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지와 홍패 백패(글/정진영)
양반들의 희망, 과거급제
교지는 왕이 신하에게 관직(官職), 관작(官爵), 시호(諡號) 등을 내릴 때 주는 문서라 했다. 그러니 사령장이나 임명장 등에 해당한다. 이뿐 아니다. 문?무과(文武科)와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합격증인 홍패(紅牌)와 백패(白牌)도 교지의 일종이다. 홍패?백패라고 하는 것은 종이의 색깔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안동의 골골마다에 고가가 즐비하고, 이들 고가의 벽장 속에 수십 장의 교지가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합격했음을 의미한다.
이 급제교지와 때어 놓을 수 없는 것이 과지 혹은 시권(試券)이다. 과지?시권이란 과거 시험답안지를 말한다. 오늘날과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답안지도 응시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과지는 교지와 함께 보관되어 오게 된 것이다.
과지는 아주 두터울 뿐만 아니라 전지 서너 장의 크기이다. 따라서 접어서 보관하기도 어렵다. 아마 그 크기와 부피 때문에 스스로의 수명을 단축했을 것이다. 따라서 교지만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하였듯이 교지나 과지, 그 자체는 연구자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소장자들이 자랑스럽게 펼치는 이들 자료를 건성으로 보아 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교지의 조상들 이력과 행적들이 줄줄이 나열되기 시작하면, 연구자들은 참으로 난감해 진다. 해서 자료 조사에 앞서 대상 가문의 유명 조상들의 이력과 행적을 미리 숙지하여 선수를 친다면 이 같은 곤란함을 모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분에 넘치는 협조도 얻을 수 있게 된다. 자료 조사자들은 명심할 일이다.
과지에 대한 연구자들의 이 같은 관심과는 달리 그 당사자와 가문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과거급제란 쉬운 일도, 흔한 일도 아니다. 지난 호에서 언급하였듯이 어떤 고을에서는 조선 5백 년 동안 한 명의 대과 급제자를 배출하지도 못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입신양명(立身揚名)이며, 가문과 고을의 영광으로 치부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왜 영광인가? 과거급제란 벼슬길에 나아가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몇 대에 걸쳐 과거급제가 없게 된다면 그 가문은 양반의 명문가문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과거와 벼슬은 양반의 여부를 가늠하는 국가적인 혹은 법제적인 중요한 기준이었다. 양반(士族)의 법적인 규정은 자신이 생원이나 진사인 자, 문무과 급제자와 그 자손, 그리고 현관(顯官)의 자손이다.
물론 이 같은 규정이 향촌사회에서 그대로 통용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혀 무의미했던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 같은 범주를 벗어난 명문가문이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급제란 양반사회에서 양반이, 그것도 명문이 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의 하나를 구비하는 것이었으니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가문의 영광인 또 다른 이유는 과거급제가 벼슬을 보장해 주고, 벼슬은 부귀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벼슬 그 자체가 오늘날과 같이 고액 연봉을 보장해 주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직의 유무 혹은 그 고하가 한 가문의 경제적인 규모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관직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도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선물’을 취득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공적 자원의 사적 전용도 가능하게 된다. 선조 연간의 유희춘은 전라감사 등을 역임하면서 쌀과 찬류 등 일상생활품에서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품을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월 평균 40여 회 이상 받고 있었다. 어떤 해에는 선물로 받은 쌀이 200여 석에 이르기도 하였고, 해남에 가옥을 신축할 때에는 집터에서부터 목재, 기와는 물론이고 노동력의 동원 등에 이르기까지 인근 수령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지원이란 국가의 재산과 농민의 노동력을 관권의 힘을 빌려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 같은 선물과 지원은 물론 반대급부를 염두에 둔 뇌물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부정부패의 전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사회에 있어서 이것은 당연한 관행이었고, 도리어 특권으로까지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특권은 오늘날에도 은근하게 기대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양반가문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에서 중앙의 벼슬살이를 한 경우와 시골의 선비는 비교되지 않는다. 막대한 토지와 노비는 그 자체의 소유만으로 수입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적절하게 경영되고 통제되어야 생산성이 높아진다. 경영과 통제에는 상당한 권위와 힘을 필요로 한다. 벼슬에 나아간다는 것은 강력한 권위와 힘을 확보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급제와 벼슬이 영광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의 양반이라면 누가 과거와 벼슬을 거역할 수 있었겠는가?
과거시험 엿보기
조선시대 양반 자제들의 공부는 7, 8세 경 천자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하여 10세 초반의 통감류와 소학 공부를 거쳐, 대체로 20세 이전에 사서와 삼경의 과정을 마무리하였다. 공부 방법은 대체로 읽고 해석하고 외우는 것이었고, 이것은 평생을 두고 수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고문진보를 읽고 글을 짓기도 하였지만 공부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사서삼경에 대한 이해와 암송이었다. 물론 이러한 공부과정에서 이곳저곳에서 개최되는 백일장을 출입하면서 본격적으로 과거준비를 하게 된다.
조선왕조의 과거에는 소과인 생원 진사시와 대과인 문과, 그리고 무과와 잡과가 있다. 양반들은 주로 생원 진사시와 문과에 응시하였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을, 진사시는 문학을 시험하는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차례의 시험을 치러 각기 100명을 선발하였다. 생원?진사시를 합하여 흔히 사마시(司馬試)라고 하였다. 대과인 문과는 유교 경전, 문학, 정책에 대해 초시 복시 전시(殿試) 등 세 차례의 시험을 거쳐 33인을 뽑았다. 이들 시험은 3년(子 午 卯 酉年)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식년시(式年試)가 있고, 이 외에도 증광시(增廣試) 알성시(謁聖試) 등이 빈번하게 개최되었다.
과거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인재의 선발이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공정한 평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따라서 이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이제 과거시험의 과정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오늘날에도 각종 시험에는 원서를 내고, 수험표를 받고, 시험장에서 본인 여부를 확인한다. 조선시대 과거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대 소과를 막론하고 과거응시를 위해서는 우선 등록을 해야 하는 데, 이를 녹명(錄名)이라고 하였다. 녹명은 자신의 성명과 본관, 거주지와 4조(부조 증조 외조)의 성명, 관직 등을 적은 단자(單子)와 현직관료의 신원보증서 등을 제출하는 것이다. 이를 담당하는 녹명관이라는 관리는 이를 토대로 응시 부적격자를 가려내고 녹명책에 등록하였다. 그러나 아무나 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녹명을 하기 위해서는 간단한 구두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를 조흘강(照訖講)이라고 하였는데 소학(小學)이나 가례(家禮) 등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여부를 시험하였다. 이를 통과한 유생들에게는 조흘첩(照訖帖)을 발급해 주었다.<사진 ①> 이를 제출해야만 녹명을 할 수 있었다. 조흘강은 일종의 예심인 셈인데, 기준 미달자를 사전에 걸러냄으로써 과장(科場)의 혼잡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또한 응시자는 과장에서 쓸 시험지를 본인이 사전에 준비하였다. 이 과거시험지를 명지(名紙)라 한다. 이 역시 검인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은 녹명 시에 명지 첫머리에 역시 자신과 4조의 이름 등을 5행으로 쓴 뒤 풀로 봉한 후 제출하여 확인 도장을 받는 것이다. 이름을 쓰고 봉한 것을 피봉(皮封) 혹은 비봉(秘封)이라고 하였다.
아무튼 응시자는 자신이 준비한 시험지에 문제와 답을 기술하여 제출하게 된다. 채점은 소과와 알성시, 정시(庭試) 등은 제출된 답안지 자체로 하기도 하지만, 식년문과의 경우는 피봉을 오려내고 붉은 글씨로 등사시킨 것으로써(이를 易書라 한다) 평가하였다. 이것은 피봉의 기록이나 서체를 보고 정실에 좌우되는 부정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시험관들의 채점은 상중하(上中下), 이상(二上), 삼상(三上), 삼하(三下) 등 9등급으로 평가하여 합격시키고 순위를 정하였으며, 그 이하는 불합격처리 하였다. 합격한 경우에는 시험지 원본을 찾아내어 역서한 것과 다시 한번 대조한다. 그리고 때어낸 피봉을 다시 붙이고 점수를 기재한다.<사진 ②>
이제 합격자 발표를 하게 된다. 이를 방방(放榜)이라고 한다. 방이 게시된 후 문무관료가 시립하고 부모친척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국왕은 급제자들에게 교지와 어사화 등을 하사하고 축하연을 베풀어준다. 다음 날부터 임금에 대한 사은례와 문묘에 대한 알성례, 그리고 3일간의 유가(遊街) 등이 뒤이어 진다.
<사진 ③>은 소과인 생원시의 합격증으로 백패이고, <사진 ④>는 대과인 문과 합격증으로 홍패이다. 그런데 3등 11인이란 무엇이고, 병과 23등이란 무엇인가?
생원 진사는 각기 100명을 뽑는데, 1등이 5명, 2등이 25명, 3등이 70명이었고, 문과에서는 33명을 선발하는데 대체로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이 정수였다. 그러니 ‘진사 3등 11인’이란 진사시에서 3등 70명 가운데 11번째 합격자임을 의미하며, ‘문과 병과 23인’이란 문과에서 병과 23명 가운데 23번째로 합격했다는 것을 말한다.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해서 곧바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갑과 제1인에게는 종6품, 2ㆍ3인에게는 종7품의 실직이 주어졌지만, 그 나머지는 승문원ㆍ성균관ㆍ교서관 등에 분속시켰다가 자리가 나는 것을 보아 실직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급제자가 많아지고, 자리가 나지 않으면 10년 혹은 평생 동안 실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과거에도 부정합격이 있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의 과거는 아주 엄정하게 시행되었고, 응시자들 또한 선비답고 유학자답게 시험에 응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때 없이 시험에는 부정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조선시대라고 해서, 선비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부정은 과장에서부터 채점과 합격자의 발표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과거 응시자가 급증하였다. 여기에 권세가의 자제들은 심지어 10여 명에 이르는 수종인(隨從人)들을 대동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과장에 수 천, 혹은 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몰려 난장판이 되고 압사자가 속출하기도 하였다. 수종인들의 대동은 물론 금지사항이고 불법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들의 역할이 자리 잡기, 음식 운반만이 아니라 책 숨겨 가기에서부터 시험답안 작성과 베끼기 등에 이르렀으니 사실상 조직적으로 부정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뿐 아니다. 대리시험이나 시험지 바꾸기 등의 부정행위도 행해졌다. 또한 응시자들이 너무 많아 채점관들이 모든 시권을 역서하여 읽을 수가 없게 되자 먼저 제출한 시험지 앞부분 몇 줄만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시험관과 응시자가 짜고 부정합격을 꾀하는 방법도 다양하였다. 시험문제 미리 알려주기, 시권에 암호 기재하기 등에서부터 아예 합격한 남의 시험지에 자신의 이름표(피봉)를 붙이는 시험지 도둑질(竊科)에 이르기까지 자행되었다. 이러한 부정행위를 제재하기 위한 법이 없거나 허술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엄한 단속도 늘 강조되었지만 그 대상자가 고급관료들의 자제들이고 그 부형들이라는 점에서 부정은 근절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의 부정행위가 대규모의 과옥(科獄)으로 비화하기도 하였다. 숙종 25년의 증광문과 복시에서는 남의 시험지로 합격한 경우가 무려 13건이었고, 이외에도 다양한 부정행위가 뒤늦게 발각됨으로써 전체의 합격이 취소되고 시험관 등 수십 명이 먼 섬으로 정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머지않아 석방되어 벼슬길에 나아갔으니 처벌이란 요식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조선 양반사회의 정형화된 제도와 이념만이 아니라 그 이면의 추악한 실상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문제는 이러한 부정행위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과거 공부는 실천이 없는 자구의 해석에 매달린다거나 미사여구를 끌어다가 문장이나 만드는 것으로 폄하되거나, 구이지학(口耳之學)이나 명리(名利)만을 쫓는 말단의 폐습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18세기 안동의 유학자였던 이상정(李象靖)은 과거제의 폐단으로 그 종류가 지나치게 많고, 너무 빈번하며, 내용 또한 단순한 암기와 사장(詞章) 따위의 말단적인 것만을 추구한다는 점을 들면서 개혁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과거가 이익만을 쫓고 실천이 없는 입과 귀의 학문이고, 부정 또한 극히 개탄스러운 일이라 하더라도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 포기는 곧 입신양명의 포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는 것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선비를 산림처사(山林處士)라 한다. 안동에서의 처사란 벼슬 못지않은 명예로운 호칭이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