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주와 술순사들(글/김연숙)
반세기만에 담가보는 동동주
과일 아니 약초에 도수 높은 소주를 부어서 만든 술이 아닌, 찹쌀을 찌고 누룩을 빻아 곱게 섞어서 단지에 넣고 한지를 덮어 방 한 켠에 두었다.
날씨가 더워서일까? 하루가 지나자 온 방 가득한 술 냄새…
뚜껑을 열어보니 동동 넣어 둔 쌀알이 모두 떠올랐다. 술맛을 제대로 모르는 나는 한 술 입에 넣었지만 제대로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마침 저녁에 단체 모임이 있기에 하얀 사발에 조롱박을 띄워서 내었더니 처음 해 본 솜씨치고는 성공적이라며 부라보를 터트렸다. ‘한 잔 술에 시름을 씻는다.’는 노래가사처럼 나는 이럴 때 피로가 싹 가신다.
음식이란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만들지만 손님의 입맛과 나의 정성이 맞아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오시는 손님마다 기호가 다르고 식성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음식을 만드는 순간만은 즐거웁기에 이 일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요리선생님 말씀처럼 열심히 만들어서 맛나게 먹으면 기분 좋고 맛이 없으면 다시 하면 될 일이다.
단체 손님이 모이는 날이면 의례히 나오는 이야기들, 어디서 먹은 음식이 기막히다며 열 올리는 남자 분들, 군대 얘기, 아련한 첫사랑 얘기, 그러다 취기가 오르면 잔은 돌고 도는 세상처럼 사람들을 흔들기 시작한다.
술 순사들이 들이닥치다
내 어릴 적 추억 속에 살아있는 아찔한 흔들림의 기억이 나를 빙그레 웃게 한다.
한 여름날의 열기는 아이들을 냇가로 내 몰았고 고무신을 들고 고기잡고 물장구치다가 큰 길가로 돌려진 눈망울들, 낯선 남자 서넛이서 동네를 들어서며 이집 저집을 가리키자 지레 겁에 질린 아이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술 순사들이야…’하며 서로의 집을 향해 미처 입지 못한 옷을 들고 달리기 시작한다. 붙들려 가면 죽는 줄만 알았던 무서운 아저씨들, 한 여름 바쁜 계절에 어른들은 다 들로 나가셨고 막걸리 살 돈이 아까워 밀주를 빚어 새참 먹고 들판에서 사셨던 부모님들.
술도가에서 술이 안 팔리면 술순사들이 동네를 한 바퀴 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 그 때, 다행이 우리 집이 첫 번째 뒤져지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밭으로 숨 막히는 달리기를 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서숙밭(조밭) 고랑에서 김을 매시던 엄마도 내 놀란 모습을 보시더니 두말도 않으시고 집으로 달음질을 치셨다.
쿵쿵대는 내 심장은 멎을 것만 같았고 현기증이 날 것처럼 어지러웠다. 간신히 집에 도착하니 구두를 신은 아저씨 서너 명이 엄마를 향해 험상궂은 얼굴로 누룩을 내 놓으라며 소리소리를 지른다.
누룩을 빚어 놓았던 자리가 아직 따스하다며 소란을 피우는데 방안을 보니 아침 나절에 있던 자루는 보이지 않고 놓였던 자리가 텅 비어있다. 시치미 떼시는 엄마, 누룩 찾느라 혈안이 된 아저씨들…
나는 정지문 앞에 서 있는 소의 커다란 눈망울만 바라다 볼 뿐이었다. 온 집을 샅샅이 뒤져도 물증을 찾지 못하자 눈을 부라리며 호통 치던 아저씨들이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긴장이 풀린 나는 엄마 품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세상에 태어나 철들고 가장 무서웠던 시간, 지금 당장 저승사자가 목을 친대도 그리 두렵지는 않으리라.
엄마의 재치
저녁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자 엄마는 낮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셨다.
얼마나 급하셨던지 맨발로 집에 들어서는데 곧 뒤따라 들어서는 아저씨들…. 안방만 들어서면 곧장 들킬텐데, 다행히 아래 행랑채를 먼저 들어가시더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없는데 마침 열려있던 창문 넘어 호박이 커다랗게 울타리에 얹혀있는 게 보이길래 얼른 자루를 담 너머 옥수수 밭에 던지셨단다.
미처 흔적 덮을 새 없이 들이닥친 아저씨들은 눈앞에서 놓친 고기를 찾듯이 뒤졌지만 설마 담 넘어 갔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집 안만 이 잡듯이 뒤지더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셨다.
엄마의 재치로 간신히 위기는 모면했지만 집안에서 누룩이 익거나 술 익는 냄새가 풍겨오면 아찔해지던 그 시절 생각이 난다.
반세기 만에 처음 담가보는 술독에 엄마의 재치와 가슴 콩닥이던 소녀가 함께 숨쉬고 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