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말리는 가을의 빛은 널려진 고추와 옥수수와 감과 낟알위에 내려
그것들의 습기를 증발시키고 그것들의 내면의 색깔을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그 빛들은 마른 가을강변을 어슬렁거리는 인간의 감추어진 운명이나
상처까지도 그 양명한 광선속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어서
축축하고 질퍽거리는 곳에서 물기에 의하여 빚어지고 태어나서,
눈물과 욕망의 분비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몸둘 곳 없게 한다.
<김훈의 '풍경과 상처' 중에서>
가을 빛(글/권세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