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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천삼백리 먼 여정도 을숙도에서 끝나고(글/엄원식)

살아가고 있는 낙동강

영남인들의 대부분은 낙동강가에서 태어나, 낙동강가에서 자라나고, 그리고는 낙동강을 외면한 채, 낙동강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는 나도 있었다.

내 어릴 적 집 앞에 흐르던 개울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고 자라왔다. 마냥 그 속에서 물장구치며 놀 줄만 알았지, 정녕 물이 어느 곳으로 흘러가는지 알지는 못했다. 세월이 흘러 마치 까마득한 옛일처럼 그 시절을 흐릿한 기억 속에서 꺼냈을 때 이미 개울물은 말라 있었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이 지금의 세태를 보고 느꼈다면 “인걸(人傑)은 의구(依舊)하되 산천(山川)은 간 데 없다” 로 문구를 고치지 않았을까 하는 우스꽝스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 주위에서 흔하게 나돈 “무분별한 난(亂)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라는 말도 식상해져 버린 요즘, 이제는 누구나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서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환경을 지켜야 하는)를 알아야 할 것이다.

낙동강!
그렇다. 내가 어린 시절 물장구 치던 그 작은 개울은 바로 낙동강으로 흘러간 게다. 그 물은 이미 을숙도를 통해 남해로! 남해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물을 남해로 쏟아 냈을까? 그래도 마르지 않는 낙동강의 힘은 무엇인가?
우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낙동강은 흘렀고, 우리들이 생을 마친다 해도 낙동강은 그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낙동강가에 붙어사는 우리들은 낙동강에서 얻기만 했을 뿐, 준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직 주었다면, 쓰레기와 오염물질 뿐, 그렇다고 해서 낙동강을 이해한 적은 몇 번이나 있는가? 정작 썩어가는 강물을 보면서도……

이 때 신정일 소장님의 『낙동강역사문화탐사』는 막연하게 내 삶 속에 묻혀 있었던 낙동강변의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변화의 계기를 가져온 좋은 선물이었다. 몇 년 전 단 한번 뵈었는데 그 모습은 작았지만, 다부진 사람임을 금새 알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모습의 소유자로 기억하고 있다.

강을 주제로 걷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언제 낙동강까지 섭렵하셨을까? 정말 대단한 분임은 틀림이 없다. 더구나 매번 많은 사람들을 대동해 다니시더니만, 이번에는 순수하게 혼자서 낙동강의 전구간인 525㎞를 13일간 다니셨단다.

낙동강 탐사는 시작되고, 너덜샘에서 을숙도까지

천삼백리를 시작할 때 지은이는 심경을 다음과 같이 되뇌이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이해될 수 없고 이해시킬 수도 없는 혼돈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홀로 떠나고 있다는 것뿐이다. …중략… 떠난다. 그 것은 돌아옴을 전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연연함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이렇게 신정일의 낙동강 탐사는 시작되고 있었다. 2001년 9월 15일 낙동강의 발원지가 되는 너덜샘에서 적잖이 뛰는 가슴을 안고 첫날을 출발한다. 소제목처럼 역시 강원도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낙동강가에는 이젠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지 “낯선 곳에선 물을 사람도 없다”라고 제목을 정해 놓았다.

1구간 첫 날 지은이가 승부터널을 지날 때는 낙동강 전체 탐사길의 백미일 듯 하다.
“한발 한발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 무겁고 내 발자국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려온다. 무섭고 외롭다. 나는 소리내어 읊조린다. 신정일. 너는 잘 할 수 있어! 신정일 너는 잘 해낼 거야. 내 소리에 내가 놀라는 시간이 지나고 멀리선 듯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은이는 승부터널을 지나오는 15분 동안에 10년 동안의 생각을 했을 것이라 했다. 만약 이 곳을 통과하지 못했다면 낙동강 전 구간을 탐사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며, 이 승부터널을 제대로 지나왔기에 남은 12일은 힘이 들어도 참고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2구간은 주로 안동 구간으로서 낙동강변에 형성된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걸어갔다. 낙동강변에는 무수한 문화양식이 존재하지만, 좁은 구간에 가장 많이 밀집한 곳이 안동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지은이는 안동과, 안동사람들과도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안다.

3구간은 낙동강 이름의 연원이 되는 상주 지역이다. 삼강부터 출발한 길은 의성포 물도리동을 지나 화달리로 향하던 중 아름다운 강물을 바라보며 문득 “시정잡배들이여, 시간이 있거든 강물을 보고 배우시게. 무엇이 올바로 사는 것이며 바로 가는 것인가를.” 교훈도 남겨본다.

4구간은 낙동강의 막바지에 해당하는 10일차에서 12일차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고령교에서 삼랑진 나루까지 내려간다.

발품으로 직접 쓰여진 글이라서 그런지, 책을 보는 순간 순간이, 지은이와 직접 걸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으며, 갈대 숲이 흐드러진 길이 보이는 사진은 마치 내가 낙동강가에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지은이와 가장 공감대를 이루는 부분은 5구간으로서 마지막 13일차 을숙도를 볼 때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저 을숙도를 꿈속에서 몇 번이나 찾아갔던가. 가긴 갔어도 어느 곳 하나 생각나지 않는 어렴풋한 안개 속 같은 저 을숙도가 내 눈앞에 나타나다니, 나는 눈앞에 나타난 을숙도가 행여 꿈인 듯 싶어 소맷자락으로 눈을 부벼본다. 아무리 부비고 보아도 꿈에만 보이던 그 을숙도가 맞다.”

낙동강 천삼백리길 여정은 끝나고 있었다

결국 그 긴 여정이 끝날 때 지은이는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함께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낙동강의 끄트머리 강물이 바다와 만나야 하는 그러나 인공의 장벽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이 낙동강 하구 둑에서 끝간 데 모르게 펼쳐져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자연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있다. …중략… 세상을 넓게 바라보진 못한 사람들이 그대들을 배신하고 괴롭힐지라도 사람들을 감싸주고 희망을 심어주면서 세세토록 흐르고 흘러가라. 간절한 내 염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해는 구름 아래서 붉은 몸체를 다시 드러내고 지는 햇살 아래 낙동강 가에서 몇 사람의 낚시꾼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렇게 신정일의 낙동강 천삼백리 여정은 끝나고 있었다. 비록 대부분의 길이 세월의 무딤으로 끊어졌지만, 우직하게 혼자만의 길을 찾아낸 그 모습에 찬사를 보낸다. 낙동강변에 살면서 낙동강 한번 걸어보진 못한 스스로를 질책도 해 보았고, 낙동강을 새로 바라 볼 수 있는 혜안을 준 신정일님께 이 기회를 통해 감사를 드린다.

책을 읽는 내내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매 구간마다 걸어간 흔적의 지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기회가 되어 새판이 나올 때는 꼭 그려 넣었으면 좋겠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