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청송의병이 남긴 진중일지, 적원일기(글/김희곤)청송지역 의병기록 적원일기(赤猿日記)
의병항쟁은 한국독립운동의 서장이었다. 한국독립운동이 1894년에 시작하여 1945년 해방에 이르는 51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의병항쟁이 그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1894년에 안동에서 갑오의병이 일어났고, 이어서 1895년 말에 다시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1896년 중반까지 집중되었다. 이 시기에 경북북부지역 전체 지역에서 의병항쟁이 전개되었는데, 따라서 안동,영해,봉화,예천,청송,점촌,의성 등 지역마다 이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다. 이번에는 청송지역의 의병 기록인 <적원일기(赤猿日記)>를 통해 1896년의 청송과 안동을 여행하려 한다.
우선 일지의 이름부터 짚어보자. ‘적원(赤猿)’이란 말이 참 묘하다. 붉은 원숭이라는 뜻이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어릴 적에 원숭이 똥구멍이 빨갛다고 노래야 불렀지만, 그렇다고 성스런 전투기록의 제목이 붉은 원숭이라니 조금은 우습기도 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은 연대를 표시하는 간지(干支)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간지는 10간과 12지로 구성되는데, 이것이 어울려 만들어지는 60년을 1갑으로 잡는다. 그런데 옛날에는 고갑자(古甲子)가 사용되다가, 여기에서 요즈음 사용되는 새로운 갑자가 만들어졌고, 또 별칭도 나타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별칭에서 나온 이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적원’이다.
오행(五行)을 더듬어 보면, 거기에 방향에 따라 색깔과 물질을 달리 표현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동쪽 청(靑, 木), 남쪽 적(赤, 火), 중앙 황(黃, 土), 서쪽 백(白, 金), 북쪽 흑(黑, 水)이 그것이다. 여기에 10간을 대비하면, 동쪽의 청이 갑?을, 남쪽의 적이 병,정, 중앙의 황이 무,기, 서쪽의 백이 경,신, 북쪽의 흑이 임,계가 된다. 따라서 ‘적원’에서 적은 병,정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글자인 ‘원(猿)’의 의미를 살펴야 한다. 이것은 12지 가운데 원숭이띠가 되는 신(申)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적과 원을 연결시켜보자. 병과 정 가운데 뒤의 신(申)과 어울리는 것은 무엇일까? 10간과 12지가 만날 때 규칙이 있다. 짝수는 짝수끼리, 홀수는 홀수끼리만 만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12지 가운데 申이 아홉 번째이므로 홀수이고, 따라서 10간 가운데 세 번째인 丙과 만나게 된다. 따라서 ‘赤猿’은 ‘丙申’, 즉 1896년이라는 말이니, 이 기록은 곧 1896년에 일어난 청송지방의 의병항쟁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인 셈이다.
이 일지가 쓰여진 시기는 1896년 3월 2일(음 1월 19일) - 5월 25일(음 4월 13일)까지 85일 동안이다. 몇 사람의 서기에 의해 진중에서 기록된 것인데, 대장을 맡은 소류(小流) 심성지(沈誠之)를 중심으로 활동을 펼친 청송의병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청송의병의 결성과 해산
전기의병은 1894년의 갑오의병과 1895년부터 1896년까지 전개된 을미?병신의병으로 구성되었다. 전자는 1894년 6월에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공격하기 이틀 전에 경복궁을 강제 점령한 폭거가 발행하자 이에 항거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1895년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단발령이 시행되자,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것으로 양력 1986년 1월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1896년부터 정부에서 양력을 사용하였는데, 양력 1896년 1월 1일은 음력 1895년 11월 17일이다)
안동에서 첫 의병인 갑오의병이 1894년에 일어났다가 잦아들었다. 그러다가 양력으로 1896년 1월 중순에 다시 의병항쟁이 일어났으니, 음력 1894년(을미년) 12월 초였으므로 을미의병이라 불린다. 이를 출발점으로 예안,영양,진보,의성,봉화,영주,청송 등 주변 지역으로 의병항쟁이 확산되어 갔다.
청송의병은 주변에 비해 약간 늦은 3월(양력)에 시작되었다. 안동보다는 약 50일 정도 늦게 시작된 것이다. 때문에 안동의진에서 무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청송군 관아의 무기를 압류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고, 이에 자극을 받아 청송에서는 의병을 일으키는 데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이 일지는 청송의진이 사실상 끝나던 5월까지를 기록하였다. 고종의 해산령을 명분으로 삼고 해산하였는데, 겉으로는 해산한 것처럼 위장하지만 실제로는 소규모로 분산하여 내실을 기하며 유사시에는 서로 조응하는 것을 계책으로 삼는다고 방향을 정하면서 진(陣)을 나누었다. 이것은 사실상 청송의병의 해산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산발적인 항쟁 사실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주변의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기록들
이 일지는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을 많이 전해준다. 우선 안동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서 의병이 속속 결성되었지만, 한 달이 넘도록 청송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않자 문제가 발생하였다. 안동의병이 청송군 관아에 들어있는 무기를 확보하려 나선 것이다. 그래서 파견된 소모장 유시연과 청송 인물들이 청송군 관아의 무기를 둘러싸고 옥신각신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 있다,
상부기관인 안동부에서 파견된 소모장이었으므로 무조건 반대하지도 못하고, 그러면서도 그냥 내놓을 수도 없어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유시연과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청송 유림들은 안동 소모장이 그렇게 강요하고 나서는 근본 이유가 청송에서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청송 유림이 급박하게 의병을 결성하고 나선 것이다.
다음으로 청송의병의 결성과정에서 대장을 천거하고 지휘소를 마련하는 장면을 알려준다. 파천면 덕천의 심성지를 대장으로 천거하고 청송의 객사에 지휘부를 두었으며, 객사 바로 앞 강변 백사장에서 의병에 대한 훈련을 가지던 장면도 생생하게 전해준다. 전혀 훈련되지 못한 병사들을 단련해 나가는 일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누구 하나 병사교육을 시켜 본 일이 없으니 고민은 당연할 밖에 없었다. 군사훈련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는 나그네에게 병사훈련을 일시 맡긴 사실은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셋째로 의병을 움직여 나간 자금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유림들이 문중별로 돈을 모아 의병을 유지해 갔다. 그런데 청송에서 가장 부자라고 알려진 집에서 목표한 만큼의 자금을 내놓지 않자 이에 대해 원망하는 여론이 쏟아진 장면이 담겨 있다. 서운한 감을 금하지 못하는 대목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넷째, 용병들에 관한 이야기가 재미있다. 사실 의병 수백 명을 유지해 나간다는 일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구성원들을 먹이고 입혀야 한다. 그 뿐이 아니다. 동원된 포수들에게 급료도 지급해야 했다. 아니 의병이라면서 무슨 ‘급료’냐고 의아해 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유림들이 거느린 수하 인물들이야 모두 농민이니 만큼, 그들 가지고서는 전투라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전투력을 갖춘 인물이라야 포수뿐인데, 그들에게는 민족의식이니 민족적 양심이니 하여 동원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일당으로 계산하여 급료를 지급했다는 사실이 이 일지에 소상하게 적혀있다. 더구나 모금된 자금이 바닥나자 급료를 반액을 줄였더니, 포수들이 집단 반발하여 저항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겪는 청송유림의 고뇌가 소상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장면을 담은 일지는 그리 흔하지 않으므로 참으로 재미있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다섯째, 적원일기는 안동?진보?의성?예안?영덕의진과의 연락과 활동 영역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내용을 전달해 주고 있다. 오고간 수많은 통문 이야기와 주변 의진에서 파견된 소모장들의 동향이 기록되어 있어서 상호 관련성을 이해할 수 있다. 안동부에 새로 파견된 신임관찰사를 인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안동의 송천에서 회의가 열리는 장면이라든지, 영덕으로 밀려드는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는 이야기는 주변의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한 부분이다.
더구나 경북북부지역의 의진들이 제천의 호좌의진과 연합하여 펼친 ‘태봉전투’에 대한 기록도 있고, 또 대구진위대를 중간에 두고 진주지역의 노응규(盧應奎)의병과 북부지역의 의진 사이에 기맥을 통하려 했던 상황이 소개되고 있어서 무척 흥미롭다. 게다가 경기도 광주에서 남하한 김하락(金河洛)의진이 의성전투를 치르고 경주를 거쳐 영덕으로 북상해 가는 장면과 이를 추격하고 부딪치는 관군과의 관계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귀중한 역사기록이 아닐 수 없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