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천성으로 거둔 순수미(글/조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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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영은 단아한 시인이다. 한점 흐트러짐 없는 정갈함은 절제에서 얻어진 공정미에 더하여 타고난 천성에서 거두어진 순수다. 조용하면서도 하는 일에 한 치의 거스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질서가 잡혀있는 그래서 딱 맞는 정형시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슨 다른 말 한마디가 놓일 법 한데도 펼쳐 보면 아니다. 영락없이 그의 시 속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지켜 온 본성이 스스럼없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간의 모든 것 나비와 거미 더 작은 미물에 까지 당연한 순리로 밝혀낸 이순의 나이로 펴내는 시의 미덕이 시집 『흰 열꽃』에 소담스러이 열매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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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정광영시인과의 만남의 시작은 시조동인『오늘』에서다. 영남시조문학회에서 활동하던 북부지역의 시조시인들이 지역을 연고로 하여 창간한 회지에 함께 참여하면서 시작된 교유가 벌써 20여년을 훌쩍 넘겼고 문인협회 회원으로, 또 그가 직장에서 명예퇴임을 한 후 문화원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남다르게 각별히 지내는 처지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런 오랜 일상적인 관계에서 나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얼굴 붉히는 일을 본 적이 없다. 직장의 동료들이나 그와 가까이 지내는 분들의 기억 속에 그는 지극히 선한 사람으로 각인되고 있다.
내가 굳이 서평에서 이런 사실을 늘어놓는 것은 사람과 너무 닮아 있는 그의 시의 모습 탓이다. 여섯 묶음으로 짜여진 103편의 글에 한결같이 흐르고 있는 시혼은 온화하기 그지없다.
시집 발문에서 언급되었듯이 그는 급변하는 주위의 환경에서부터 쉽게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다. 그의 시 행간에는 여직도 50년대의 맑은 시냇물이 시인의 모습을 담아 흐르고 있고 우리가 거쳐 온 한시대의 정감어린 손에 쥐어진 검정고무신에는 그가 그린 물고기들이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고 있다.
버릴 것이 더 많은 세상,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고 있는 듯한 정신의 축이 무너진 사람들 앞에서 그의 차분함은 교훈에 가깝다. 아니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시가 위안이며 믿음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계절 따라 다가오는 자연의 형상이며 존재의 근원까지도 그의 시에 이르면 한결같이 안정으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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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그의 시에는 유난히 자연의 등장이 빈번하다.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더 많은 것에서 훼손되지 않는 원형의 삶을 살며 지향하는 시인 자신의 세계관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며 이치를 범하지 않는 상기된 그의 정서는 시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일상에서 지혜를 깨닫고 제시하는 정직성의 당연한 귀결이다.
가장 쉬운 말로 하면 그가 시에 끌어들이는 자연은 정교한 시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정서의 통로를 활짝 열어 커다란 순수의 울림을 자아낸다.
봄날 무덤가엔 온갖 것이 태어난다
푸득거리는 햇살이며 눈 비비는 풀꽃이며
어머니 따슨 체온이 피워올리는 저 아지랑이
겨울 아득히 흐르던 맑은 물소리가
수런대던 나무들의 손끝에서 뿜어지고
세상은 찬란한 금빛 나는 간곳이 없다
어느덧 어머니 품에 포근히 안긴 바람
눈을 감고 젖을 빠는 어리디 어린 강아지야
가늘게 사랑을 앓는 신음소리 들린다.
-「어느 봄날의 성묘」 전문
이 시는 아주 극진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연이며 그의 심경이다. 1983년 시조문학 초회 추천을 득한「나비춤」에서 이미 예견되었듯이 ‘어머니 따슨 체온이 피워올리는 저 아지랑이/겨울 아득히 흐르던 맑은 물소리가/ 수런대던 나무들의 손끝에서 뿜어지고’ 에 이르면 시인의 명징한 감성은 혼탁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치유의 힘으로 아름다움을 나눠 주기에 충분하다.
근원적으로 정광영 시에 맡겨진 자연은 넉넉하고 여유롭게 감정의 옷을 차려입고 시인이 연출하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엄을 설득한다. 아주 귀하게 남아 있는 경험의 한가운데 풍덩 뛰어들어 물장구치는 선명한 감흥을 이끌어 낸다.
영혼이 아름다운 종치는 사람 있어
일직 탑 마을엔 언제나 맑은 종소리
깨벗은 골목 아이들을 올망졸망 꿰어낸다
언덕배기 비탈길을 느릿느릿 소가 넘고
옹구지골 할매 이고 가는 함지박에
수북히 부신 햇살을 담아주는 사람아
주머닐 풀어헤치면 별이 마구 쏟아진다
사과밭도 복숭아밭도 반짝거리는 별의 세상
어디서 그토록 슬픈 별을 주워 모았는지.
-「권정생 記」 전문서평-정광영시집『흰열꽃』
안동의 일직 조탑리에 가면 우리시대의 대표적 아동문학가 권정생이 살고 있다. 아니 은둔하고 있다. 평생 병고와 견디기 어려운 삶의 고통을 삭인 은총을 외진 시골교회의 맑은 종소리에 실어 보내고 있다. 아주 낮은 곳에서 온몸을 숙여 펼치는 무한한 사랑의 실현을 시인은 ‘주머닐 풀어헤치면 별이 마구 쏟아진다’ 는 표현으로 감동을 전해 준다.
생의 신뢰로 쌓은 희망을 반짝거리는 별의 세상으로 제시하면서 존재의 진정성이 넘쳐나는 시선을 우리에게 열어주고 있다. 문학이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이고 자신이 선택한 삶의 스승이 자연이라는 정광영 시의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끈임 없는 성찰과 시적 변모에 관심을 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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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날마다 밥을 먹어야 하듯 시인은 서정시를 써야 한다고 믿고 있다.” 동인지 『오늘』의 시작노트에서 시인이 한 말이다.
이처럼 그는 삶의 안 밖 거의 모든 일에서 서정의 자세로 일관하며 시로 나아간다. 그런 까닭에 때로는 그가 시에서 스스로 일탈의 노력을 가져 보지만 정광영의 서정에 머물고 만다. 따라서 이점은 그의 시에 신뢰이면서 더 넓혀야 할 과제다.
반항도 못해 보고 늘상 손을 드는 처지였다
완전무장을 한 일단의 바이러스군은 애당초 약골인 나를
얕잡아본 게 분명하였다. 알약 한 두 개로는 역부족이었고,
싸움은 일방적이 되어 버렸다. 무차별 공격에 그로기가 되
어 버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 들쑤시는 팔, 다리, 몸통으
로 개가 않는다는 여름 감기를 앓아야 했다.
한데 불덩이가 된 두개골 한구석에서 무너진 것처럼 보
이던 정신이 말똥거리며 살아나고 있었으니, 싸늘한 눈빛,
드디어 침략자는 하나 둘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로 걸핏만 하면 오기(傲氣)가 살아나곤 했다.
-「감기」 전문
개도 앓지 않는다는 여름 감기를 통하여 현실 갈등이 그의 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사회성으로 나아간다. 더구나 3장6구의 정형을 버리고 사설시조의 형식을 빌어서 항거의 자세를 취하는 모습은 이제까지 그가 일관해 온 시적 품새와는 다른 제재의 확장과 더불어 바람직한 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이 「나는 조선인」이라는 선언에서 우리의 생활 감정과 호흡이 깃든 시를 말한 뜻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쯤에 이르면 그가 경작하는 시의 세계가 가볍지 않는 무게로 우리의 삶을 바르게 잡아 주는 힘이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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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내겠노라며 집철한 원고를 해를 넘기며 다듬던 과묵하고 참을성 많은 성품만큼이나 견고한 시의 세계를 쌓아 올린 중견의 정광영 시인이 우리 고유의 시형식인 시조의 미래를 온전히 열어 가기를 기대 한다. 갇히거나 닫혀 답답하다는 시조를 향한 비판을 거뜬하게 넘어 삶의 현장에 생생한 감동을 전하는 시조를 높이 세우고 고절하기를 손 모은다.
살펴보면 정형시를 이루어 낸 민족은 드물다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우리의 말 품새가 윤이 나게 다듬어져 있는 시조에 ‘산하나 떠밀려 와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는 그의 시 「임하댐의 가을」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산하나 떠밀려 와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쇠기러기 꾸룩꾸룩 거기 따옴표처럼 돋았다
눈이 먼 붕어 한 마리 낚시대를 끌고 간다.
구름은 옛적부터 그렇게 흘러가는 듯 하고
내 핏발선 눈동자는 수정같이 맑아졌다
뻥 뚫린 가슴속으로 가을볕이 들어 와 눕는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