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 한표의 결과는?(글/이정희)
4월 15일, 17대 국회의원 선거, 어느 때보다 공명선거가 강조됐고 투표권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도 높아진 듯하다. 유권자 한사람 한사람이 후회없는 선택을 했는지,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그동안 후보자들의 주요 선거운동 과정을 통해 이번 선거를 한번 되짚어 보고자 한다.
예비후보 등록제 도입
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이번 17대 총선부터는 예비후보자 등록제가 새로 도입됐다. 선거 120일 전부터 선거관리위원회에 예비후보로 등록을 하면 선거사무소를 설치할 수 있고 그동안 사전선거운동으로 간주됐던 명함 돌리기도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예비후보 등록제는 정치신인에게 선거운동의 문턱을 크게 낮췄지만, 법 통과가 늦어지면서 애초 취지가 다소 무색해졌다. 경북 북부지역 6개 선거구에서는 적게는 3명에서부터 많게는 9-10명의 후보가 예비후보로 등록해 치열한 선거전을 예고했다.
잇따른 출마포기
초반 선거전은 탄핵정국이 흐름을 주도했다. 대구ㆍ경북에서는 판세가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양당구도를 형성하면서 이 두 정당의 공천을 받기 위한 물밑작업이 치열하게 진행됐다.
동시에 주요 정당의 공천자가 속속 발표되면서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와 상대적으로 설자리가 좁아진 무소속 후보의 출마 포기가 속출했다. 영주의 박시균 의원, 김영화, 전우창 후보, 안동의 김명호, 우재석 후보 등이 출마를 접었다. 예비후보들의 잇다른 출마포기로 이들을 지지하는 표심이 어느 쪽으로 흡수될지가 큰 관심거리였다.
도덕성 검증 강화
이번 선거에선 정보공개가 한층 더 확대됐다. 재산, 병역, 납세, 전과 사실이 공개됐는데 후보자 뿐 아니라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의 최근 5년 동안의 납세실적과 체납사실까지 공개됐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는 선거관리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 게재와 함께 각 유권자 가정으로도 일일이 발송됐다.
또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되면 후보자의 소속정당과 실명도 공개됐다. 선관위가 공개한 경북 북부지역 6개 선거구 후보들의 주요 신상정보도 유권자들의 판단 근거로 활용됐다.
최근 5년 동안 우리 국민 한사람이 낸 세금은 평균 천215만원이었다. 그러나 모 후보는 단 14만원, 또 다른 후보는 17만원을 세금으로 냈다고 신고했다. 모 국회의원 출신 후보도 보통 국민 한사람이 낸 세금보다 적은 7백 여 만원을 신고했다. 재산이 없다고 신고한 모 후보는 천4백 여 만원의 세금을 냈다. 4명의 후보는 세금을 내지 않았거나 세금을 체납한 적이 있었다.
7명의 후보가 군대를 가지 않았고 모 후보의 장남은 미국 영주권이 있어 병역이 면제됐다. 전과기록이 있는 후보도 많았는데 이 가운데는 사문서 위조, 폭력, 뺑소니 등도 있었다. 자녀 이름 앞으로 억대 이상의 재산이 있는 후보도 있었고 공직 출신의 모 후보는 전국 상당 필지의 땅을 보유하고 있어 부동산 투기 의혹을 샀다.
그러나 공개된 개인정보에도 허점이 많았다. 허위신고를 해도 처벌규정이 없는데다 토지는 개별공시지가, 아파트는 기준 시가를 적용해 실제 재산액과 신고액에 상당한 격차가 있을 수 있다.
이밖에 총선시민연대가 낙선대상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경북 북부지역 후보자 29명 가운데 24%인 7명이 전과나 과거 전력 등으로 포함돼 있었다.
선거관전 비교적 차분
개정 선거법으로 이번선거부턴 후보들의 선거운동이 엄격히 제한됐다. 후보자를 포함해 6명 이상 무리지어 다니거나 후보자 이외의 운동원이 어깨띠를 해도 불법 선거운동으로 간주됐다. 특정정당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모양과 색깔의 옷을 입어도 안 되고, 여러 명이 구호를 외치며 소리를 지르거나 후보자의 이름을 연호해도 선거법에 저촉됐다. 여러 명이 길거리에 늘어서서 율동을 하고 지지를 호소하던 풍경도 이제 옛말이 됐다. 이 때문에 지역별로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선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과거처럼 술렁이던 분위기는 감지되지 않았다.
선거브로커들도 예전처럼 눈에 띄게 나서지 않는다는 게 대체적인 이야기였다. 먹고 놀고, 주고받던 선거운동이 사라지면서 식당가도 조용해졌다.
그러나 갑자기 바뀐 선거운동 방식으로 후보들은 물론 유권자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특히 선거구 조정으로 4개 자치단체가 하나로 묶여 초대형 선거구가 된 영양, 영덕, 봉화, 울진 선거구는 면적이 경상북도의 5분의 1, 서울의 6배가 넘을 정도로 방대하다. 때문에 후보자마다 읍 소재지를 한두 번 찾았을 뿐 면단위 지역까지 찾는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유권자들 역시, 후보자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산간마을에 사는 유권자는 기호 1번이 누구인지, 아니 누가 출마한지도 모를 정도였다. 모르긴 해도 상당수 유권자가 후보자 얼굴 한번 못 보고 투표소로 향했을 것이고, 후보자를 투표장 즉석에서 골라 찍었을 것이다.
아직 이 같은 선거운동방식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나 자칫 선거 무관심으로 이어진데 대한 보완책은 다시 한번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막판 금품유표, 비방 재현
선거가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금품살포와 비방, 폭로전이 재현됐다. 안동 모후보는 시의원 해외연수 찬조금을 전달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영주에서는 모 후보측 인사가 30만원이 들어있는 돈봉투 십여개, 4백여만원을 배포한 혐의로 긴급체포됐다. 또 특정정당을 비방하는 유인물을 갖고 있던 모 후보측 선대위원장이 적발됐고 공약다툼에 사이버 테러주장까지 제기됐다.
문경ㆍ예천선거구에선 예비후보가 읍면동책에게 돈을 돌렸다 구속됐고 돈을 받은 유권자 25명도 무더기로 구속되거나 불구속 입건됐다. 영양, 영덕, 봉화, 울진 선거구에서도 모 후보가 선거구민에게 돈을 준 혐의로 입건됐다.
선거법 위반으로 적발된 후보 당사자측은 공작정치나 음모론을 제기하며 역공을 펼쳤다. 후보들의 공약을 보면 실현 불가능하거나 자치단체에서 이미 진행 중인 사업들을 베낀 경우가 많았는데, 선거 종반은 그나마 공약이나 정책 대결은 온데간데없고 폭로와 비방이 난무하는 구태가 되살아났다.
선거법 강화로 이번 선거에선 특히 불법선거운동으로 적발된 사례가 많았다. 신고포상금제도도 톡톡히 한몫을 했다. 신고금액이나 불법사례 유형별로 최고 50배까지, 최고 5천만원의 신고포상금이 지급됐다. 후보들의 불법 선거운동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지난 16대 선거에서 대구ㆍ경북은 한나라당이 모든 지역구를 싹쓸이했다. 이번 17대 총선은 불법선거자금 파동과 탄핵정국이 맞물리면서 어느 때보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이 큰 상태에서 맞이했다. 한나라당 텃밭인 대구ㆍ경북에서는 대항마로 떠오른 열린우리당이 단 한 의석이라도 차지할 수 있을지가 최대 관심사다.
이번 선거과정은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과거 선거 때보다 진일보한 선거문화를 이끌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바람몰이에 휩쓸린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유권자들의 깊은 마음이 담긴 한 표가 되었길 기대해 본다. 평소에는 국민을 상대로 사기극을 연출했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역사를, 민주주의를 핏대 세워가며 외쳐대는 정치권에 대해 유권자들은 준엄한 심판을 예고해 왔다. 후회 없는, 올바른 선택이었기를 간절히 바란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