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했으니(2)(글/이성원)도산서원의 전신인 ‘계상서당’
종택이 보이는 곳에 오니 개울 건너 새로 지은 조그만 집이 보인다. 최근 복원한 ‘계상서당溪上書堂’이다. 한서암을 지은 다음 해 지었다. 도산서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도산서당은 알지만 계상서당의 존재를 모른다. 그 의의는 더욱 모른다. 흔히 23세의 율곡이 성주의 처가에서 외가 오죽헌을 가는 도중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예방했다고 하는데, 이때 찾은 곳이 바로 계상서당이었다.
정지운의 ‘천명도’ 개작, 『주자서절요』 편찬, 『계몽전의』 완성, 『자성록』 서문이 모두 여기서 이루어졌다.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과의 그 유명한 ‘4단7정론의 제1서’가 여기서 보내졌다. 그러니까 50세 이후 60세까지의 10년 동안의 교육기관이 계상서당이고, 그 이후 10년이 도산서당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계상서당을 나와 종택으로 다가오니 우측 산 아래 큰 건물이 우선 보인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이란 낭만적인 편액이 걸려있다. 1715년 창설재 권두경(蒼雪齋 權斗經)이 도산서원원장에 되어 종손 이수겸李守謙과 논의하여 영남사림의 모금으로 지었다.
창설재의 ‘계상의 옛 터에 관련된 고증의 글(溪上遺址建屋表坊考證)’의 글을 보면, 이때 종택에 와보니 퇴계 당시의 집들은 화재로 없어지고 이미 밭으로 변해 외손 김씨, 박씨들의 소유가 되어 있었고, ‘한서암’ 만이 외롭게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집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 무렵 종택은 가화마저 이어져서 그 환경이 극도로 피폐했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집들이 지어져야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다.
추월한수정은 이런 연유로 지어졌다. 도산서원이 도산서당의 기념 건물이라 한다면 ‘추월한수정’은 퇴계종택 기념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정려문
‘추월한수정’에서 나오니 입춘을 쓴 솟을대문이 나타나고, 대문 위에 ‘烈女通德郞行司?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란 긴 정려 글씨가 보인다. 퇴계의 존재만으로도 숙연해지는 이 집에 열녀는 또 웬 말인가? 누가 열녀였던가? 열녀는 퇴계 손부 권씨이다. 즉 이안도李安道의 부인이다. 손부는 남편이 일찍 죽자 홑옷 거적자리에서 밤낮으로 울음을 그치지 않은 것이 다섯 달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3년 상을 마치고 나니 병이 더욱 깊어졌다. 이후 밥을 입에 대지 않고 좁쌀미음으로 연명하면서 머리를 빗질하지 않은 채 23년을 띠를 풀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죽지 못하고 명을 이어가는 것은 다만 후사後嗣 때문이다. 만일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이를 대할 것인가!” 했다. 결국 후사는 조카 억?으로 결정되었고, 억이 혼인하여 며느리와 함께 들어오는 날 목욕재계한 후 소복을 입고 자결했다.
열녀 정려는 초상 중에 내려왔고, 부인의 시신은 열녀문을 나와 발인되었다. 종택의 열녀문은 이런 연유로 세워졌다.
제례절차는 ‘가가예문家家禮文’이라 한다. 가문마다 다르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 종선조禮 從先祖’라 하여, ‘조상이 했던 방식을 따라’하기 때문이다. 퇴계종택 제례는 ‘중포中鮑’로 유명하다. ‘포를 상 가운데 놓는 것’을 말한다.
그 유래가 바로 권씨부인 때문이다. 남편 없는 부인이 홀로 제사를 지내는데 자꾸만 상머리의 포가 적삼의 소매에 걸려 떨어져서 그만 포를 가장자리로 옮겼는데 그것이 전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종택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사실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잠시 퇴계의 가계를 적어본다.
1) 李滉- 寯- 安道-
寀 純道
寂 詠道
2) 李安道- ?- 命哲- ?- 守謙- 世德- 龜應- 志淳-
-彙寧- 晩憙- 中慶- 忠鎬- 源慤- 東恩(현 종손)- 根必- 致億
그런데 이들 역대 종손들의 이름을 가만히 보면 항열을 따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8세손 世德으로부터 致億에 이르기까지 이름 어디에든 ‘心’자가 반드시 들어있다는 점이다. 德, 應, 志, 寧, 憙, 慶, 忠, 慤, 恩, 必 億등.
추월한수정의 편액과 건축
98년 9월 종택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무슨 연유가 있습니까’ 하고 이근필 종손께 여쭈어 보니, 9대조 당시부터 지어진 것은 분명한데 그 연유는 당신도 모른다고 했다. 필자는 막연히 퇴계가 ‘심학心學’을 주력하였기에, 그 뜻과 정신을 이어가자고 한 의지의 표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 『후계집後溪集』(後溪 李?淳, 1754-1832)에 ‘추월한수정 편액 관련의 글(秋月寒水亭揭扁記事)’이 있어 읽어보니, ‘추월한수정’의 건축의의와 이들 역대 종손들의 이름 작명에 대한 하나의 시사점을 주고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추월한수정’의 편액은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의 “선생의 마음은 마치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다(先生之心 如秋月寒水)”는 말에서 취했다고 했다. 이는 주자朱子가 “천년을 전해 내려온 마음이 마치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다(‘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라는 주자朱子의 시한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이 한 구절에서 “성현 전심傳心의 묘를 터득할 수 있고(得聖賢傳心之妙), 이 심법心法을 전수한 사람은 오직 퇴계선생 한 분 뿐이다”라고 했다. ‘추월한수정’의 편액과 건축 의의는 이 설명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추월한수정’은 문학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특이한 편액으로, 도무지 도학자 퇴계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은 선문답 같은 이 시의 한 구절 속에 ‘도학道學’의 핵심이 담겨있다. ‘추월한수’의 무대는 말할 것도 없이 상계이고 퇴계이다. 퇴계의 개울은 단순한 개울이 아니라 ‘퇴계철학’이 이루어진 성찰과 사색이 깃든 낭만의 미적공간이다.
모르긴 하나, ‘傳心之妙’에 담긴 ‘心’과 그 심법의 오묘함을 전수한 오직 한분이 퇴계라는 설명에서, 바로 퇴계 역대 종손들의 이름 속 ‘心’자의 작명비밀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퇴계가 터득한 ‘전심의 묘’를 후손들도 그렇게 터득하고 이어가기를 희망한 것은 아닐까. 희망이 전통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진정 어느 경지에 가야 가을 달빛이 물에 비추는 것을 보고 진리를 깨닫게 될까? 또 어느 때 가을 달빛 비치는 퇴계의 개울을 보게 될까?
종손의 결단
종손께서는 이 날 여러 말씀을 하셨다. 특히 ‘제사祭祀’에 대한 말씀이 많으셨다. 말씀 도중 문득 종이에 글을 써서 보여주고, 그 아래 9 : 1이라고 썼다.
“宜於今而 不遠於古”
9 1
해석하면 “지금 실정에 맞도록 하나 옛 법도에 멀어져서도 안 된다”이다. 퇴계의 유언에 나오는 한마디이다. 9 : 1은 그 비중이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그때 종손께서 혁신적인 생각을 갖고 계시다고 느꼈다. 종손은 사실 신념을 갖고 계시고 실천에 옮기고 계셨다. 종손께서는 지금 가을 묘사墓祀를 추월한수정 마루에서 한꺼번에 지낸다. ‘망제望祭’와 유사한 방식일까. 퇴계의 제사도 이때 함께 지낸다. 자연 지손들이 말이 많았다.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종손은 『도산전서』의 근거를 대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근거는 이 유언과 더불어, 퇴계가 제자에게 준 문목問目과 편지글이었다. 종손께서는 그때 복사한 글을 필자에게 주었는데 보니 ‘설월당 문목(雪月堂問目)’과 ‘김이정 편지(金而精便紙)였다. 글을 보니 퇴계는 과연 그런 제례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을 묘사를 집안에서 한꺼번에 지내는 방식은 일반 사람들이 실행에 옮기기는 진정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종손이 생각하는 전통은 형식이 아닌 인간이었다. 인간의 삶에 따라가는 예법이 곧 ‘宜於今’이고 또한 ‘不遠於古’라는 것이다. 그것이 퇴계의 교훈이라 했다.
종손은 또 ‘음택’과 ‘작명’을 말씀하셨다. 무수한 조상의 묘소를 명당으로 모셨건만, 또 작명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건만 지금 종택이 처한 환경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종손은 한 예로 작명으로 인해 겪은 일을 설명하고, 그런 연유로 자신은 당신의 딸들을 다시는 작명가의 놀음에 넘어가지 않도록 한글 3자로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첫째 딸을 이경신재, 둘째 딸을 이경춘우로 작명했다고 했다.
종손은 또 근친혼의 문제를 지적했다. 근친혼은 대를 끊어지게 하고, 머리 나쁜 후손을 낳게 했다고 했다. 하계, 원촌의 지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물, 관직 등에서 위축된 점으로 보면 이 말씀도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친혼의 문제’는 퇴계종택을 쓴 다른 글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사실 관계를 떠나, 아니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절실한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종손의 이런 인식은 제사뿐만 아니라 지금 퇴계 선양과 도산서원 운영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모태가 되고 있다. 도산서원 상덕사의 이른바 ‘500년 만의 여성참배허용’과 장판각, 광명실에 보관되었던 판각과 고문서의 ‘국학진흥원’의 전격적인 기탁은 종손의 대표적 결단이었다.
종택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종손은 필자에게 사적으로는 은사가 된다. 선생께서는 20대에 도산국민학교에 부임하여 한번도 이 학교를 떠난 적이 없이 정년을 했다. 40여 년을 한 학교에서 보냈다. 안동댐으로 폐교가 되어 잠시 인근 온혜국교로 옮긴 것을 빼면 말이다.
교육청의 배려였다. 이제 연세가 70이 넘으신 것 같다. 그런데도 선생은 아직 사실 종손이 아니다.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노종손은 100세 가까운 고령이나 아직 정정하시다. 때문에 종손이지만 ‘퇴계 종손’은 아니다. 종손은 종손이 죽고 3년 상을 마친 후 ‘길제吉祭’라는 의식을 거처야 한다. 길제의 ‘개제주改題主’의 의식에서 불천위 위패에 ‘봉사손**봉사(奉祀孫**奉祀)’라고 쓰여야만 비로소 종손이 된다.
선생께서는 십여 년 전 상처를 하셨다. 근년에는 자당께서도 타계하셨다. 지금 퇴계 종택에는종택 주변은 단정하고 정갈한 ‘육우원’, ‘절우사’를 염두에 둔 그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볼거리’보다는 ‘사색하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기뻐서 끼니조차 잊을 듯한’ 퇴계의 정서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안주인이 없다. 자연 선생께서 집안의 온갖 일을 꾸려 가신다. 몇 해 전 동생 되시는 분이 방송에 나와 선생에 대한 말씀을 하는데 ‘형님은 일생을 희생하셨다’고 했다. ‘희생’이란 생각하기 나름의 개념이지만, 적어도 선생의 인생이 ‘희생적인 인생’인 것만은 사실이다. 동생, 매형, 매제 등이 모두 서울에서 굴지의 기업을 이끌며 풍족한 인생을 살고 있음에 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도산서원의 퇴계 영광에 비해 상계는 어딘가 고적한 그림자가 보인다. 나만의 느낌일까?
3년 전 이근필 종손을 중심으로 한 ‘퇴계종택의 일상’이 한 TV에 방영된 바 있다. 올해 초 는 아들 치혁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방영되었다. 잔잔한 파장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두 번의 방송에서 퇴계종택의 실상과 종손의 고뇌와 종가의 장래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모습과 성찰이다. 과연 종택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여담이지만 종손은 첫 번째 방송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셨다. 당신이 생각하는 의도와는 전연 다르게 방영되었다고 했다. 필자도 그런 경험이 없지 않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지금 종택 주위에는 ‘퇴계기념공원’, ‘종택보수’, ‘도로확포장’의 공사가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있다. 공사가 끝이 나면 종택은 그 면모를 일신할 것이다. 그런데 ‘퇴계기념공원’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아 단정하기 어려우나 1차공사가 끝난 지금, 필자가 개울 건너서 바라본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이다. 현장을 둘러본 소감은 ‘다소 산만하다’이다. 동선도 그러하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석물들은 조화로움을 갖게 하지 않는다. 2차 공사에도 적지 않은 석물들이 들어선다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도산서원성역화사업’이 과다한 석물의 투입으로 원형을 손상시켰듯이, 이 사업 역시 아늑한 상계의 모습에는 역행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퇴계의 개울을 짓이기고 쌓은 돌방축은 정영 그런 방법밖에 없는 것인지.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보기 싫다.
퇴계는 ‘한서암’을 짓고 마당에 ‘광영당光影塘’이라는 못을 파고 주변에 대나무, 소나무, 국화, 매화, 연을 심어 ‘육우원六友園’이라 했다. 여섯 친구들이 있는 정원이었다. 그런데 왜 다섯 가지를 심고 ‘육우’라 했을까. 나머지 하나는 퇴계 자신이었다. 도산서당 앞에 못을 파고 ‘정우당淨友塘’이라 하고, 옆 정원을 조성하여 ‘절우사節友社’라 한 일과 흡사하다. ‘맑음(淨)’이 벗이며 ‘절개(節)’가 벗이다.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깨끗하고 변함없는 자연 속에 흔적 없이 하나가 되고자 한 사람이 퇴계였다.
거기 조그만 소망 하나가 있었다면 그런 정원 속에 “향기 나는 한 포기의 난초”가 되어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퇴계였다. 따라서 종택 주변은 단정하고 정갈한 ‘육우원’, ‘절우사’를 염두에 둔 그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볼거리’ 보다는 ‘사색하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기뻐서 끼니조차 잊을 듯한” 퇴계의 정서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치단체들이 다투어 ‘관광시대’를 외치니 이곳마저 ‘관광’의 색깔로 성형하려고 하는가. 이곳의 의미를 좀더 깊은 안목으로 차분히 가꾸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인가.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아직 퇴계종택은 가볼만하다. 주변 환경이 퇴계 당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도산의 산야 그대로이다. 그런 가운데 종택 앞밭에는 지금 대량의 매화나무가 자라나고 있다. 꽃이 만개할 시기를 맞추어 가보기 바란다. 잔잔한 퇴계의 물소리와 더불어 여간 아름답지 않다. 종손께서 심고 가꾸셨고, 원하는 사람에게 그냥 드리는 모양이다. 매화를 ‘매형梅兄’이라고 한 퇴계의 향기를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염원이리라.
종손, 종부, 종택, 종택문화는 역사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멀지 않은 날, 종택들은 휑한 건물의 형체만 남기고 수다한 사연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갈무리할 것이다. 그때 누가 있어 매화향기 가득한 종택 문화를 지키고 가꾸어 갈까. 그 누가 있어 물에 비친 가을 달빛을 보고 학문과 인생과 진리를 생각하고 깨닫게 될까.
그러나저러나, 퇴계종택에서는 지금 선생의 늠름한 아들께서 하루빨리 아내를 맞이하여 이 고적한 집에 여자 소리,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게 되었으면 좋겠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