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내용

친정에서 맞는 아침(글/권은정)

눈을 떠보았다. 천장이 매일 보던 것은 아닌데 그보다 더 낯익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엄마의 자개농이 보인다. 비스듬히 열린 장롱 문으로 색색의 이불도 보인다. 아, 여기구나. 나는 친정 안방에 누워 있는 것이다. 주방에서 두런두런 아버지 어머니의 얘기소리가 들린다.

“오늘 관리실에서 약 친다고 했는데 우리 어디로 피해야 안 될까 싶네요.”
“그럼 우리 어디 드라이브 가까?”

간간이 그릇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두 분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어제도 그제도 아니 오랫동안 계속 여기 이렇게 있어온 것 같다. 창문으로 아침공기가 상쾌하지만 나는 마음놓고 다시 이불 속으로 고개를 파묻는다.

아무리 전국이 하루거리라 하지만 친정에 가는 길은 멀다. 온갖 일과 핑계와 사정이 번번이 마음을 막아 친정 행은 일년에 고작해야 손에 꼽을 만한 횟수이다. 그러나 번번이 귀한 시간이다. 친정에 가는 길은 시간을 거슬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건 좀 이상스러운 느낌이기도하다. 원래 살아야하는 집을 멀리 떠나 있다가 오랜만에 가서 느끼는 감정, 아마 죄책감 같은 것일 게다. 서가의 오랜 책들은 어디 갔다가 이제 왔느냐고 내게 묻는 듯 하다.

‘내가 살던 집’에 오면 으레 밤중까지 이 방 저 방 서성이며 잠들지 못한다. 오래 못 본 것들과의 재회 때문이다. 그 중에는 이제는 누구의 방도 아닌 방안에 서 있는 장롱을 만나는 일도 들어 있다.

아마 내가 중학교 다닐 때였지, 분홍색의 작은 꽃무늬가 전체를 뒤덮고 있던 그 하얀 장롱이 들어오던 날 얼마나 좋아했던지! 긴 서랍이 주르륵 달린 서랍장은 정말 우리에게 딱 맞는 것이었다. 원래 딸이 다섯이었으나 큰언니가 일찍 시집을 간 탓에 넷으로 남은 우리는 서열별로 서랍을 하나씩 차지하였다. 편하게 서서 옷을 꺼낼 수 있는 제일 위 칸은 둘째 언니차지, 그 다음은 셋째와 넷째, 제일 아래 칸은 막내. 별로 크지 않은 서랍에 옷들을 쟁여 넣느라 낑낑거렸지만 꽃무늬 장롱은 우리 모두에게 ‘나만의 장롱’이 될 수 있었다.

이제는 누런빛으로 변하고 귀퉁이마저 떨어진 그 서랍을 한밤중에 열었다 닫았다 해보았다. 칸칸이 빼곡하던 옷들은 주인을 따라 가버리고 이제는 엄마의 철지난 옷 몇 가지 들어있을 뿐이다. 우리의 빈자리를 너는 잘도 지키고 있구나, 나는 가만히 장롱을 쓰다듬어 준다.

빈자리를 지키는 게 어찌 ‘오래된 가구’뿐이랴. 손때 묻은 책이나 사진들도 있다. 결혼하면서 자기 물건들을 챙겨온다지만 내 책이나 사진들은 여전히 친정에 있다. 어쩐지 그 물건들은 내게 속해 있다기보다 그 곳에 있어야 될 것 같아서다. 아버지도 그렇게 여기시는지 필요한 책을 한두 권 챙길라치면 옆에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말이다. 사람들이 책을 빌려가서는 다시 가져 놓는 일이 없거든. 너는 그 책 다 보거든 여기 제자리에 갖다 놓거라.”

밤이 깊어지면 살며시 불을 켜고 앨범을 뒤적거려본다. 그 안에는 엄마가 내 나이였을 적의 모습이 있다. 대추나무 꽃이 피던 마당에서 살던, 내 딸만한 나이의 내 모습이 들어 있다. 늦은 밤 하릴없이 지난 세월을 들추는 내가 우스워질 때도 있지만 사진 속으로 들어가 한참이나 나는 나올 줄을 모른다.

친정에 가서는 시간의 흐름을 막고 싶은 마음이 더하다. 엄마 옆에 누우면 더욱 그러하다. 익숙한 엄마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 버린 시간의 수많은 막대들을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나는 다시 어린 딸로 돌아와 있지 않을까? 빙 둘러 지나온 시간은 한 번 더 원을 그려주지 않을까? 변함없는 저 방의 장롱처럼, 나도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까, 별안간 눈가가 뜨거워진다. 엄마의 굽은 등과 오래된 장롱 때문에 한밤중에 혼자서 나는 돌아눕는다.

각자 시간에 쫓겨 친정에 가는 게 여의치 않다고 하다가도 ‘앞으로 얼마나 더 뵐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하는 말에 핑계는 모두 무너진다. 나이든 어른들의 시간을 짐작해본다. 갈 적마다 두 분 어른의 키는 한 뼘씩 줄어든 것 같고 기력은 더욱 약해지신 것 같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의 힘이여. 하지만 정작 그 시간 안에는 ‘아직 젊은’ 나도 들어있다. 장마 진 강의 물살 같은 그 안에 우리 모두 함께 실려 가는 것이다.

‘오늘’이 흘러 다시 오지 못함은 차라리 신기한 일이다. 이른 아침 잠결에 문득 지난 시간들을 더듬느라 감상적이 되기도 하지만 그 놀라움은 때로 실질적이기도 하다. 내 앞에 있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깨우침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내 옆에 살고 있는 이들을 새삼스레 다시 쳐다보게 만든다. 잘해줘야지, 살갑게 대해야지 하는 다짐을 한다. 그게 잘 지켜지지 않아 탈이긴 하지만.

‘야가 그만 일어나야 되는데, 좀 일나라고 해보소.’
밥상을 차리시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부탁하신다. 안방으로 오시는 아버지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더욱 꼭 감는다. 아버지는 앞으로 몇 번이나 나를 더 깨우러 오실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렇게 어린 딸로 늦잠을 잘 수 있을까. 오늘만의 아침햇살이 벌써 방안에 들어차 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