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천정 이야기(글/윤천근)봉화의 닭실
봉화 유곡, 세칭 닭실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곳에 석천정이 있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올 겨울은 예년과는 달리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눈이 많아서 움직이는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봉화 쪽은 굽은 길과 고갯길이 많아서 껀뜻하면 길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처음 닭실에 가기로 한 날에도 살짝 눈이 내렸다. 그래 한차례 연기한 뒤에 길을 나서게 된 것인데, 미상불 한 차례 연기한 것을 하늘이 염두에 두기라도 한 탓인지, 날씨는 썩 괜찮은 편이었다. 춥기는 하였지만, 그만하면 도로 사정도 좋았고, 눈도 내리지 않았다.
우리는 봉화에서 물야 쪽으로 꺾어돌아 내성천의 합류지점에서 닭실 쪽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을 타고 거슬러 올랐다. 우리의 목표지가 닭실의 종가가 아니라 석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천정은 닭실의 종가를 떼어놓고 따로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석천정에 앞서서 닭실 이야기부터 하고자 한다.
닭실! 봉화에서 울진 나가는 길이 굴다리를 넘으면서 바로 만나게 되는 마을이다. 굴다리를 통해 철도 밑을 지나는 길은 심하게 굽어지면서 코 앞에서 닭실 종가로 들어가는 다리를 만난다. 철도와 심하게 굽어지는 내리막길이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낡고 오래된 굴다리 바로 앞에서 닭실로 들어가는 시멘트 다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탓에, 봉화 쪽에서 오다가 닭실로 꺾어들려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을의 진입 시점에서부터 답답하다는 느낌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게 된다. 그것은 실제 마을 안에 들어가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분위기가 어떠하든, 닭실마을에 머무는 동안 내내 우리의 의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게다가 시멘트 다리의 한가운데 올려세운 그 철제 정문의 우스꽝스러운 몰골이라니!
물론 외견상으로는 마을로 진입하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심리적 분위기와 마을 안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느낌은 아주 다르다. 마을 안에서 우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주변 자연이 마을을 감싸안고 있는 듯한 안온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마을 안에서도 바로 앞산 한쪽을 자르고 지나가는 철도와 도로를 의식에서 밀어냈을 때에나 그 안온한 느낌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유지될 수 있다. 그러니 봉화의 닭실마을에게 있어서는 마을 앞을 자르고 나가는 도로와 철도가 커다란 결함요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봉화 닭실마을의 풍수가 너무 좋기 때문에 일제가 일부러 그 안산의 혈을 잘라 길을 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봉화 닭실에 들어서면 우리는 그 너무 따뜻하고 부드러운 자연과 그 자연의 분위기를 단숨에 깨뜨려버리는 길로 인해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의 진실성을 믿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충재 권벌, 그리고 청암정
그것이야 어쨌든, 이제 우리는 닭실의 종가 이야기를 하여 보도록 하자. 닭실의 종가는 충재 권벌로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권벌은 1478년에 출생하여 1548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종가의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권벌은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해서 1520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며, 이 때 이곳으로 내려와 농토를 마련하고 14년간 후진 양성에 종사하였고, 중종 28년(1533년) 복직되었다가 을사사화 때 다시 파직되어 전라도 구례, 평안도 삭주로 유배된다. 그는 유배 중 삭주에서 71세의 나이로(1548년) 타계한다.
"봉화읍 유곡리는 일면 닭실이라 하며 충재 권벌의 향리 … 권벌은 중종 15년(1520년) 43세 때 닭실에 살 땅을 잡았다. 그가 출생한 곳은 안동부 도촌리 … 도촌은 그의 아버지 권사빈이 원래 세거하던 송파촌에서 옮겨온 곳 … 권벌이 도촌에서 닭실로 옮겨온 것은 기묘사화의 환난을 겪은 이듬해가 된다."
안동청년 유도회가 1992년에 펴낸 《영남학맥》 34쪽에 나오는 말이다.
권벌의 종가는 물론 눈 여겨 살펴볼만한 가치를 갖는 것이지만, 우리가 석천정을 말함에 있어서는 굳이 세세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석천정을 말하기 위해서 닭실 종가에서 청암정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청암정! 참으로 매력적인 정자이다.
"충정공이 지으신 정자이지요."
종가의 사랑에서 만난 노 종손의 말이다. 충정공은 권벌의 시호이다.
정자는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있어서 자연으로 걸어들어가는 창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정하게 삶터로부터 떨어져 위치하게 마련이다. 자연을 보다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을 확보하기 위한 안배이다.
그러나 정자가 반드시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삶터 속에 놓여져 있는 정자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자가 삶터 속에 놓여져 있는 경우라도, 정자의 미학이 자연 속에 놓여져 있는 정자와 달라질 수는 없다. 삶터 속의 정자도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장소, 자연닮기의 공부가 행해질 수 있는 장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정자의 미학을 갖추기 위해, 삶터 속에 놓여진 정자는 그 주변에 자연 불러들이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위적으로 정자를 삶터로부터 차단시켜서 자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 청암정은 그런 인위적 노력이 일종의 우아한 매력까지 갖추어낸 경우라고 하겠다. 그만큼 청암정의 자연불러들이기는 성공적이다.
청암정은 거대한 너럭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 바위는 물론 자연 그대로의 것일 터이다. 집 주변에 버티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그대로 대좌로 삼아서 그 위에 정자를 올라앉힐 생각을 한 충정공 권벌의 미학적 의식은 얼마나 환상적인 것인가?
그런 미학적 의식이 갖추어져 있었기에 바위 주변에 원형의 연못을 둘러파고, 그 둘레에 또 밖으로 휘돌아 뻗는 자세로 버드나무를 심고, 인위적인 수식이 극도로 자제되어 자연석의 느낌까지 들게 하는 두툼한 돌다리를 세워서 연못 속 정자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고, 커다란 바위 위에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한 크기의 정자를 세워놓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렇게 청암정은 바위와 연못과 버드나무와 돌다리 만으로 적절하게 차단되고 우아하게 어울린 하나의 작은 자연공간을 창조하여낸다. 그 안에 들어앉아 있는 정자가 만약 착 가라앉은 목재의 퇴락한 색감으로만 나를 마주해 주었다면 나는 그 정자의 미학으로부터 오는 감동 때문에 얼마나 즐거울 수 있었을까? 그러나 거기까지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 과도한 것일까? 정자에 덕지덕지 칠해진 단청의 현란한 색감이 그런 나의 행복한 기대를 단숨에 무너뜨려버리는 위업을 달성하고야 말았으니.
미학은 통일성을 생명으로 한다. 통일성은 자연스러움에 다름아니다. 파격조차도 그 통일성 속에 다리를 걸치고 있어야 자연스러움의 기조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 통일성, 자연스러움의 기조를 갖추고 있으면서, 범속함의 태를 벗고 아름다움의 자태를 슬쩍 드러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미학의 비밀은 있는 것이다.
청암정은 그런 미학의 기본바탕을 갖추어냈으나, 아쉽게도 요란스런 단청의 빛에 가려서 그 미학을 드러내는 데에는 실패하고야 만다. 꾸밈이 한 부분에서 지나치게 강조되었으므로, 자연스러운 통일감이 단숨에 실종되어 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런 분위기의 불협화는 어렵게 석천정 주변으로 불러들인 인공의 자연을 무력화시킨다. 자연의 위력은 그 순결성, 비의성에서 온다. 그런 자연은 인간을 순화시키는 마법의 힘을 갖추어낸다. 정자는 바로 그 지점에 좌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청암정은 그런 좌표지점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잃고 있다. 아마도 자연 속에 들어서 있는 좌표지점이 아니라 자연을 불러들인 좌표지점이었기에 너무 간단히 그 권능이 와해되어 버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청암정을 건설하였던 권벌에게도 이 점은 미진한 구석으로 읽혀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의 시대에는 아마도 정자에 요란한 단청은 칠해놓지 않았으리라고 여겨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암정이 불러들인 자연 속에 놓여져 있다는 것은 이 정자의 약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책상 위의 분재에서도 자연은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권능은 대자연의 한 기슭 속으로 걸어들어가 거대한 수목을 만나게 되었을 때 훨씬 크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 주변으로 자연을 불러들이기는 어쩔 수 없이 한계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벌은 이미 청암정을 가지고 있는데도 석천정의 건립을 꿈꾸고 있는 것이리라.
석천정 만들기
청암정을 가지고 있는 권벌이 또 다른 정자를 꿈꾸었던 것은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는 수량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탓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실로 정자다운 정자, 진실로 자연 속에 놓여져 있는 정자를 가질 필요를 느꼈으리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독법이 아니겠는가?
닭실의 종가를 중심에 두고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를 꿈꾼다고 할 때, 과연 어디가 가장 적절하겠는가? 지금 석천정이 있는 자리, 닭실 앞을 거쳐 흘러내린 물이 내성천의 본류와 만나기 위해 산허리를 뚫고 나아가느라 용트림을 한 지점이야말로 가장 먼저 손꼽힐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자연은 물과 산이 어우러져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물은 바위와 웅덩이가 만나야 제격이고, 산은 절벽과 소나무가 뒤엉켜 있어야 매력적이다.
이런 매력적인 자연은 닭실을 휘감고 도는 내성천의 지류 속에는 단 한군데, 그 지류가 끝나는 부분 밖에는 없다.
닭실은 낮은 산과 넓게 열리는 공간 속에 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너무 열려 있고, 너무 평범하므로, 일상을 담아내기에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미학적 세례를 우리의 온 몸에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의 비의성을 담고 있는 공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닭실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은 분지의 서쪽 끝에 이르게 되면 앞을 막고 있는 산줄기의 끝과 서쪽 옆을 막으며 달려내려온 산줄기의 끝에 의해 좁혀진 산골짝 사이를 비집고 완만한 태극형상의 몸짓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 굽돌이의 한 끝에서 부터는 절벽바위와 만나고 잘 닦인 커다란 화강암 바위들과 만난다.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물줄기는 나직한 음조이기는 하기만 바위틈 사이를 흘러내리는 청량한 계곡물 소리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리하여 백여미터 남짓한 짧은 거리의 매력적인 계곡이 슬몃 감추어두었던 하나의 세상을 슬쩍 풀어놓아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다.
이 계곡이 바위와 돌, 소나무와 물로 어우러진 비경을 연출하여 보여주므로,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를 꿈꾸었던 충재 권벌이 여기 정자를 세우고자 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 계곡이 충재 권벌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이라는 것은 석천정 아래 쪽 계곡 한켠에 버티고 서 있는 절벽 바위에 충재선생산수구장, 그러니까 충재선생의 옛 자연 장원이라는 글씨가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충재 권벌은 여기에 정자를 세울 뜻을 가지고 있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정자를 세우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정자 안에 붙어있는 청암정중수기를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청암정 중수기는 충재 권벌의 5대 후손 권두인이 지은 것인데, 현재 종가를 지키고 있는 노종손의 말에 의하면 두자 항렬이 활동하던 때야말로 닭실 안동권씨 일문의 전성시대였다고 한다.
"세칭 28두라고 했지요."
노종손의 말이다.
"두자 항렬이 28명 밖에 안됐다는 얘기는 아니고 세상이 아는 두자 항렬만 쳐도 28명이었다는 얘기지요."
이 두자 항렬, 권벌의 5대손 중 맏이는 두추였다. 종손은 두추이고, 둘째가 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혈통상의 순서일 따름이고, 종가의 종통은 둘째 두인으로 이어진다.
"병으로 제사를 이어 받들을 수 없어서 부친의 명으로 종통을 아우 두인에게 양보하였다."
그리하여 권벌의 종가는 두인계열에 의하여 이어져 나간다. 이것은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사건이지만, 우리가 여기서 그것을 논난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다만 우리는 석천정 중수기를 쓰고 있는 권두인이라는 사람이 언제적 인물이고,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대충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권벌의 5대 후손이며, 둘째로써 형을 대신해 종가의 가계를 이은 권두인의 석천정 중수기로 돌아가 보자. 중수기에 의하면 권벌은 여기 석천정 자리에 대를 쌓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대 위에 정자를 세우는 것은 그의 아들 권동보이다. 권동보는 호가 청암이다. 아버지 권벌이 집 근처에 세운 정자이름인 청암을 호로 사용하였다. 족보에 의하면 그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수기에 의하면 청암 권동보는 권벌이 쌓은 대 위에 집을 짓고 석천정사라고 이름붙였다고 한다. 정자 외의 다른 집들은 또 한 대가 지나 권동보의 아들 권래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권래는 호를 석천이라 한다.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그도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정자 이름을 호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석천정은 3대에 걸친 역사를 통해 오늘 우리가 보고있는 모습으로 완성되는 것이라 하겠다. 권래는 금강산 작은 절집을 모형으로 삼아 석천정을 완성시켜 낸다고 한다.
이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석천정에 화려한 색감의 단청이 빈틈없이 칠해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 권래의 시대 부터가 아닌가 추측된다. 아울러 청암정에 단청을 칠한 것도 역시 권래일 것이다. 권래는 아마도 절집의 미학에 경도되었던 사람인 것 같은데, 그 미학을 정자 속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석천정
바위는 물을 만나 말갛게 씻겨 있고, 물은 바위를 만나 이리저리 휘돌면서 청명한 소리들을 만들어낸다. 겨울은 내성천 계곡에 내려와 지천으로 흩어져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계곡의 음지 쪽에 여전히 잔설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몇십년 만인가 십 몇 년 만인가에 찾아왔다는 추위는 계곡의 물을 거의 대부분 얼려놓고 있었다. 물길이 조금 세차게 흐르는 곳만 얼지 않고 남아서 시리게 차가운 빛깔의 투명한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계곡 안은 물 흐르는 소리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물소리는 졸졸졸 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촤르륵 촤르륵 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쏴쏴거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 모든 소리들이 뒤섞여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었다. 물소리는 물 흘러가는 모습이 보이는 곳에서만 만들어지고 있지는 않았다.
물소리는 얼음장 밑에서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얼음장 밑에서 만들어진 물소리는 얼음장을 소리통으로 삼아서 목 깊은 음조로 소리치며 나직하지만 멀리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흐르는 물살이 만들어내고 있는 물소리는 조금은 날카로운 음조로 가까운 주변에 떠올랐다가는 사라져 가고 있었다.
물과 계곡이 좋으니, 이곳 석천정 계곡은 주변 사람들이 많이 찾아드는 유원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입구에 서 있는 작은 내성천 유원지 표지판의 안내문이 그 점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여름의 석천정 영역에서는 사람들 구경말고는 별로 할 것이 없으리라는 점을 암시하여 주었다. 내가 찾아갔을 때는 겨울이라서, 그것도 아주 추운 겨울날씨라서 석천정 계곡에는 아무도 없고 석천정만 시린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는 것이며, 이제 진실로 석천정에서 고적한 정자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겨울 한철 뿐이리라는 점을 그것은 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계곡을 얼마쯤 걸어 들어가서 어울리지 않게 큰 석천정 안내판과 벽돌로 지어진 화장실 지역을 돌아드니 건너편 산 기슭에 바로 석천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느낌은 뭐라할까? 글쎄! 내성천 영역으로 들어서면서 바위와 물과 산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자연에 너무 매혹되어 있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시리게 얼어붙은 계곡의 물과 그늘진 곳에 남겨진 순백의 잔설,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는 겨울 아침의 청명한 하늘 같은 것에 감정이 고양되었던 탓도 있으리라. 그런 것들이 너무 나의 기대를 높은 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나는 정자를 보기도 전에 이미 이 곳의 자연 그 자체를 닮은 작고 소박한 건물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천정은 나의 그런 기대에 부합되는 모습은 아니었다. 시내 건너편에서 보기에도 석천정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건물의 지붕은 너무 장중한 모습이었고, 벽에 칠한 색깔은 너무 강렬하였다. 거기서는 단청의 모습이 분명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만약 단청을 칠한 모습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면 나의 실망은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런데 계곡을 가로질러 건너편 정자에 이르는 길은 돌다리였다. 커다란 돌을 인공적으로 연결시켜 놓은 듯한데, 그 위에 얼음이 뒤덮여 있어서인지, 거의 인공적 구조물이라는 느낌이 들지도 않을 정도였다.
정자는 거의 일직선으로 건물들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정자영역의 서쪽에 있는 허름한 집은 관리인이 사는 곳 같았다. 여름철 유원지답게 그 건물에는 일번지 포장마차라는 상호를 내걸고 있었다. 그 동쪽에는 정자 영역으로 들어가는 정문이 열려 있었는데, 그 곳에는 양쪽으로 개집이 놓여져 있었다. 쇠줄에 묶인 개들이 낯선 방문객의 출현에 그악스럽게 짖어댔다. 개집이 비좁은 정자의 정문을 거의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문제인 듯 싶었다.
정자 영역 안으로 들어서며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옛날에 관리사나 주사로 쓰였을 집이었다. 그 옆에 두어걸음쯤 떨어져 정자가 자리잡고 있었고, 정자의 동쪽으로는 정자보다 작고 아담하며, 정자 폭의 반절쯤 밖에 되지 않는 방이었고, 그 동쪽으로는 또 얼마쯤 떨어져서 횡으로 지어져 있는 창고집이 있었다. 그것은 정자영역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기도 하였다.
정자의 마루집은 3간 복집의 규모였다. 서쪽의 한간 복집 쯤 되는 부분은 천장을 판자로 덮고 거기 빈틈없이 단청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동쪽의 2간 복집 영역은 석가래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정자 마루방의 천장이 덮여 있는 부분 쪽으로는 석천정사라는 현판이 큰글씨로 씌여 걸려 있었고, 남쪽 지붕 아래로는 석천정중수기, 석천정사서, 청암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사 시가 새겨진 현판이 올라붙어 있었다. 좋은 경치, 이름있는 가문의 정자이므로 뭍 선비들이 많이 와서 시를 남기곤 하였을 법도 한데, 시판들이 전혀 붙어있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석천정은 판자와 벽과 석가래와 기둥 등을 빠짐없이 단청을 칠하고 있는 것만을 빼놓고 본다면 환상적인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였다. 그러나 요란한 단청이라는 작은 결함 하나가 석천정을 정자의 미학의 정점에서 나락으로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석천정 영역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정자라고 할 수 없었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석천정 밖의 자연이고, 석천정 뒤편의 대나무 숲과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돌우물이다.
석천정 영역과 뒷산의 언덕이 만나는 부분은 커다란 바위덩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의 바위덩이는 아주 작은 규모의 절벽 형상을 이루고 있고, 거기에는 석천정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앞에는 잘 생긴 감나무 하나가 서 있고, 그 동쪽으로는 산기슭이 정자 뒷마당과 만나는 선을 따라가며 폭 좁은 대나무 숲이 이루어져 있다. 대나무는 키 작고 가는 것이었지만, 하나의 띠를 이루며 어울려 있어서 제법 볼만하였다. 그 대나무 숲이 있는 부분의 산기슭 끝에는 낮은 키의 너럭바위들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 동쪽 끝부분의 낮은 너럭바위는 작은 우물을 숨기고 있었다.
이 돌우물은 작고 앙증스런 크기였고, 바닥이 정자 뒷마당 보다 그렇게 깊다고 할 수도 없었지만,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모양이었고,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맑은 물이 상당히 고여 있었고, 그 속에는 가재의 유충이 자갈 사이에서 옆걸음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