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재해석, 햇살이 더 어둡다(글/이원규)
지리산에 눈이 오신다. 북풍을 타고 내려온 이 눈발은 시베리아에서 시작해 삼팔선을 넘어 안동을 지나 남도의 땅 지리산까지 숨가쁘게 달려왔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길을 지우고 또 지우며 인간의 길에 대해 새삼 화두를 던지고 있다.
산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고립된 산중의 외딴 집에서 겨울잠에 든 반달곰처럼 웅크린 채 안상학 시인의 제3시집 『오래된 엽서』를 읽는다.
칠흑 같은 밤 그대에게 가는 길
이마에 불을 밝히고 달리는 것은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멀리서 기다리는 그대에게
쓸쓸하지 말라고
쓸쓸하지 말라고
내 사랑 별빛으로 먼저 보내는 것이다.
-「밤기차」 전문
이 시를 읽으며, 몇 번이나 되새기며 산중 고립의 밤에 위안을 받는다. 마치 저 눈밭의 레일을 타고 이마에 불을 켠 밤기차 한 대가 기적을 울리며 지리산을 오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안상학의 밤기차는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마에 불을 밝히고’ 늘 가던 그 길을 재해석하며 가는 중이다.
그렇다. 이 시는 길의 재해석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단 한 문장의 짧고도 단조로운 듯한 이 시가 던지는 메시지는 만만치 않다. 당대의 시인들이 부쩍 ‘길’에 대해 수많은 시들을 써왔지만 대개는 오히려 길이 길에 막히거나 혼돈의 길로 빠지는 형국이 많았다. 이는 길의 재해석이나 반성 이전에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섣부른 욕망 때문이 아니었던가.
안상학이 ‘쓸쓸하지 말라고/ 쓸쓸하지 말라고’ 반복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라 자기 다짐이자 자기 위안이다. 수상한 시절의 ‘칠흑같은 밤’에 외로운 밤기차가 되어 길을 가면서, 고통스럽게 시의 길, 문학의 길, 세상의 길을 가면서 ‘그대 무사한가’ 안부를 물으며 독한 ‘안동소주’를 마시며 ‘쓸쓸하지 말라고’ 주문을 외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하리 설경」의 ‘오직 물 같은 사람이 걸어가는 듯/ 빤하게 길을 내며 흘러가는 냇물’이나 「짐밭골」의 ‘떠나갈 것도/ 돌아올 것도 없다는 듯/ 길도 길을 버리고 산으로 돌아갔다’는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한 권의 시집에 눈길이 머물고, 그 시집을 읽다가 여러 번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리하여 한 권의 시집에 수작이 여러 편이면 이미 성공한 시집 아닌가. 안상학의 시집을 읽다가 문득 창문을 열고 몇 번이고 찬바람을 맞는다. 아직 눈발은 그치지 않았다. 산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도 사라지고 저 눈발 사이로 안상학의 길이 떠오른다.
길을 보지 못하는 그들이
길을 묻는다. 침술원이 어디냐고
길을 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저기 있어요. 손으로 가리키다가
말문이 막힌다.
소매를 잡고 길을 간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눈을 감아본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살면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엄살 떤 적 있었던가
침술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캄캄하다.
귀를 쫑긋 세우는 맹인 침술사
불도 켜지 않은 채
맹인부부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눈다.
거리로 나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다.
햇살이 더 어둡다.
-「맹인부부」 전문
이 시를 읽고 ‘햇살이 더 어둡다’에서 순간 아뜩해진다. 어쩌면 안상학 시인은 이 한 구절을 위해 3시집 『오래된 엽서』를 펴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시적 소재로서의 ‘맹인’이나 ‘햇살이 더 어둡다’는 역설은 좀 익숙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혼돈의 시대, 욕망 과잉의 시대, 폭력의 시대에 안상학 시인의 ‘햇살이 더 어둡다’는 선언은 새로운 반성과 뼈아픈 참회를 요구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합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햇살’은 정작 혼돈 그 자체였고, 욕망이었고, 폭력이었다. 인류사와 한반도 역사가 그러했다.
나는 아직 『오래된 엽서』를 마저 읽지 못했다. 읽기야 다 읽었지만 다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줍잖은 시평 아닌 감상문도 이 정도로 끝내야 한다. 더 좋은 시들이 있지만 나는 아직 ‘햇살이 더 어둡다’는, 어쩌면 비시적일지도 모르는 이 슬로건에서 한 발도 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동의 도반 안상학의 질문에 나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안상학이 책갈피 속에서 발견한 ‘오래된 엽서’에 이미 예언처럼 ‘햇살이 더 어둡다’고 쓰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짧은 문장 하나가 문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며 우리 시대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