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우 할아버지의 살맛나는 세상 이야기(글/이미홍)
겨울바람이 제법 매운 날이었다. 대두서 마을로 접어드는 길은 한적했다. 옆에서 일행이 할아버지에게 길을 확인하려 전화를 하니 먼저 몇 분이 오시느냐고 묻기부터 하신단다. 괜시리 손님 접대한다고 마음을 쓰실까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빨간 오토바이를 탄 할아버지가 길 한 켠에 오토바이를 세우시고는 손짓을 하신다. 마중을 나오신 거다. 그러고는 따라 오라는 손짓을 하시더니 어느새 골목길로 들어서신다.
그런데 좁은 골목길에 세워진 차를 비켜가느라 신경을 쓰는 사이 순식간에 할아버지를 놓치고 말았다. 골목 저 앞까지 갔다가 중간에 작은 샛길이 있던 것을 생각하고 골목을 다시 돌아 나오려는데 눈앞에 어느새 또 할아버지가 서 계신다. 그리곤 또 손짓으로 앞을 가리키고는 오토바이로 순식간에 골목저쪽으로 사라지신다. 집이 몇 채 없는 시골마을 골목길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닥다닥 붙은, 거기가 거기 같은 도시의 어느 골목길이었다면 우리는 할아버지를 열두 번도 더 놓쳤을 것이다. 그리고는 종내 할아버지를 잃어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할아버지네 집 앞 골목은 몇 안되는 집집이나마 담 너머로 안이 설핏 보이는데다, 대문 안을 들어섰다 아니다 싶어 되돌아 나와도 딱히 내다보고 뭐라는 이도 없었다. 그리하여 정말 두 번이나 금방 앞에 보이셨다 금방 오토바이와 함께 사라져버린 할아버지 집을 무사히 찾아들 수가 있었던 셈이다. 마당에 일제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조금은 썰렁한 마루를 지나 안방으로 들어가니 방안이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가 주방에서 다과상을 들여오셨다. 방 한쪽에 전자오르간이 놓여 있었고,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다. 그리고 벽 한쪽에 여러 개의 명찰이 꽂혀 있었다. ‘동부장수대학 다윗반 김용우, 안동시 1일자원봉사공무원 김용우, 안동교회 노인대학 김용우’ 같은 명찰들로 알고 보니 요즘 할아버지의 생활을 말해주는 것들이었다.
못하는 것이 없는, 아니 할 줄 아는 것이 너무 많은 김용우 할아버지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타고난 끼와 재주로 아주 재미있게 말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김할아버지가 이렇게 재미있고 바쁘게 살아갈 수 있는 건 따지고 보면 할아버지의 살아온 내력과 관계가 있다는 거다.
고향 대두서로 돌아오다
아버지는 타고난 선비셨다. 서당을 통해 한문을 배우셨고, 학문에 뜻이 깊었다. 그리고 신식학교도 다니셔서 새로운 세상 물정을 받아들이시는데도 남다른 분이셨다. 1920년경,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름대로 살아갈 방도를 찾으시고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렇게 해서 당시 여섯 살 된 김용우 할아버지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던 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 아버지를 따라간 홋카이도(북해주)는 눈이 많은 추운 지방이었다. 일본으로 가자마자 아버지는 그를 소학교에 입학부터 시켰다. 눈과 얼음이 많은 그곳에서 그는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탔고, 여름이면 수영을 했다.
그렇게 그는 아이에서 소년이 되어갔다. 그곳에서 소학교를 마친 그는 아버지를 따라 동경으로 갔고 특기를 살려 동경에 있는 체육전문학교를 갔다. 기계체조는 물론이고 육상도, 유도도, 수영도 배웠다. 그래서 김할아버지는 지금도 운동이라면 자신이 있다. 그가 2학년이 되었을 때 대동아전쟁이 났다. 모두들 보따리를 싸서 귀국선을 탔다. 고향을 떠난 지 17여년 만이었다.
그들 가족이 탄 것은 미국 군함정이었다. 배 안에서 통역이 필요하다 했다. 그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던 이종사촌이 떠미는 바람에 그는 통역을 맡았다. 그런데 철들기도 전에 일본으로 간 까닭에 그는 우리말이 서툴렀다. 그래서 이종사촌이 그의 영어통역을 다시 우리말로 설명해주는 일을 맡았다. 덕분에 귀국 길은 편했다. 그렇게 김할아버지네 식구는 다시 고향인 대두서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돌아온 고향 마을을 그는 그 이후로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오늘까지 살아왔다. 고향을 멀리 떠나 보았던 그였기에 돌아온 고향 마을이 주는 너그러움과 푸근함이 유달리 더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인텔리 할아버지
대두서로 돌아온 김할아버지네는 정미소를 했는데, 식구들이 모두 매달리다시피 한 정미소는 의외로 잘되어 수입이 꽤 괜찮았다. 귀국 당시에는 서툴렀던 우리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집안 살림 걱정도 없어지게 될 즈음, 그는 당시로서는 인근에서 두서너 명밖에 안되는 인텔리에 속했던 까닭으로 서후면사무소에서 행정 서기로 일을 하게 되었다.
면사무소 서기로 일하면서 일찍이 서후면 아전을 지냈던 윗대 할아버지의 이름을 지난 서류에서 간간이 확인하기도 했는데, 덕분에 마을의 내력이나 집안 내력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두서라는 마을 이름이 ‘한도사’ 라는 절 이름에서 유래하였다는 것도 그때 나름대로 마을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세월이 어떻게 그렇게 날래(빨리) 가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교회를 다니는데, 그 덕에 바쁘게 지내죠. 한 칠 팔년쯤 전에 집에 내자가 몸이 아파서 안동성소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그때 신경을 많이 써주시던 수간호사님이 권하시기도 하셨고, 목사님도 그렇고 주위에서 권유가 많아 다니기 시작했어요.
기독교 노인정이라고 있는데 거기 나가서 바둑도 두고, 친구들하고 자원봉사도 하고 그래요. 내자가 간 지 칠팔년 되는데, 그 뒤로 쭉 혼자 지내고 있지요. 그래도 교회도 나가고 노인대학도 다니고 하니까 친한 친구도 있고 해서 바빠요.”
자타공인 일본어 선생님
할아버지의 일상에는 일본에서 지냈던 학창시절의 영향들이 생활 곳곳에 스며 있었다.
“야구 중계 같은 걸 보자면, 일본말로 하는 건 귀에 쏙쏙 들어오는데, 우리나라 아나운서들이 빨리 중계할 때는 잘 못 알아듣는 게 있어. 워낙 어릴 때 귀에 박힌 거라 그런지 일본말이 더 익숙하다고 할까 그런 면이 있지요. 그래 내 혼자 시간 날 때마다 성경 구절도 써보고 일본어 교본 보고 글씨 연습도 하고 그러지요.”
그 덕분인지 아직도 일본말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김할아버지다.
“요새 하도 심심해서 히라가나하고 가타가나하고 내가 이렇게 적어서 친구들한테 가르쳐주고 해요. 모두들 오래돼서 잊어버려 생각이 안난다고 해서 글자도 가르쳐주고 같이 공부도 하고 하는데 모두들 재미있다고 열심히 잘 따라 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지요.
그전에 학원에서 일본어 가르치러 오라고 연락이 왔는데 그때 할마이가 안 된다고, 안 간다고 해서 못 갔어요. 마누라 두고는 못가니까, 가서도 안되고. 그래도 그때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은 더러 했었지요.”
그러고 보니 서울의 학원에서 초빙을 할 정도로 김할아버지의 일본어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이라는 말이다. 할아버지의 일본어 실력은 시에서도 인정을 받은 것으로, 할아버지는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1회 때부터 일본어 통역으로 활동을 해오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국제대회 경험이 적어 변변한 통역 자료조차 없어 할아버지 스스로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같은 유적지나 안동에 유명한 인물에 관해 공부를 해서 일본어로 안내 자료를 만들어가지고 다니며 통역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
화요일은 자원봉사를 가는 날이다. 노인대학에서 한 달에 한 번, 서로 만나 교류도 하고, 좋은 일도 하고 한다. 지난 설에는 역 앞으로 자원봉사를 나갔다. 자식들이 모두 서울이나 대처에 나가 있어 명절이면 아들네 딸네 자식들이 줄줄이 내려오느니 노인 두 분이 자식들이 있는 도시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 분들 차표도 끊어드리고, 자식 줄라고 보따리보따리 싸 가는 짐도 들어주고 하는 봉사를 하고 왔다고 하신다.
여름에는 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지만 겨울에는 아무래도 춥기도 하고 빙판길이나 일찍 어두워져서 위험하니까 마을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간다. 교회에도 가고, 노인대학에도 가고, 자원봉사 하러도 간다. 무용도 배우고 서예도 배우고 스포츠댄스도 배운다. 그리고 동무들한테 일어도 가르쳐주고 글씨도 함께 배워 쓴다.
그리고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러도 간다. 좋은 친구라는 말을 할 때 할아버지의 어조는 좀더 은근해진다. 마음에 맞는 여자친구가 있어 좋다는 말씀 같다.
“오토바이를 탄 지 내가 칠년 정도 되는데, 이게 그래도 안동에 이 모델이 없을 때 내가 샀는데 이게 디자인도 그렇고 부속도 일제가 돼서 값도 꽤 나가요. 한 이백은 넘을 기래. 이제 나이가 있어서 일단 오토바이에 올라타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돼요. 남들이 알면 흉볼지도 모르지만, 전에는 앞 뒤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을 때 나름대로 두 손을 놓고도 타 보고 이렇게 저렇게 재주도 부려보았지만 아차하면 큰일이니까 이제는 아주 많이 조심을 하지요.”
언제 시간이 날까 싶지만 짬짬이 농사도 짓는다. 지난해는 문중에서 돌려가며 짓는 문중답이 차례가 돌아와서 벼농사도 짓고 배추 농사도 짓고 고구마 농사도 지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제 농사는 힘에 부치기도 하고 재미도 적어 그만 하려고 한다.
사실 농사를 놓을 나이가 벌써 지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식들이 용돈을 부쳐 주어 농사지을 필요성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80이 된 김할아버지는 이제 농사 말고도 재미있는 할 일이 너무도 많다.
서예를 배우면서 글씨 쓰는 맛을 아신 김할아버지는 노인대학에서 서예를 배우는 동무들과 요 몇 년째 도산별시에도 참석을 했다. 비록 아직 대과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배우고 참석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글씨야 열심히만 하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늘 수 있는 것이다.
대구MBC에서 하는 “고향이 좋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대두서 마을로 취재를 왔을 때, 담당PD는 재주 많은 김할아버지를 한 눈에 알아보았고, 할아버지는 덕분에 인근에서 스타가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찌 대두서 마을에 숨어 사시는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대두서에 묻혀있는 조약돌 김할아버지
말을 하고 보니 할아버지는 정말 대두서 마을에 묻혀 있는 반짝이는 조약돌 같다.
“주위에 친구들이나 동네에 항렬이 어린 사람들이 그래요. 할아버지는 할 게 많아서 심심하지는 않겠다고요. 특히 마을에 상처하고 혼자 있는 사람들이, 혼자 있으면 참 막연하다 그래요. 촌에서 평생 농사만 지었지 글도 모르고 취미라고는 달리 배운 게 없으니까요.
그에 비하면 저는 운이 좋은 편이지요. 제가 또 운동이나 공부나 뭐 배우는 거를 좋아해요. 가만히 앉아 있기보다 책도 보고 글씨도 쓰고 하면 시간도 잘 가고 정신 건강에도 좋고요. 우리는 병원이나 어디를 가도 엘리베이터를 안 탑니다. 약간 숨차다 싶을 만치 빨리 걸어 올라가도 아직은 끄떡없으니까요.”
수영 실력도 수준급이어서 학교 다닐 때에는 5인이 한 조가 되서 왕복 4킬로를 횡단해야 하는 장거리 수영대회에서 3등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볼 일이 있어 대구에 가면 그때 함께 수영을 했던 친구들을 만난다.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수영에는 자신이 있다고. 어디 수영뿐이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고 쓰고 연습한 덕에 아직도 웬만한 젊은이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치 일어도 영어도 실력이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그러니 그 옛날 배운 사람이 귀했을 때야 그 값어치가 오죽 더 빛났을까?
“머리는 둔하지만 부모덕으로 그래도 이 근방에서는 내가 많이 배운 편이라 동네 일 집안 일 많이 봤지요. 집안에 문서에 관련된 일이나 결혼할 때 초편지 같은 것도 많이 써봤고 면에도 있었고 동장 일도 13년이나 봤지요. 농촌에서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적고, 가깝다고는 해도 어중간해서 시내에서도 멀고, 해서 요즘도 내 생각에는 어린 학생들도 가르치고 동네 무료한 노인들한테 동무삼아 글공부도 가르치고 싶지.
한문도 가르치고 싶고 일어도 가르치고 싶지만, 내 마음뿐이고 나이 들어 혼자이다 보이 조심되는 게 많지요. 혹 나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이제 와서 배워 봐야 뭐 하노.’ 하는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대로 바쁘고. 그래 마음을 비우고 내 혼자 읽고 쓰고 하지요.”
팔십 나이에 물구나무서기 하다
팔십이라는 나이에 아직도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김할아버지. 십년 저 너머 만해도 두서너 바퀴 재주넘기가 가능했지만 이제는 물구나무서기로 만족한다. 이른 아침 어스름 뒷밭 한적한 곳에서 가끔 혼자 물구나무서기를 해 본다. 턱걸이와 철봉 매달리기도 아직 하고 있다. 그건 어쩌면 자신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확인하며 매일매일 새롭게 힘을 얻는 할아버지만의 소박한 재주넘기가 아닐까.
일년 삼백 예순 날 시간 날 새 없이 바쁘기만 할 것 같은 김할아버지. 할아버지 옷방에는 옷이 일렬로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주방에 밀린 설거지도 없고, 쌓인 빨래거리도 없다. 혼자 사는 노인네 특유의 냄새랄까 일상의 찌꺼기들을 여기저기 흘려놓지 않으려 자신을 다잡으며 살아가는 게 깔끔하고 부지런한 할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보통 다섯 시나 다섯 시 반이면 일어나는데 늦게 자도 그 시간이면 꼭 일어나요. 잠을 적게 자도 맛있게, 달게 자면 돼요. 오늘은 손이 온다고 이렇게 있지만 보통은 벌써 나가고 없지요. 모임에 나가면 나보다 나이 많은 분도 더러 있지만 우리가 이제는 나이 많은 축에 속해요. 그러이 자연 행동에 조심을 많이 하지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모범은 못 되어도 방정맞아서는 안 되거든요.”
말씀하시는 뜻이 어째 본인은 아직 몸도 마음도 건재하지만, 혹은 기분은 젊은이 못지않지만 나이도 있고 하니 품위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자중을 하고 계시다는 그런 뜻이 은근히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느 늙은 수필가는 노인의 일상이 끝없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결코 모를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재주도 의욕도 넘치는 김할아버지는 자신이 하기에 따라서 노년의 일상이 재미있고 신나고 즐거울 수도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건 이제는 내 차례가 아님을 인정하고 현재의 내 자신에 만족하고 몸은 비록 늙었어도 정신은 늘 먼 데를 바라볼 줄 아는 낭만과 여유를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언제고 꼭 한 번 일본에 가 보고 싶은 게 꿈인 할아버지는 그래서 생일이 있는 9월을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다. 연전에 자식들이 팔순 때쯤에 멀리 여행을 보내주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자 하는 여행은 재미가 없다는 김할아버지, 곧 있을지도 모를 팔팔하기만 한 팔순 할아버지의 일본여행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기대가 된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