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분권을 넘어선 ′지역문화 주권운동′(글/임재해)
중앙집권과 문화분권의 새로운 인식
지방분권 시대를 맞이해서 문화 분야에서도 지방문화 분권이 새로운 화두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분권론의 당위성은 집권과 독점의 반민주성에서 비롯된다. 민주화가 진전된 나라일수록 권력 분화가 잘 이루어져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지방분권론은 중앙집권과 중앙독점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하는 민주화의 새로운 경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와 경제, 행정은 물론 문화권력도 중앙에서 장악하고 모든 문화를 서울에서 독점하고 있으니 당연히 문화분권을 제기해야 마땅할 것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문화분권은 사정이 다르다. 문화의 실제 현상을 제대로 따져보면 권력 분권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치권력은 전통적으로 군주의 독점물이자 중앙집권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면서 군주 한 사람의 권력이 삼권분립과 함께 국민주권의 시대로 나아왔다. 그리고 중앙집권에서 지방자치로 권력의 지역적 분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처럼, 정치권력은 한 사람에서 다수로, 위에서 아래로, 중앙에서 지방으로 분화되면서 민주화가 진전되었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의 민주화 과정을 고려하면, 당연히 문화도 중앙문화의 독점에서 분권화로 가야 할 것처럼 여기기 쉽다.
정치 논리로 보면 중앙의 문화권력을 지방으로 분산하고 이양하는 것이 지역문화의 민주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문화 현상의 실상은 정치 현상과 다르기 때문에 정치 논리의 분권론을 동어 반복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문화는 정치권력과 달리 처음부터 중앙중심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각 지역마다 지역적 특성에 따라 독창적인 문화를 창조적으로 생산해서 대등하게 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권력은 정치권력과 달리 처음부터 군주 한 사람에게 독점되었던 것이 아니다. 문화주권은 정치주권과 상관없이 주민들이 저마다 자기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문화생산 주권을 개별적으로 누렸을 뿐 아니라, 계급별, 지역별, 세대별 문화가 주체적으로 형성되어서 계급이나 지역, 세대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들이 누려야 할 문화를 창조적으로 생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배계급의 고급문화에 맞서서 피지배계급의 민속문화도 끊임없이 창출되었으며, 중앙과 지역의 구별 없이 저마다 자기 지역문화를 생산 전승하였다. 그리고 세대별 문화도 해당 세대가 주체가 되어서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개인은 물론 중앙이 아닌 지역사회와 어린이 세대, 피지배 계급은 자기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앙이 모든 문화를 생산하여 대중매체를 통해 일방적으로 공급하고 있어서 지역문화가 죽어가고 있으며,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위세에 휩쓸려 민속문화의 생산과 전승은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어린이를 겨냥하여 만든 문화상품을 수용할 뿐 스스로 주체적인 어린이 문화의 생산자 구실을 하지 못한다.
민속문화의 뿌리는 지역문화의 전통
지역문화를 보면 더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있다. 과거에는 지역문화가 더 풍부했다. 한국의 민족문화라고 내세울 만한 문화적 정체성은 한결같이 중앙이 아닌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서울무당이 전라도 단골보다 우리 굿의 정체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하기 어렵다. 한국 고유의 마을축제로서 주목받는 동해안 별신굿이나 강릉단오굿, 하회별신굿 등은 모두 지역사회에 전승되고 있다. 한국인다운 모둠살이의 정체성이나 마을공동체의 문화도 지역사회의 농어촌 마을에서 찾아야 한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 문화는 국제화되고 표준화되어 민족문화의 전형을 잃은 지 오래이다.
서울냉면보다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이 우리 냉면의 원조라 할 수 있듯이, 서울아리랑이 밀양아리랑이나 진도아리랑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판소리는 으레 전주지역이 중심을 이루고 우리 전통문화의 상징으로 삼는 유교문화의 중심지도 서울이 아니라 안동지역이다. 민족문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민속문화는 으레 지역에 가야 온전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오히려 지역이 서울에 비해 민족문화의 전통이 더 풍부하고 더 독창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문화를 두고 말하면 지금과 반대로 중앙과 지역이 역전 관계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의 실상을 고려하지 않으면, 마치 지역문화는 중앙문화의 분권이나 시혜에 의해서만이 민주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정치적으로 중앙이 집권적 특권을 누리긴 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지역이 민족문화의 독창성을 담보할 정도로 창조력을 발휘했다. 따라서 정치권력의 역사는 분권과 분화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면, 문화의 역사는 오히려 집중과 독점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정치민주화와 거꾸로 간 문화민주화
군주가 정치권력을 독점했던 왕조체제 속에서도 문화생산 권력만은 민중들이 저마다 주체적으로 누렸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화 시대라고 하는 지금은 일부 문화전문가와 예술가들만이 문화생산 주권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국민들이 주권을 자유롭게 행사하는 정치적 민주화의 진행과 달리, 문화는 거꾸로 국민들이 타고난 본디 문화생산 주권을 소수 전문가들이 앗아가서 독점하는 비민주적 상황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군주체제였던 시대에도 문화주권만은 민주적으로 누렸다. 왜냐하면 전통사회에서는 민중들도 저마다 예술생산 주권을 누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시인만이 시를 쓰고 광대들만 연극을 하며 음악가만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자기 노래를 부르는 시인이었으며 마당놀이를 하는 광대들이었고 자기 춤을 추는 춤꾼이었다. 따라서 민중들도 이야기꾼으로서 문학가이자 풍물을 치는 음악가이며 장승을 다듬어 세우는 조각가이자 탈춤을 추는 연극배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저마다 문화생산 주권을 자유롭게 누렸던 셈이다.
지역주민들이 문화주권을 상실하게 된 중요 원인은 산업화와 연관되어 있다. 산업화에 따른 도시사회의 진전으로 지역공동체가 해체 위기에 처해서 이제 농촌사회는 문화적 자생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누려오던 전통문화의 전승마저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문화가 공동체 성원들끼리 서로 소통하며 무상으로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화되어서 상행위를 통해 유통되며 유상으로 거래되는 상품이 된 까닭에, 능력이 탁월한 문화전문가들만 문화를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지역사회 주민들은 문화생산 주권을 상실한 채 서울의 문화권력자들이 그럴듯하게 문화상품으로 만들어 공급하는 문화를 구매하는 문화소비자로 떨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전에는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마을에서 전승되는 민요를 창조적으로 부르며 일도 하고 의식도 베풀며 놀이도 즐겼다.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노래문화가 함께 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방송국의 전파를 타거나 음반과 테이프로 공급되는 대중가요를 구매하여 따라 부르는 앵무새 구실이 고작이다. 시골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지신밟기를 하고 집돌이 풍물을 치며 마을에 따라 줄당기기와 놋다리밟기, 동채싸움, 장승굿 등을 주체적으로 즐겼는데, 지금은 방안에 틀어박혀서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특집프로를 구경하는 것이 고작이다. 대보름을 어떻게 즐기는가 하는 것이 전통사회에서는 전적으로 지역주민들의 문화적 주권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지금은 전적으로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방송국의 결정에 달려 있는 꼴이다.
문화주권과 지역문화의 생산주체
과거에는 마을마다 공동체문화를 주체적으로 창출하여 누려온 문화적 창조력과 자족적 문화체계를 갖추었다는 실제 문화자료와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지역문화 주권을 입증한다. 다른 지역문화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것은 물론 중앙에서 공급하는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소비하는 객체가 아니라 자신들이 필요한 문화를 독자적으로 창조하는 문화생산 주권을 발휘했던 것이다. 마을신화를 창조적으로 전승하고 서낭당에 동신을 모시며 정월 대보름에 당고사를 지내거나 마을굿을 하는데, 한결같이 마을사람들이 생산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하회마을 사람들이 정초에 보름동안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하는데, 관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거나 서울사람들의 기획력을 빌려 오거나 전문연출가나 배우들을 초빙하지 않았다. 주민들 스스로 행사를 기획하고 연출하며 출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별신굿의 기획자이자 하회탈을 만드는 조각가였으며, 탈놀이를 연출하는 예술감독이자 반주음악을 직접 담당한 연주가인 것은 물론, 일정한 배역을 맡은 탈광대로서 배우 노릇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민들은 자신의 의식세계를 형상화하는 독특한 민속극을 창출하고 전승했던 것이다.
당시에 하회탈과 탈놀이에 견줄 만한 조각예술이나 연극예술이 서울에 있었던가 물어보면, 그렇다고 긍정하기 어렵다. 하회탈이 국보이고 탈놀이가 문화재인 것도 이러한 독창성 때문이다. 독창적인 마을문화나 지역문화가 가능했던 것은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의 문화 창조력을 마음껏 발휘했던 까닭이다. 자신들이 필요한 문화를 스스로 생산하고 전승하며 발전시키는 행위야말로 바로 문화주권의 민주적 행사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정치주권을 타고났듯이 문화주권도 타고났다. 그러면 당연히 전통사회의 마을공동체처럼 자기 문화를 자기 스스로 생산하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지역문화 분권이 아니라 지역문화 주권을 주장해야 마땅하다.
지역문화 주권을 되찾는 문화복권 운동
지금은 문화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도 사실은 알게 모르게 주민들의 문화주권을 모두 문화전문가 또는 서울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따라서 시골사람들은 한결같이 문화소비자로 전락하여 대중매체를 통해 공급되는 서울 중심의 대중문화를 수용하고 소비하는 객체 구실을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모든 문화가 중앙으로부터 지역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일방적으로 공급되고 있어 본디 지역문화 생산주권을 창조적으로 발휘할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지역문화 생산주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었던 지역축제도 어느덧 지역의 지방정부에서 장악하는 관변측 행사로 치러지기 일쑤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마을 단위의 굿이 공동체 축제로서 자생력을 갖추고 건강하게 살아 있었는데, 이제는 시군단위 소재지에서도 지방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지역축제가 자력적으로 꾸려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역문화 내부에서도 시민문화를 행정기관이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비민주적 상황에서는 지역문화 분권이 아니라 본디부터 누렸던 지역문화 주권을 되찾아야 문화자치의 길이 열린다. 분권론은 중앙의 권력을 나누어달라고 하는 지역의 정서적 호소이자 중앙의 시혜일 수 있지만, 주권론은 본디부터 누리던 지역문화의 주권을 돌려달라는 정당한 권리이자 중앙의 부당한 권력 장악에 맞서는 변혁운동이다.
실제로 지금의 서울문화란 대부분 지역에서 동원된 문화로 이루어져 있는가 하면, 중앙박물관에는 지역에서 가져간 문화재로 채워져 있다. 이제 지역문화는 지역사회에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소극적인 문화분권 운동보다 지역문화 주권을 되찾는 지역문화 복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지역문화의 본디 건강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문화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