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암정 이야기(글/윤천근)창암정 앞에서는 하늘조차도 휘돌아 흐른다
풍천면의 창암정에 갔다.
이른 봄이었다. 햇살은 따사로웠으나 바람이 조금 찼다. 구담의 장거리에서 실망스러운 점심을 먹었으나, 장거리 한쪽 어떤 상점 앞에 내다놓은 청매 화분에서 일찍 핀 매화꽃이 몇 개 웃고 있는 것을 본 것으로 기분은 조금 호전되었다.
낙동강을 건너서 창암정이 있는 신성마을 영역으로 들어갔다. 길은 심하게 굽어돌고 있었다. 물도 길을 따라서 굽어 돌고, 산줄기는 또 물을 안고서 굽어 돌고 있었다. 길도, 물도, 산줄기도 굽은 창자 모양으로 심하게 휘돌고 있으니, 거기 하늘인들 온전하겠는가? 하늘도 신성마을 영역에서는 제 모양으로 펼쳐져 있지 못하고 동으로 서로 휘돌아 흐르는 듯 하였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은 방향이었다. 어느덧 우리는 들어온 방향 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 길이 분지를 타고 돌아 완전히 폭 좁은 말굽모양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길이 완전히 분지 속으로 들어온 지점을 아래쪽으로 지나쳐 가려 할 때쯤, 길 가 절벽 바위 위에 정자 하나가 올라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자보다도 먼저 우리의 시선 속으로 파고든 것은 정자 아래 쪽에 자리잡고 있는 시비였다. 새로 세웠다는 시비의 각진 화강암 형상은 멀리서 보기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우정 그 시비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위쪽 절벽 위에 날렵한 몸체로 올라앉아 있는 창암정에만 시선을 집중하였다. 시비는 나중에 따로 살펴볼 요량이었다. 시비에 먼저 눈이 쏠리다 보면 창암정을 감상할 수 있는 공정한 눈을 잃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비는 창암정과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신성마을 발치에 차를 대고, 신성마을 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창암정에까지 이르는 산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은 상당히 넓었다.
한 5분쯤 천천히 걸어 올라갔을까? 창암정 윗편으로 썩 나섰다. 위쪽에서는 창암정 지붕이 내려다 보였다. 창암정 뒤편의 높고 넓은 반석 위에 흙이 덮이고 나무와 풀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었다. 반석의 높이는 창암정의 지붕보다 조금 높았다. 창암정에는 바로 그 반석 아래 쪽으로 한사람의 통행이 겨우 가능할 정도로 열려있는 절벽길을 10여미터 걸어 내려가야만 이를 수 있었다.
그 절벽길의 끝, 창암정의 뒤쪽 절벽 끝에는 생강나무가 노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3월은 불안정한 계절이라 했던가? 날씨가 풀렸는가 하면 다시 추워지기 일쑤이다. 생강나무는 그런 3월 날씨의 변덕스러움에 대해 유감이 많을 것이다. 겨울 한풍을 이겨내고 산 속에서 어떤 나무보다 앞서 처음으로 꽃을 피워대는 생강나무가 아니던가? 갑자기 찾아든 꽃샘 추위에 생강나무의 노란 꽃잎은 말갛게 얼어 있었다. 노란 얼굴이 말갛게 얼어 있는 탓에 생강나무 꽃은 더욱 신선한 느낌이었다.
정자 안으로 들어가 앞을 내다보며 서 보았다. 거기서는 길도, 내도, 산도, 세 겹으로 뒤엉켜 급하게 휘돌고 있는 모습이 가장 분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들을 껴안고 있는 들판도 심하게 휘돌고 있었고, 들판 위의 하늘마저도 그러하였다. 잠시 가벼운 어지럼증이 나를 사로잡았다. 급하게 휘돌고 있는 분지 안의 땅과 하늘을 오래 돌아나왔을 바람 한줄기가 실타래처럼 풀리며 나의 뺨을 간지럽히고 사라져간 다음에야 나는 정신을 수습할 수가 있었다.
창암정
산 끝으로 나 앉은 절벽의 위쪽은 폭이 좁았다. 처음에 절벽은 위쪽이 평탄한 너럭바위 형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절벽 위에 대좌를 쌓고서야 그 위에 작은 집을 올려 세울 수 있었던 것이리라. 대좌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4층으로 쌓아 올렸다.
정자는 사방이 열린 마루방 하나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누각 형식의 정자인 셈이다. 방이 따로 붙어있지 않으니, 이 정자는 여름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숙식하며 기거하기는 불가능하고, 가까운 집에서 기거하다가 올라와 조용히 책을 읽거나 자연을 감상하는 데에 이용되었으리라.
정자의 초석은 크고 넓적한 자연석을 썼다. 정자의 규모나, 기둥의 굵기에 비해 볼 때, 너무 커다란 판석이었다.
정자는 아래쪽이 들려 있었다. 초석으로부터 정자의 바닥 판자면 까지는 1미터가 약간 안되는 높이였다. 초석과 정자 아래쪽 땅바닥, 그리고 초석 윗면의 정자 기둥 아래쪽까지, 담쟁이 넝쿨이 빈틈없이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지심으로부터 정기를 길러내 정자에 생명력을 부여하여 주는 혈맥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측면 3간, 정면 4간 구조의 팔작지붕이었지만,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가 통상의 경우보다 아주 가까웠으므로, 정자의 마루방은 대 여섯 사람 이상이 자리잡고 앉으면 비좁으리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기둥과 판자에는 빠짐없이 주사칠이 되어 있었다. 주사는 칠한지 오래 된 탓에 색감이 탁하였다. 천장의 서까래 사이에는 백토칠이 되어 있었다. 주사칠된 서까래 사이에서 백토의 흰색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창암정 안에 현판은 하나만 남아 있었다.
"현판도 누가 다 훔쳐가 버리고 없어요."
마을 초입에서 만났던 사내가 우리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사내는 거기 뭐하러 올라가느냐는 느낌을 담아서 그렇게 말했었다. 남의 정자에 걸린 현판까지 훔쳐다 팔아먹는 이 자본주의 세상은 정말 구제불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달랑 하나 남은 현판에는 갑술년 한여름에 후손인 석호가 지은 글이 쓰여져 있었는데, 창암정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창암정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여기 들른 것이므로, 무엇보다도 정자의 기문이나 중수기 등의 현판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였다.
그렇게 현판 하나 없고, 또 그 동네엔 정자에 대해서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정자의 역사는 예측조차 하기 어려웠다. 다만 창암정이라는 글자가 씌여진 정면 현판 한쪽에 숭정 재병인 홍락성 서라는 작은 글씨들이 덧붙여져 있는 것이 하나의 단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나라 의종의 통치기간인 숭정년간에는 병인년이 없다. 그러므로 이 현판에 보이는 재병인이라는 말은 숭정시대 이후 두 번째 맞는 병인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 때는 1746년, 영조 22년이다.
2000년에 발간된 《안동문학》23집에 실린 <홍간의 삶과 시 세계> 속에는 <창암정제영>이라는 제목의 홍간의 시가 보인다. 이 시는 창암정 아래 문학비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보면 홍간 생존 시기에 창암정이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창암정은 일단 홍간의 정자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홍간은 누구인가? 위의 글 <홍간의 삶과 시 세계>에 의하면 홍간의 출생년은 미상이나 타계한 때는 1304년이다. 그 글에서 홍간의 이력을 알게하는 구절을 여기 조금 옮겨 보자.
"홍간은 충의와 문장으로 고려조에 현저하였고, 12대가에 꼽힌 바 있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평보 또는 운부, 호는 홍애요, 풍산홍씨의 시조인 홍지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266년에 민지 등과 더불어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후 원주목사, 비서윤, 도첨의사인, 지제고 등을 지냈는데, 언사 때문에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봉직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고려 조의 이 홍간이 창암정을 지었다면, 창암정의 역사는 700년에 이르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너무 오래이므로, 사실로 믿기 어렵다. <창암정 제영>이라는 시가 있으므로 이 역사를 믿지 않을 수도 없고, 정자로서는 너무 오랜 역사이므로 그대로 믿기도 어려운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따라서 나는 창암정의 역사를 내 입으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대신에 경희대학교 교수 김진영과 문학평론가 홍용희가 번역하고 주를 단 《홍애선생 홍간 시집》이라는 책 속에서 홍기원이 써 놓고 있는 구절을 여기 옮겨놓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창암정은 홍애선생께서 동래현령으로 계실 때 창건하신 정각임에는 틀림 없으나, 고증할 자료와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연대와 시기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홍애선생의 생애가 고려 충렬왕 갑진년에 향제에서 마쳤다고 전하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창암정의 기원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약 690여년 전까지 소급됨을 알 수 있다. 홍애선생께서는 안동부 신성포 탑평촌 우측의 창벽 위에 창암정을 세우시고 여기에서 학덕을 닦으시면서 시문에 심취하시어 --- 고려조의 문인 12대가의 한 분으로 추앙 --- 창암정의 내력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정각이 소실되어 한때는 한칸의 띠풀집이었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 후 영조 25년 기사년(1749)에는 정각의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이듬해 3월에 중건공사가 완성되자 경향 각지에서 후손들이 모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그 후 수백년 동안에 퇴락한 창암정을 1962년과 1981년 두 차례에 걸쳐 부분적으로 보수하였고, 1993년에 와서야 비로소 옛모습으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것이 내가 구할 수 있었던 창암정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자세한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토씨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창암정은 근래에 여러차례 보수된 정자이고, 1993년에는 보수 차원이 아니라 다시 지었다고 할 정도로 개축된다. 그러므로 설령 홍간 시대에 창암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현재의 창암정과 같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옛 모습으로 중수하였다고 하지만, 아무 자료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옛 모습을 측량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의 창암정과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홍간이 거기 정자를 엮어놓고 지냈다는 것은 분명한 듯 싶다. <창암정제영>이라는 시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 시는 《홍애선생유고》에는 없고, 《풍홍보감》, 그러니까 풍산홍씨의 보감이라는 책에 실려 전하여진 것이라 한다. 김진영 홍용희 두 사람의 번역을 통하여 이 시를 여기 소개하여 본다.
<창암정에서>(창암정운)
강가에선 고기 낚아 버들에 꿰고/
밭두렁에 차조 거둬 여린 소 등에 실었네/
시골에서 사는 삶이 이만하면 족하니/
국화주 익었거던 가을 경치 구경가세/
창암정은 자연 속에 들어가 있되, 자연 속에 차단되어 있는 정자는 아니다. 절벽바위 위에 올라앉은 정자가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시내와 농토, 마을의 집들을 내려다 보고 있고, 시내와 농토, 그리고 마을의 집들에서도 고개만 길게 빼면 그대로 창암정이 건너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창암정은 정자의 문법에 충실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정자의 문법은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를 대강령으로 한다. 그것은 생활로부터의 차단,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격리를 전제로 한다. 창암정이 놓여져 있는 지점은 생활의 변경, 자연의 변경일 뿐이다. 그것은 위의 시에서도 드러난다.
4연으로 되어 있는 위의 시 중 앞부분 2개의 연은 생활에 관한 이야기이다. 마지막 1개의 연은 자연에 관한 이야기이고, 세 번째 연은 생활을 자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 위한 마음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창암정에 들어앉아서도 이런 시를 쓸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창암정은 생활 속으로 깊숙히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 배우기가 주 목적인 정자가 아니라 생활 건너다 보기가 본령인 정자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창암정은 조선시대적 정자미학의 주류적 양상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바위 절벽의 미학
창암정으로부터 나와 도로를 통해 창암정이 서 있는 바위절벽 쪽으로 접근해 보았다. 도로는 창암정의 바위절벽 바로 아래로 휘돌아 나간다. 바위절벽은 10여미터 높이는 될까? 가까이 갈수록 창암정이 올려다 보이는 각도가 급해진다. 그리하여 60도 정도 되는 시선의 각도를 유지할 때쯤 되었을까? 나는 거기서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었다. 그 각도에서 올려다 보는 창암정이야말로 환상적인 미학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위는 탁한 회색조로 착 가라앉은 색감을 연출하여 주고 있었다. 바위 표면에는 굵은 담쟁이 넝쿨이 꿈틀거린다. 아직 잎이 나기 전이라, 담쟁이 넝쿨의 색감도 흐릿한 갈색조이다. 그것은 흡사 바위의 근육이 자잘하게 꿈틀거리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 위의 창암정은 기둥의 위쪽이 사선으로 잘라져 보였고, 처마 지붕의 아래쪽도 역시 그쯤의 형상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붕 꼭대기, 용마루가 삼각형의 원뿔 모양으로 그 위로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둥의 탁한 주사칠, 서까래의 조금은 밝은 주사칠, 서까래 사이를 메우고 있는 백토, 기와의 약간 바래보이는 검은 색, 그리고 그 위로 약간 흐릿한 푸른색의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모든 색깔들은 서녘으로 조금 기울어 있는 태양이 던져주는 부드러우면서도 냉정해 보이는 햇빛에 비춰져서 약간은 휘발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였다.
색감의 적절한 통일성, 그러나 조금은 흐릿한 색조들, 그 속에서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거대한 절벽바위의 장중한 분위기, 고풍의 정자가 내 마음 속에 던져주는 역사의 무게 --- 그리고 참, 그 소나무 두 그루. 동향을 하고 있는 정자의 현판 앞에는 바로 두 그루의 다리통 만한 굵기의 소나무가 양쪽으로 벌려 서 있었다. 위에서 보았을 때는 별로 볼품이 없는 나무였다. 껍질도 거칠게 보이고, 거기다 들떠 있기까지 하였으며, 그냥 삐죽 정자의 처마 높이까지 거의 직선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소나무도 절벽 아래, 60도의 시선 각도 속에서는 환상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소나무의 위쪽, 솔잎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길어올리는 색감이 뇌살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형광빛의 초록색으로, 적당히 차가워보이는 황금색으로, 아지랑이처럼 꿈틀거리며 조금씩 비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탁한 색감의 통일성 속에 적당한 탄력을 부여해 주고 있었다.
동화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 어두우면서도 어둡지 않고, 무거우면서도 무겁지 않고, 흐릿하면서도 흐릿하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알 수 없는 즐거움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런 느낌을 역사로 붙잡아내기라도 하려는 심산일까? 방위 한쪽에 그때까지 숨어있던 글씨가 나의 시선을 잡아끈다. 풍산홍씨세장지지, 풍산 홍씨가 대대로 묻혀 산 곳. 글씨는 뚜렷하였지만, 바위의 속살 속에 묻혀있는 듯 하여서, 그것이 이 바위 절벽의 미학을 해치지는 않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역사의 무게를 더하여 이 바위절벽의 미학을 완성시켜 내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문학비는 자리를 잘못 잡았다
처음 창암정 영역으로 들어올 때부터 눈에 거슬리던 문학비였다. 비석을 세워 역사를 건져 올리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을 추억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굳이 나무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꼭 거기, 그런 모습으로 세워 놓아야 했는가는 의문이다.
문학비는 바위 절벽의 발치에 바짝 붙어서 있었다. 길과 바위절벽이 만나는 곳은 원래 물을 모아 흐르게 하는 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물길의 흐름을 끊고 들어가 문학비는 터를 잡았다. 자연스럽지 못한 위치선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문학비는 결정적으로 창암정의 통일적 미학을 깨트리고 있었다.
창암정의 미학은 자연의 미학이다. 그곳에서 보이는 선과 면은 일정하게 굽어져 있다. 부드럽게 흐르는 것이 자연 미학의 특징이다. 그 속에는 직선은 없다. 직선인 듯 하지만 곡선을 품고 흐르는 것이 자연 미학이다. 따라서 자연미학 속의 직선은 날카롭게 우리의 시선을 찔러오지 않는다. 자연미학 속의 면도 역시 조금씩 꿈틀거리며 무너져 있다.
따라서 자연미학 속에서 면은 영역을 분명하게 구획하여 내지 않는 것이다. 자연미학 속의 색깔은 조금씩 휘발되어 다른 색깔 속으로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자연미학 속의 색깔은 우리를 자극하여 의식을 강렬하게 잡아끌지 않는다. 이렇게 자연미학은 총체적으로 나직한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은연중 갖추어내는 것이다.
창암정 아래, 길의 한켠, 절벽 바위의 아래 쪽으로 바짝 다가서있는 문학비는 창암정 영역의 자연미학을 날카로운 직선으로, 반듯한 사각의 면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검고 흰 돌의 색감으로 단숨에 무너뜨려 버린다. 무엇보다도 이 비석이 갖는 약점은 창암정으로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창암정 영역은 이 문학비에 의하여 점유되어 버리는 것이다.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장소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의미이다. 그러한 역사의 무게를 현대가 점유하여 버린다면, 그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한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장소를 일부러 만들어 내려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따라서 현재가 역사의 현장 속으로 밀고 들어가서 의미를 덧칠하고자 할 때에는 특별히 더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를 밀어내고 현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창암정의 문학비는 이 점을 웅변으로 증명하여 준다. 그것은 자리도 잘 못 차지하고 앉았을 뿐만아니라, 형상과 색감도 너무 도드라진 것으로 마련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리하여 창암정을 더욱 꾸며주는 문학비가 아니라, 창암정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창암정의 미학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리는 흉물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꾸밈이 지나칠 때에는 미학은 사라지고야 만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우리는 절절히 확인할 수 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