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에서 만난 정 많은 부자(글/계화순)추석대목장이다. 매인 몸이라 일요일 외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어 늦잠 자는 느긋함을 포기할 수 밖에. 퇴계로를 지나 가시내가 가까워오니 경운기도 서너대 승용차들도 줄을 잇는다. 먼데서 예초기 돌리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왜 평소보다 이 도로에 이토록 많은 차량이 붐비는지 감이 잡힌다. 경운기에도 예초기가 실렸다. 검문소의 순경들 외에는 별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서부단지에는 지난 태풍 때 떠내려온 쓰레기들을 건져 올려 놓았는데 그 마을 집들의 서너채 부피는 됨 직하다. 외곽도로를 포기하고 일부로 장터를 돌아 온혜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는 동안 그 흔한 강아지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으니 너무 삭막하다. 오늘날 농촌은 어디나 사람들이 귀해졌지만 특히나 젊은 사람들은.
이 마을은 지날 때마다 쇠락함에 가속도가 붙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온혜장터에 도착한 나는 아연실색, 구경하는 사람, 손님을 부르는 장꾼, 흥정하는 소리로 조금은 시끄러우리라 예감하고 있었는데 사람 수보다 세워놓은 자동차의 수가 더 많고 너무도 조용한 장날의 모습이다. 오는 차 안에서 '온혜장에서 장꾼 둘이가 싸움이 붙었는데 말릴 사람이 없다'라고 세간의 떠도는(?) 말을 농담삼아 들려주었는데 그 말이 참인가보다. 누구를 붙잡고 이야기의 물꼬를 터야할 지 막막하다. 정유소 부근에 붙박이 슈퍼가 서너개, 식당…장을 찾아 떠다니는 장돌뱅이의 난전은 10개가 될까? 말까?
"할머니 장에 오셨어요"
회색 몸빼를 입은 연세 지긋한 할머니께 다가가 말을 건넨다. "예", "무얼 사셨는데요?" "사과, 대추, 포도…과일 쪼매 샀니더. 산에 갈라꼬" 갈 길이 바쁜가?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나에게 사람좋은 웃음을 보내며 종종 사라져간다. 도리없이 난전의 점주를 찾는 수 밖에.
키가 자그마하고 갈랑갈랑한 몸매의 이연노(58)씨가 오늘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의 난전에는 과일, 채소, 어물 그야말로 만물상이다. 이곳에서 추석 차례에 올릴 모든 제물들을 장만할 수가 있다.
어린 시절 사고로 다리를 약간 절게 된 그는 그 연배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배운 것은 없고,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노동판에 뛰어들 수도 없어 장삿길로 접어들었고, 처음엔 나프탈린, 고무줄 등의 잡화를 취급하다가 건어물로, 지금은 장이 서는 곳마다 물품을 달리하여 가지만 주로 취급하는 품목은 부식물(副食物)이다. 안동중학교 뒤 태화통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집에는 반 평에서 한 평 사이의 냉동실을 본인이 직접 만들어 어물을 그곳에 보관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과일은 풍산 통로에 있는 청과물 도매상에서, 어물들은 영호초등학교 뒤에 있는 어물도가에서 받아오는 것이 제일 많지만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오후 4시에 경매가 있는 대구농수산물센터에도, 때로는 부산까지 가서 물건을 해오기도 하는데 주로 봄철에 그리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대도시에 물건들이 집중적으로 모여들기 때문이란다.
젊은이 하나가 차 유리창을 닦고 있다. 아들이냐고 묻자 부자가 동시에 "예"라고 대답한다.
시골장터에서 20대의 젊은이를 만났다는 사실이, 아무 망설임 없이 신체적 장애를 지닌 장꾼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그 모습이 반갑고 고마웠다.
"대목장이어서 아버지 따라 왔어요?"
"예"
"아버지 따라 몇 번이나 장에 와 봤어요?"
"대학에는 토요일에 강의가 없으니까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아버지를 따라와 짐도 내려드리고…"
금년 4월에 제대를 하고 2학기에 복학을 한 그의 아들은 이기욱(24), 안동과학대학 환경보건과에 재학중이다. 2남 2녀중 막내인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스스로 학비를 벌어 모은 다음 그 이듬해에 진학을 했다. 시간만 나면 아버지를 도와준다는 이씨의 말을 듣고 "착한 아들이네" 내가 진심으로 칭찬하자 그 아버지는 "안 착하면 어예노? 부모가 새벅 3시에 일나가 이쿠 설치는데 저거도 자식된 도리로서 해야지. 그러먼 부모가 하는 거 뻐이 보고 있나? 새벅잠 자 내나? 새벅에 일나가 짐 날라주고 학교 갔다오마 바라코 있다 짐 내라가 냉동고에 갖다 놓고 해야제"
모호텔의 요리장으로 있는 큰아들 역시 안동대학에 응시하여 합격을 했지만 떨어졌다고 부모님을 속이고 친구들과 같이 노동판에서 돈을 벌어 안동의 요리학원에 등록하여 다니면서 요리사 자격증을 땄다고 한다. 처음 상경하여 가락동 시장 근처의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야채 다듬는 일부터 시작하여 호텔의 요리장이 된 지금도 그는 헛돈 한 닢 쓰는 일이 없단다.
"스물 아홉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이유는 뭐라캐야 카노? 가-는 돈을 너무 알아 안되는기라. 처음 같이 일하던 아지매가 보이 아가 착하이 저거 딸을 소개시켜 좃는기라. 몇 번 만나다 아가씨가 오빠 옷 하나 사줘 그러기에 백화점에 데리고 갔는가보지. 팔십만원짜리 옷을 골라 쥐더라나. 아이쿠 뜨거워라 싶어 다음부터는 다시 만나지도 않고 지금 선보라 캐도 아직은 선도 안 보고 열심히 돈만 버는기라. 가-는 어릴 때 부터 그랬어요. 지는 나중에 커 가지고 사장님이 되가 4층집에서 사는데 1층은 가게, 2층은 조부모, 3층에는 부모님, 저거는 4층에서 산다 캤지요. 그때는 조부모님이 계실 때니까…"
고생하시는 부모님들을 지켜보며 알뜰살뜰, 착하게 살았을 4남매의 모습이 충분히 그려진다. 인간막내라는 말이 있듯 많은 막내들은 자기만 알기 십상인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를 따라 나서는 막내가 있으니 형, 누나들은 더 말해 무엇하리.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할까?
"이래 물건 파다 보마 눈 어둡은 아줌마 혼자 나오거든요. 그래 거서 와가 뭐 주소 카먼 얼마짜리 얼마짜리 있니더 그마 얼마짜리 주소 카거등요. 그마 다-리한테 육천원짜리를 그 아지매한테는 오천원에 주거등요. 그마 다른 아지매가 카는기라. 왜 내 한테는 육천원 받고 거는 오천원 받노? 똑같으마 줄 수도 있는데 좀 나은 거 조야 안될라카마 맞다 카는기라. 맨날 그 아지매 혼자 나오면 한 두 개씩 더 집어주고, 힘들게 사이 다른 사람들도 내 천원 내다고 소리도 안해요. 시내 같으면 안되지요. 똑같은 물건 갖고 누구는 오천원 받고 육천원 받으머 안되지요. 여-는 모두 동정심이 있지요. 시내 사람들은 물론 동정심이 있는 사람도 있지만 등다락 같이 내 돈 천원 내달라카는 사람도 있어요."
영천이 고향인 이씨는 열일곱살때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장날을 찾아 다니며 장사를 하고 있다. 외상값을 받으러 찾아갔다가 식량도 제대로 없고 철 모르는 남편만이 산바라지를 하고 있는 딱한 사정을 보고 외상값은 고사하고 되려 쌀 한말을 팔아주고 온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친지의 소개로 오늘 길안 삼거리의 다방 앞에서 어물전을 벌리고 있는 아내 최춘자씨를 만났다. 그니의 고향이 안동인고로 결혼과 함께 안동을 생활근거지로 삼고 안동 인근의 장날을 찾아다닌다. 아내와 함께 장사를 한 지는 10년 남짓. 그전엔 계속 혼자 다녔단다. 다른 장터에는 보통 아내와 함께 가지만 같은 날(5일, 10일) 장이 서는 길안과 온혜의 장날엔 이씨가 물건을 차에 싣고 길안에 먼저 내려주고 온혜로 온다고 했다.
"길안장이 여기 장보다 훨씬 크쟎아요? 내 생각엔 아저씨가 길안장을 보고 아줌마가 온혜장을 보셔야 할 것 같은데…"
"길안의 장이 훨씬 크지요. 거는 사람도 많고, 식당도 많지요. 그이 다 장만해줘야 된단 말이시더. 여는 내가 그냥 조도 다 그냥 가져가지마는, 새벅부터 식당을 여이 내가 일찍 델따조야 된단 말이시더. 여는 식당이 세 군데 분이지마는 거는 식당도 많으이 일일이 손질을 다 해조야 되지요. 지금 아마 정신이 없을 게시더."
풍산에는 야채를, 길안에는 어물을, 온혜장터엔 야채, 어물, 과일을 싣고 온다. 길안은 장이 너무 커서 아주머니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벅차서, 또 차에 싣고 내리는데, 전을 펼치고 걷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어물만 취급하고 있다.
장터에서 처음 만난 옷가게 최씨 내외나 또순이 아줌마는 전보다 경기가 못하다고 했는데 특이하게도 이씨는 장사가 점점 나아진다고 했다. 온혜장에서 하루 매상은 50만원 내외. 이문은 얼마가 될 지 모르지만 장꾼이 별로 보이지 않는 장터에서의 매상으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와 두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심심치않게 손님이 찾아와 채소도 사가고, 어물도 사가고, 마침 처음으로 운동회를 하게 되는 1학년 꼬마는 엄마와 함께 찾아와서는 밤, 사과, 참외, 포도 등 갖가지 과일을 만 칠천원어치나 샀다. 이씨는 아무 말도 없는 엄마에게 사과, 참외, 배, 포도를 한 개씩 덤으로 준다.
"누군지 모르지만 꼬마야 너 수가 났다. 처음하는 운동회 때 아저씨가 잘 달리라고 이렇게 더 주시네"
지켜보고 있던 내가 꼬마를 쳐다보며 말을 건네니 윗니가 빠진 이를 드러내며 입이 코에 걸린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엽다.
"두개씩 주마 더 좋겠지만 그면 아저씨 장사 밑지고 내일 운동회 때 친구들과 노놔 먹어라."
이씨는 가볍게 빰까지 쓸어준다.
"여-(온혜) 온 지 햇수로 12년이시더. 대부분 얼굴을 알지요. 골골이 있다가 장날이면 나와서 물건을 사 갖고 가요. 차 한 대 오머 한 사람씩 나와 이것저것 사요. 물건은 믿을 만 하이 보지도 않고 얼마짜리 뭐 주소 그머 내가 주는대로 갖고 가요. 한여름 한창 바쁠 때는 한 사람이 이웃집, 두집, 세집 장을 봐가는 수도 있어요. 어느 장이든 일곱시 정도까지는 있어요."
30년을 넘게 안동에 살았지만 그의 말씨는 안동말씨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천 말씨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다. 자기 물건을 사 주는 식당 주인들 때문에 점심은 이 식당 저 식당 돌아가며 먹는다고 했다. 장의 규모에 따라 어떤 곳은 두달에 한 번 가게 되는 식당도 있단다.
나와 만나자 마자 이씨는 콩나물 500원어치를 팔았는데 난 그 양이 많음에 속으로 많이 놀랐었다.
"아까 보니 콩나물을 엄청 많이 주시데요?"
"그이_ 모두 우리집에 오는기라. 조-는 장사한지도 얼마 안 됐고, 난 오래 되었고, 많이 주니까…"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오늘, 자기의 분수를 지키며 큰 욕심없이 살아가는 장꾼을 만나 다행이다. 장터에서 아버지를 도우며 착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를 만날 수 있음은 더욱 큰 행운이다. 그들4의 가정에 따듯한 햇살이 넘쳐나기를 바라며 젊은이에게 준비해 간 책을 주었다. 장꾼이 적어 염려했던 처음과는 달리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름다운, 정말로 아름다운, 부자간의 얼굴을 떠올리며 난 내내 충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