감으로 알고 해 왔지요."
이무남씨는 평생을 옹기를 굽고 살아왔지만, 화학 약품으로 된 유약을 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유약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잿물이라 쓰지요."
옹기장으로서 자존심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이씨의 말이다. 그러면서 옹기에 물을 부어 놓고 햇살에 비춰봐서 무지개 색깔이 비치면, 그것은 광명단이란 유약을 써서 만든 것이라 했다. 이런 화학 약품으로 된 유약은 때깔이 좋아 사람들이 선호하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연 유약을 써서 만든 자기의 옹기가 좋다는 소문이 나서 전라도, 강도에서까지 사러 온다고 한다.

장사가 잘 될 것이라 한 즉,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그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일꾼도 구하기 어렵고 전수자를 길러내기도 힘든다고 한다. 자기는 반년만에 배운 기술을 요새 젊은이들은 도예를 4년 전공하고 와서도 몇 년을 지나도 제대로 된 옹기를 만들 줄 모른다고 안타까워한다. 힘이 든다고 얼마를 견디지 못하고 보따리를 싸고 만다는 것이다.
"어제도 전수자로 있던 녀석이 열넉 달을 배우다 말고 야반도주를 하고 말았어요."
인내성과 장인 정신이 참 아쉽다는 말을 하고 나서는 그에게 사진 몇 장을 찍어 주었다. 그의 집 작은 정원은 옹기들로 꾸며져 있었다.

진보향교

이무남씨네의 옹기 가마를 벗어나 진보 읍내로 들어섰다. 진보 우회 도로를 건너고, 장텃거리를 궁싯거리며 지나, 반변천으로 뚫린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을 들어서면서 나는 무엇에 홀리듯, 1950년대의 이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는 나를 만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환영(幻影)이었다. 환상은 때로 착각을 사실로 인식시키는 마력이 있기는 하는 것이지만, 실은 김주영의 소설 고기잡이는 갈대를 꺽지 않는다가 그 골목으로 나를 가당찮게 이끌고 간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한 구절을 여기 옮겨 적음으로써 진보에서 받은 인상을 대신한다. 지금과는 시간적 상거(相距)가 큰 만큼 진보의 어제, 오늘의 모습 또한 판이하겠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동조성이랄지, 과거 지향적이랄지 하는 취향이 있어서 이런 내용에 관심이 자주 가는 것이다.

"교정의 서쪽에 있는 길을 나서면 긴 탱자 울타리를 낀 긴 황톳길이 있었다. 그 황톳길은 다시 북쪽 방향으로 트인 완만한 언덕길과 잇닿아 있었다. 달구지 한 대가 겨우 비집고 다닐 만한 좁은 언덕길 양편에는 옥수수나 보리를 심은 사래 긴 밭뙈기들이 펼쳐져 있었다 이 언덕길이 끝나는 곳에 갑자기 아래쪽으로 내리꽂힐 듯한 벼랑길이 나섰다. 벼랑길은 돌니가 박힌 험로인데다가 양편으로 기울기를 길 쪽으로 둔 바위들이 솟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 벼랑길만 벗어나면 햇곡머리에 함께 거둘 채소들을 심은 갯두렁밭이 나타났다. 그 갯두렁길을 벗어나면 다시 자갈밭이 나타나고 그 자갈밭 끝머리에 광덕 마을 초입에 이르는 복찻다리가 놓여 있었다. 복찻다리가 놓여 있는 반변천은 멱을 감으러 다니는 곳이었기 때문에 광덕 마을로 가는 길은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 선할 정도였다. 다만 두 개의 바위 사이로 나 있는 언덕빼기 너머의 벼랑길은 초행길인 사람에겐 가팔지기가 섬찟할 정도였다."

즐비하게 들어선 집들을 지나 반변천에 가 닿으니, 그때의 복찻다리는 헐리고, 그 자리에 번듯한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있었다. 갯두렁밭은 어림으로 짐작이 가는데, 언덕길이 끝나는 곳에 아래쪽으로 내리꽂힐 듯한 벼랑길은 어느 어름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리 위에 서서 반변천을 굽어보았다. 북쪽의 산협을 끼고 흘러온 강줄기는 진보 읍내에 이르는 곳에서 실개천 하나를 받아들이고는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마을을 둘로 나누면서 곧게 뻗어가고 있었다. 곧게 뻗어가던 강은 먼 산자락 하나를 만나면서 급하게 남쪽으로 휘어지며 사라졌다. 거무스름한 갯흙이 덮인 반변천은 진보를 지나면서 강폭을 상당히 넓히고 있었다.여기도 예외 없이 태풍의 흔적은 선명했다.

다리를 건너면 광덕 마을이다. 이 마을길을 따라 한참 들어간 곳에 진보 향교가 산자락 아래 아늑하게 서 있었다. 조선 태종 4년(1404년)에 유학의 전당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창건한 이 향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문이 잠겨서 안을 살필 수는 없었으나, 여섯 채로 이루어 진 것이, 규모가 꽤 커 보였다. 향교에서 좀 떨어진 동쪽 산언저리에는 감호소가 어렴풋하게 자리를 잡고, 서쪽으로는 작은 언덕이 향교를 옹위(擁衛)하고 있었다.

향교 앞에서는 읍내가 바로 건너다 보이지만, 눈길에 꽉 잡혀드는 것은 앞산, 비봉산이었다.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의 형상을 이루고 있어서 풍수학에 문외한인 사람의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향교 앞을 지나가는 좁다란 포장로는 언덕을 넘어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은 별로 높지 않았으나, 전방이 향교에서보다 훨씬 넓게 눈에 들어왔다. 특히 향교에서 보이지 않던 서쪽 마을이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교회의 첨탑이 솟은 이 마을은 가을볕에 한창 익어가고 있었다. 완만한 산발치를 따라 고즈넉하게 펼쳐진 마을은 어머니의 그 한없는 품안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광덕 마을에서 회정(回程)한 길은 청송교도소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 월전 삼거리에서 영덕길을 버리고 반변천의 원류를 찾아 영양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방전마을의 물난리

작은 고개 하나를 넘어서면서 진보에서 헤어졌던 반변천을 다시 만났다. 강을 왼쪽 옆구리에 끼고 길은 영양 방면으로 이어지는데, 강은 이따금씩 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타나곤 했다. 흥구교에 이르러 길은 갈라지는데 그 한 줄기는 붉은 절벽을 끼고 석보로 빠진다. 반변천도 여기서 지류 하나를 석보 쪽으로 내주고 있다. 화매천이다.

화매천은 그 상류에 삼의 계곡이란 비경 하나를 꼭꼭 숨겨두고 있다. 그러나 현재 화매천은 갈가리 찢겨진 채 널브러져 있다. 강바닥은 뒤집어 져 있고, 천변(川邊)의 과수원이며, 나락 논이며, 콩 밭들 모두가 수마에 의해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목불인견이란 이를 두고 일컫는 것인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흥구교를 건너서 만난 방전 마을 입새도 물난리를 겪은 흔적이 뚜렷했다. 물에 잠겨 버린 작물들은 검게 썩어가고 있었다. 병옥리로 들어가는 다리 주변에는 둑이 터져 포대기를 쌓아 임시로 복구해 놓았다.

병옥리의 길섶에는 가을 야생화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구절초, 쑥부쟁이, 개망초들이었다. 흰색이거나 자주색으로 피어난 이 가을꽃들은 호젓하게 피어서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든다. 이 꽃들을 망연히 바라보노라면 어찌된 일인지 마음 한 구석이 서글퍼진다. 이들 가운데 병옥리를 지나면서 눈에 많이 들어오는 것은 한 떼의 흰 꽃 무리였다. 꽃송이가 작아 안개꽃인가도 했으나 아니었고, 그렇다고 개망초꽃도 아니었다. 이름 모를 이 꽃은 노달리를 지나면서 산비탈을 온통 뒤덮고 있어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떼 같았다. 지천으로 피었으나 봄날에 피는 꽃처럼 강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나름의 소박한 멋을 지니고 있었다.

봉감모전5층석탑

노달리와 삼산리를 거쳐 언덕빼기 하나를 올라채면 곧장 입암에 이른다. 반변천은 한 구비를 돌아 입암 마을 앞으로 다가든다. 반변천 답사 코스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봉감모전5층석탑이다. 영양의 문턱 입암면 산해리 반변천 가에 자리잡고 있는 봉감모전5층석탑은 그 늠름한 자태가 주위 반변천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해 낸다. 국보 제187호로 지정된 이 전탑은 분황사 모전석탑과 똑같은 아이디어로 쌓아올린 이형(異形) 탑으로 건축적 조형미가 뛰어나다. 유홍준 교수는 봉감모전석탑은 그 자체의 건축적 조형미도 조형미이지만 주변 환경과의 어울림이 탁월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강 건너에는 떡시루 결같이 수평으로 썰린 듯한 절벽이 돌올(突兀)하게 솟구치고, 강 이편의 허전한 평지에는 이 봉감의 모전석탑이 철추를 내리듯 수직으로 곧게 뻗어 우뚝하니, 그 조화가 가히 기막힌 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안타까운 일은 1980년에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쓰인 시멘트가 허연 얼룩을 석탑의 몸체 밖으로 뿜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산해리의 복찻다리

단애(斷崖)를 이룬 전탑 건넛산은 반변천에 그 아랫도리를 성급하게 담그고 있었다. 그 단애에는 담쟁이 넝쿨이 철조망처럼 얽혀 있었는데, 그 잎에는 벌써 붉은 단풍이 들어 있었다. 어느 겨울날에 나는 이 석탑을 구경하러 온 일이 있었다, 그날 나는 이 절벽에서 펑펑 쏟아지던 석간수(石間水)가 그대로 얼어 빙벽을 이룬 것을 목격하고 넋을 놓아 버렸거니와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뒤에는 당쟁이의 붉은 단풍 때문에 설레는 가슴에 손을 얹어야 했다.

이 석탑 근처도 수마의 흔적은 깊었다. 탑의 발치까지 들어온 물은 전답을 황폐하게 만들어 놓았다. 물이 들쑤셔 놓은 강바닥은 돌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반변천은 언제 그런 수난을 당했나 싶을 정도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물길은 흐름을 멈춘 듯이 숨죽이고 있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발길에 밟히는 돌들이 서로 부딪혀 내는 소리가 정적에 휩싸여 적막한 반변천의 존재를 일깨워 줄 뿐이었다. 가을의 이미지 때문인지, 저녁 어스름 때문인지, 아니면 숨죽인 강 때문인지 반변천에 서서 바라본 석탑은 적잖이 쓸쓸해 보였다.

모전석탑을 끝으로 취재는 얼추 끝난 셈이다. 지름길인 임동면 위동으로 이어지는 길을 잡아 회정(回程) 길에 올랐다. 산해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반변천에 놓인 다리는 폭이 좁은 복찻다리였다. 이 다리에는 물이 넘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았고, 다리 아래쪽 천변을 따라 일구어 진 전답들에는 돌자갈이 뒤덮여 전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포크레인 한 대가 돌자갈 밭으로 변해 버린 논을 복구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 움직임은 굼뜨고 그 덩치는 한량없이 작아 보였다. 인간은 자연 앞에 어쩔 수 없이 굼뜨고,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자연이 마냥 두려울 뿐이다.
반변천의 작은 지류인 동산천을 따라 달리는데, 석양빛이 개선 장군처럼 저만치 고갯마루를 저벅저벅 넘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