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샘 ′안동′(글/안동mbc)달은 하나이되, 그 빛은 수천가지 강에 어리듯 안동은 낙동강의 유구한 흐름을 따라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의 정신적 중심이 있다. 그것은 바로 퇴계 이황이다.
그의 삶과 사상은 커다란 구심이 되어 수세기에 걸쳐 울리고 울리며, 조선시대 지방문화의 굳건한 주춧돌이 되었다.
조선시대, 중앙문화와 쌍벽을 이루며 지방문화의 뿌리깊은 샘으로 성장해온 안동문화… 그 힘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우리는 과거 500년의 역사 속에서 그 원동력을 찾아보고자 한다.
안동을 바라보는 새로운 키워드-안동학
눈이 시리도록 푸른 와이키키 해변…, 태평양의 보석같은 섬, 하와이다. 세계적인 휴양지인 이곳은 올해로 한국인 이민 100주년을 맞이했다. 그 역사만큼이나 이곳의 한국문화는 뿌리가 깊다. 해외에서 한국학 연구 역사가 가장 깊은 하와이주립대, 1972년 외국대학 부설기관으로는 처음으로 한국학 연구소를 설립했다.
현대식 건물속에 자리잡은 푸른 단청의 한국 전통양식이 이채롭다. 전 세계대학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본 떠, 지은 건물이 한국학 연구소다. 이 건물이 풍기는 위엄은 하와이에서 차지하는 한국문화의 비중과 한국학의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최근 하와이대 한국학 연구소는 안동의 가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안동대학과 함께 이른바 ‘안동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지원이 아닌, 자체 예산을 들여서 안동을 연구하고 책을 펴내고 있다.
지역학이 보편화되지 않은 현실에서 ‘안동학’에 관한 공동논문집을 영문으로 발간해 국제적으로 안동학을 알리는데 톡톡히 한 몫을 할 계획이다.
이 일을 주도적으로 벌여가고 있는 사람은 한국학연구소, 에드워드 슐츠 소장이다. 그가 안동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세월 쌓아온 문화적 토양위에, 퇴계의 학문과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독특한 지방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곳, 안동. 우리의 역사 속에서 가장 성공한 지방문화의 표본으로, 안동문화를 스펙트럼 해 분석하고자 한다.
혈맥과 학맥으로 형성된 네트워크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은 ‘영남지방의 퇴계학맥도’를 완성했다. 퇴계 이황 이후부터 영남지방에 이어져 온 퇴계학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는 퇴계학파의 사제관계가 일목요연하게 나타난다. 퇴계에서부터 근대 학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715명의 이름이 망라돼 있다.
도덕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성리학을 정립하고, 일생동안 인본주의 사상을 몸소 실천해 보인 퇴계선생… 그의 학문과 삶은 당시 조선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주는 하나의 비전이었다.
퇴계학맥도에는 퇴계 이후 형성된 영남학파의 중심 계보를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네 배열로 보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사제 관계가 이어지고 이렇게 뻗어간 퇴계의 학맥은 500년을 아우른다.
퇴계학파 4대 계보의 중심 인물들은 각 문중을 중심으로 이른바 동성마을을 형성했다. 퇴계 가문의 진성이씨가 모여서 토계에 마을을 일궜고, 내앞마을로 알려진 천전리의 의성 김씨, 물돌이 마을에 뿌리를 내린 하회 류씨를 비롯해서 안동권씨, 전주류씨 등 같은 성씨끼리 모여 집성촌을 이뤘다.
그러나 이들 문중은 서로 빗장을 걸어두고 문을 닫고 산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해 감으로써 문화 동질성을 키워 나갔던 것이다.
가문과 가문은 사제관계를 맺어 학문적인 교류를 계속해 나갔고 서로가 혼인을 통해 떼려야 뗄 수 없는 탄탄한 공동체를 이뤄갔다.
혈연적인 결속을 위해서 좋은 가문을 골라, 혼인하는 것은 그 집안의 가장 큰 일이었다. 퇴계의 집안에서도 인근 마을의 의성 김씨, 하회류씨 집안과는 누대에 걸쳐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안동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먼저 통성명을 하고 본이 어디며, 몇 대 손인지 물어보는 게 일반적인 수인사 방식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뿌리가 어디인지를 밝히면서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사람들간에 깊은 연대감을 느끼게 된다.
퇴계를 중심으로 한 학맥은 정신적인 결속력이 되고 혼인을 통한 가문과 가문의 결합은 현실적인 결속이 돼 독특한 지역문화권을 형성하는 밑바탕이 됐다.
지방교육의 중심이 된 곳은 바로 서원이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지역의 인재를 응집시키는 첫 시발점이 됐다. 이곳에서 출발해 전국적으로 서원이 확산됐고, 특히 안동문화권의 서원 수는 전국 최고였다.
지역 내의 문중 후손들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선비들은 서원의 기숙사에 머물면서 공부를 했다. 중앙의 성균관이나 지방의 향교 같은 공립 교육기관이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서 입시위주의 교육을 폈다면, 서원은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선비양성에 목적을 두고, 보다 폭 넓고 자유로운 교육을 펼쳤다.
이렇듯 수준 높은 교육은 개인의 지적역량을 높여 주었고, 동시에 주변의 인재를 끌어들여 인적 자산의 양도 늘려갔다. 이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거대한 학맥을 형성시켰고 이 학맥을 바탕으로 다시 혈연관계가 맺어지는 순환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오늘날의 네트워크와 맞먹는 강력한 연대력을 발휘했다.
서원이 직접적인 교육을 통해서 힘을 결집시켰다면, 책은 간접적이지만 훨씬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안동에서는 활발한 출판사업을 통해 지식을 재생산하고 보급했다.
안동지역이 강력한 지방문화의 힘으로 자리잡게 된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출판작업이었다. 서원과 같은 교육기관 뿐만 아니라, 일반 문중에서 자체적으로 책을 펴냈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봉종택의 운장각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수백개의 장판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전주류씨나 한산이씨 등 각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장판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 장판을 이용해 수많은 문집을 찍어낸 것이다.
『대계선생 문집 간역시 일기』
작은 퇴계라 불리던 대산 이상정의 문인인 대계 이주정의 문집을 펴내면서 쓴 일기로,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희귀본이다. 여기에는 대계문집을 간행하는데 들어간 기간과 경비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대계문집은 모두 3책으로, 목판 140장을 만들었는데, 전문가 2명이 간본 글씨를 쓰고, 동시에 교정을 봤으며, 각수 3명이 판목을 새겼다. 당초 3년을 예상했지만, 2년 반만에 완성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필요 경비는 얼마였고, 어떻게 마련했을까? 후손가와 문중에서 거출됐으며, 일부는 타 문중에서 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30민전, 즉 3천냥을 선급금으로 주었는데, 판 한장의 가격을 2(두)냥 8(팔)전으로 계산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당시 남자노비 한명을 들이는 몸값이 열 냥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40명의 노비를 한꺼번에 살 수 있는 거액이 문집을 만드는데 투입됐던 것이다.
이렇듯 엄청난 재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출판작업을, 개별 문중에서 끊임없이 벌여왔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 어마어마한 작업은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됐다. 지방의 왕성한 출판작업은, 지식을 생산해 확산시키고 분산된 정보를 결집시킴으로써, 지식정보 공동체를 만드는 밑거름이었다. 이러한 지식정보 공동체의 형성이, 바로 지방문화를 이끌어가는 힘이었던 것이다.
서원과 출판작업 같은 직,간접적인 교육을 통해서 안동은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내는 인재양성소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지역사회의 근간으로 성장해 갔다.
퇴계는 그의 문하생이었던, 이웃마을의 후조당 김부필에게 이러한 글을 남긴다.
"후조당의 주인은 본래 절개가 굳은 사람이니. 벼슬을 제수한다는 첩지가 이르러도 마음은 기쁘지가 않네. 빙설 같은 향기를 풍기는 매화를 마주 대하고 앉아 도가 있는 곳을 목격하고는 시 읊기를 그치지 않네"
김부필은 스승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벼슬을 거부하고 고향에 남기를 고집했다. 퇴계는 그러한 김부필을 가리켜 절개 굳은 매화로 표현한 것이다.
김부필을 비롯해서 안동의 권호문, 이숙량은 퇴계 문하의 3대 처사로 꼽힌다. 처사의 삶이란 무엇인가?
관료 지식인 사회였던 조선시대, 중앙의 벼슬길은 지식을 무기로 권력과 부에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처사는 이러한 서울의 삶을 마다하고 지역에 뿌리를 둔 삶으로 일관한다.
벼슬을 바라기보다는,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닦고, 후학을 길러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기반을 둔 지역사회에 실직적인 책무를 다하는 길이었다. 이러한 처사적 가치관이야말로 지역힘의 또 다른 원천이었던 것이다.
안동의 선비 가운데 상당수는 자부심 가득한 처사의 삶을 걷는다. 이는 안동이 많은 인재를 배출해 낼 수 있는 기반이 된 동시에 선비정신의 뿌리가 됐다.
경당 장흥효는 처사의 삶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책상 머리에 항상 커다란 경(敬)자를 써 붙이고, 그것을 생활의 신념으로 삼았다.
당시에는 학문과 인품이 뛰어나면, 유일로 천거돼, 과거를 보지 않고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유일로 천거되는 것은 어쩌면 과거급제보다 더 큰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경당은 유일로 천거되는 것조차 싫어서, 일부러 과거에 응시하고 고의로 낙방했다. 그러한 그의 학덕을 보고 많은 문인들이 몰려들어서, 한때, 그의 제자는 3백명이 넘었다고 한다.
경당 장흥효는 학봉 김성일의 학문을 잇고, 그의 외손인 이휘일과 이현일 형제로 학통이 이어지면서 퇴계학맥은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퇴계를 기점으로 한 학맥과 문중간의 혈맥을 통해서 안동문화권은 강력한 지역망을 형성했다. 그리고 조선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해서, 조선 500년 동안 안동은 중앙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견제하는 지방 세력권으로 위치할 수 있었고,그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인간중심의 도덕적 풍토, 지역에 스며들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탈춤이다. 모두 열 마당으로 구성된 하회탈놀이의 절정은 『양반선비마당』이다. 서로 문자를 써가며 지체와 학식을 자랑하던 양반과 선비는 초랭이와 할미에 의해 위선이 탄로나고 웃음을 사게 된다.
현실에서 가장 차별받는 신분인 초랭이와 할미의 적나라한 풍자는, 양반이나 선비도 결국 같은 본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며, 사회의 모순을 풀어내고 있다.
하회탈놀이가 이토록 오래도록 사랑받으며 전승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분의 차이가 엄격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하회 탈놀이는 양반층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놀이 자체는 놀림의 주 대상이었던 양반층의 지원으로 펼쳐졌다. 하회탈놀이는 사회의 갈등, 즉 잘못된 ‘탈’을 한바탕 웃음으로 모두 털어낸다. 대립관계에 있던 상층과 하층 계급이 서로를 수용하며 조화를 이뤄왔던 것이다.
영주시 순흥면 배점마을…이 마을 사람들은 배순이라는 대장장이를 동신으로 들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동제는 450년동안 단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퇴계의 제자들을 기록한 『도산 급문 제현록』에 배순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런데, 배점으로 표시된 그의 이름은 다른 사람의 이름보다 한 글자 낮게 적혀 있다. 퇴계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반상의 구분이 엄격한 조선시대, 어떻게 해서 그는 퇴계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배순은 효성이 지극하고 부지런한 대장장이였다. 그의 꿈은 공부를 하는 것…
그러나, 천민출신이었던 배순에게 공부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퇴계가 소수서원에서 강회를 할 때, 그는 매일같이 강당 귀퉁이에 숨어 귀동냥을 했다.
그러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퇴계선생이 결국 배순을 다른 생도들과 함께 앉아 글을 배우도록 했다. 퇴계가 죽자 배순은 손수 스승의 철상을 만들어서 살아있을 때처럼 모셨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과 임금의 삼년상까지 지낸 배순은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유교이념을 모범적으로 실천했다. 그러한 배순의 인물됨을 순흥지역의 유림들은 높이 평가했고, 죽은 뒤엔 국가의 표창인 정려비까지 받게 했다. 이후 배순을 드높이고 본받으려 한 배점마을은 유교이념을 잘 실천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배순을 제자로 받아들인 퇴계의 인간존중 사상은 당시 큰 영향을 끼치며 지역사회에 스며들었다. 퇴계에서 비롯된 인간 존중사고가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 계층간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고, 뿌리내리게 한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는 동규나 동약, 향규, 향약과 같은 왕성한 자율규범이었다.
16세기 중엽, 퇴계가 만든 예안향약은 중국 향약이 아닌 우리 실정에 맞는 최초의 독창적인 향약이었다. 지켜야 할 덕목을 28개 조항으로 나누고, 각 조항별로 형벌의 정도를 분류했다.
부모에게 불순한 자는 극벌에 처하고, 이웃과 화합하지 않는 자는 중벌에 처하며, 좌중에서 다투는 자는 하벌에 처하는 등 매우 구체적인 생활 기준을 담고 있다.
재난을 보고 힘이 미치는 데도 가만히 있는 자 역시, 형벌의 대상이 됐다. 도덕을 강조하면서도 경제적인 구제와 같은 일반 민중의 절실한 삶의 문제까지 포괄하고 있다. 다양한 항목이 벌칙위주로 편성돼 있고 행정력에 버금가는 자치권한이 부여돼 있어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향약은 법률보다 더 강력한 윤리규범으로 지역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적용돼 갔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계모임인 안동의 우향계…
조선 초, 안동권씨, 고성이씨, 흥해배씨, 안강노씨, 영영남씨 등....지역의 대표적인 다섯 문중이 향촌사회를 교화해 나가기 위해 만들었는데, 무려 5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재연되고 있다. 우향계 역시 향촌사회의 규율을 정한 일종의 향규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이 같은 자치규약은 중앙의 일률적인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이상적인 지방사회를 만들어 가도록 했다. 사람들은 예의와 염치를 알게 되고, 사회는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안동의 자치규약은 전국에 전파됐고, 상하층 계급을 하나로 묶어내면서, 조선시대 강력한 사회접착제 역할을 했다.
선비정신 그 비판과 참여
최근 한국국학 진흥원은 위탁받은 문중 유물들 속에서 아주 귀중한 문서를 발견했다. 영남 만인소… 100미터 가까운 길이에, 무려 만432명의 이름이 적힌 상소다.
1855년 철종 초,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신원을 요청하기 위해서, 만명이 넘는 영남 유생들이 목숨을 걸고 집단적으로 이름을 적어 올린 것이다. 산재해 있던 문중의 수를 감안하면 전 영남유생이 총 동원되다시피 한 것이다. 이 만인소가 올려진지 사흘 만에 임금은 비답을 내렸고, 사도세자는 왕으로 추숭됐다.
재야에 있던 유림들의 집단적인 항의와 요구는 중앙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큰 힘을 발휘했다. 이..., 지방의 여론을 주도하는데, 안동의 역할은 대단했다.
의리를 중시하는 안동의 선비정신이 늘 중앙권력의 부도덕과 부정의를 비판해오면서 재야 여론형성의 중심축이었던 것이다.
26년 뒤인 고종 18년, 또 한번의 영남만인소가 올려진다. 사도세자의 신원을 위한 만인소는 퇴계 후손인 이휘병이 주도했는데, 이번에는 그의 아들 이만손이 개화정책을 반대하는 소를 올리기 위해 영남 유림들 앞에 섰다. 역암 강진규의 문집에는 이만손이 소두가 된 영남 만인소를 기록하고 있다.
1880년, 도산서원에서 영남 전역에 통문을 발송하면서, 영남만인소 운동은 시작된다. 이 운동은 유림들의 호응을 얻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대의명분을 중시했던 영남유림들은 기존 질서를 붕괴할지도 모르는 외세의 침략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구한말 영남만인소 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시발점인 의병운동으로 그 정신을 이어가게 된다. 안동향교…198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갑오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에서 한말 최초의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한국독립운동사의 시작이요, 한민족의 끊임없는 독립투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10년,마침내 주권을 빼앗겨 나라를 잃게 되자, 당시 안동에서는 죽음으로 일제의 통치에 항거한 자결자가 속출했다. 퇴계 11대손인 이만도와 그의 조카인 이중언은 단식으로 숨을 거뒀고, 하회의 유도발, 유신영 부자는 2대에 걸쳐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자결 순국한 사람은 모두 10명… 안동은 전국에서 순국자가 가장 많은, 비장한 역사의 기록을 남겼다.
한편, 상당수의 혁신유림들은 식민지 땅을 떠나, 망명이라는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한다.임청각: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9명의 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야말로 독립운동가의 산실이다. 석주는 400년 전통을 잇는 가문의 종손 자리를 박차고, 항일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직계종손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고성이씨 임청각 종손인 석주 이상룡…내앞마을 의성김씨 문중의 김대락, 김형식, 김동삼…100여 가구, 500명의 망명행렬이 줄을 이었다.
나라가 죽은 격변기, 안동에는 연일 자결자의 장례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간도로 떠나는 망명행렬이 계속됐던 것이다. 나라가 망한 모습이 이 이상으로 어떻게 더 비참할 수 있을까?
서간도로 떠난 안동출신 인사들은 이상룡, 김동삼을 중심으로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맨손으로 황무지를 개간해 초기 동포 자치조직인 경학사를 설립하고 백두산 기슭에 백서농장을 설치해 독립군을 길러냈으며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이끌었다. 이상룡은 내각제로 개편된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까지 맡게 된다.
만주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은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지낸다. 1923년 1월 19일자 신문에는 국민회의 임시의장에 김동삼이,부의장에는 안창호와 윤해가 각각 선출됐음을 알리고 있다. 해외 독립운동사에서 안동인들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운동에서도 안동은 특별한 활동을 보인다. 명문가의 자제이면서 백정해방운동에 앞장섰던 김남수…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태두로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맡았던 김재봉, 6.10 만세운동의 주역, 권오설, 그리고 저항시인 이육사까지 모두 안동의 선비정신을 이은 세대들이다.
특이한 것은 이처럼 민중적 성격의 운동을 대부분 퇴계학맥을 이어받은 양반출신들이 앞장서 펼쳤다는 것이다.
퇴계학에서 비롯된 성리학적 의리정신은 독립운동으로, 퇴계가 남긴 인본주의.평등사상은 사회주의 운동으로 승화됐다. 의병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 순국지사가 가장 많은 곳, 독립 운동가가 가장 많이 배출된 곳이 바로 안동이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안동이 유별난 활동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수백년 뿌리깊이 내려온 안동의 역량이 위기의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표출됐기 때문이다.
고성 이씨 문중의 대종택, 임청각…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9명의 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야말로 독립운동가의 산실이다. 석주는 400년 전통을 잇는 가문의 종손 자리를 박차고, 항일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직계종손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여파로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임청각은 폐허나 다름없이 변해 버렸다.
일제의 중앙선 철도공사로, 아흔아홉칸의 허리가 잘리는 수모를 겪으면서,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의 품격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런, 임청각에 다시 생기가 감돌고 있다. 후손들이 집을 말끔히 단장하고, 기거를 시작한 것이다. 현재 임청각은 직계 후손들에 의해 국가 헌납이 시도되고 있다. 임청각은 개인재산도 문중재산도 아닌, 국가의 재산으로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로써, 임청각은 민족정기를 함양하는 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선조들의 정신을 잇는 한 가문의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맥박을 멈추지 않는 안동정신을 엿보게 한다.
안동은 통일신라 불교의 전진기지로, 또 고려건국의 토대로, 나름대로의 문화적 역량을 길러오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지방문화의 구심점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된다.
여기에는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 퇴계 이황의 학문! 그리고 도덕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일생동안 이를 실천하려고 했던 그의 삶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퇴계의 사고와 행동은 지위보다는 덕행을 중시하고, 예절과 의리를 생활 윤리로 존중하는 풍토를 지역에 뿌리 내리게 했다. 결국 학맥과 혈맥으로 얽힌 수평적인 연대와 도덕적인 정신가치로 모든 계층을 하나로 엮은 수직적 연대가 독특한 지방문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안동문화는 조선조 중앙으로부터 수백년 독자성을 유지해 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과거, 안동문화가 지방문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해 보았다. 시대를 통찰하는 비전이 있었고, 상하, 종횡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구조를 바탕으로, 서로를 인정하며 힘을 결집시켰다. 이는 오늘날 새로운 지방문화 구축을 위한 중요한 실험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안동>
***안동MBC 창사33주년 특집다큐멘터리로 제작방송되었던 ‘천년주초’를 재정리하여 실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