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글/김연숙)
백년 만에 찾아왔다는 폭설은 곳곳에 눈을 뿌려서 길을 막고 빙판을 만들어 불편도 하지만, 모처럼 기차여행을 하면서 하얗게 덮인 산과 그 설경을 맘껏 바라보았습니다. 눈 쌓인 거리로의
기차여행은 고향에서의 옛 추억을 아련히 떠오르게 합니다.
길게 늘어지던 엿가락, 추운 날씨에 아랑곳 않고 마음대로 쳐 대는 엿장수 가위 소리에 추억의 고향으로 달려가 봅니다.
잡화상 할아버지와 달걀 꾸러미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까? 우리 동네에는 다리를 절뚝이시며 곱사등에다 지게를 받쳐서 온갖 잡화를 다 얹어, 지게 작대기에 의지하며 온 마을을 돌던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지게 위 목판에는 엿가락, 바늘, 실, 구리무, 단추, 술약, 소독약, 실타래, 시커먼 빨래비누, 삭카린, 그리고 작고 예쁜 계란이 얹혀 있었습니다. 온갖 잡화를 가지고 다니시며 곡식이나 병, 고무신, 찌그러진 냄비 등과 물물교환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짚에 쌓여진 달걀 꾸러미는 아버지 상과 귀한 집 자녀들에게나 공급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네에 가위 소리가 들리면 언제나 우리 집안마당은 시끌벅적해졌습니다. 가위를 흔들어 대시면 구경꾼이었던 아이들과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모여드는 어른들, 가끔 어머님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팔기도 하셨습니다.
슬쩍한 달걀
그날따라 유난히 멋있어 보이던 삼촌이 계란 하나를 사서 모서리에 구멍을 뚫고 쪽 빨아먹고 버리시는 모습이 어찌 그리 호기심을 발동하던지, 나의 손은 어느새 계란 꾸러미를 향해 슬그머니 내밀어졌습니다.
슬쩍한 계란을 치마 밑에 숨기고 숨을 곳을 찾던 나는 그만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면서 에그탕을 땅바닥 가득 만들고 말았습니다.
콩닥거리는 가슴과 겁에 질려 무디어진 손과 발, 이마와 등줄기에 흐르는 땀방울. 눈으로 망보고 손으로 땅 덮고 냇가에 달려가는 시간이 십년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날계란을 잘 못 먹는 나, 그 시절 어떻게 먹지도 못할 일을 저질렀는지. 그 이후 나는 할아버지 앞에 나설 수 없었고 동네에 가위 소리만 들리면 방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 보내야만 속이 편하시다는 우리 어머니는 늘 할아버지를 대접 하셨기에 우리들은 가끔씩 엿가락을 얻어먹는 횡재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난 먹고 싶고 보고픈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졸이던 가슴은 어느 때부터인가 들려오지 않는 가위소리를 기다렸지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풍문만이 들려 올 뿐, 지게 위 목판은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계란만 보면 생각나는 할아버지
계란하나 사서 어른들 대접하고 빈계란 속에 쌀을 조금 넣고 장작더미에 얹어 밥을 해 먹으면 꿀맛이던 시간이 흘러가고, 한 판씩 사다 놓아도 누구 하나 눈길 주는 이 없고 손님상에 넣으려면 조류 독감 때문에 물어보고 넣어야 될 만큼 인기 없는 메뉴가 돼 버렸습니다.
도시락에 계란 후라이 하나만 얹으면 모든 아이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었던 점심시간과 아버지 상에 놓인 계란찜이 먹고 싶어 숟가락 들고 상 물리기만을 기다리던 어린 마음속에 기다림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친구들과 서리도 많이 하고 길 다니면서 풋과일도 슬쩍했는데…. 왠지 계란만 보면 생각나는 할아버지는 그 불편한 몸 어디쯤 누이셨을까? 지금쯤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 하마. 얘야 벌써 다 잊었다.” 하실까?
“할아버지 죄송해요.” 먼 하늘 바라보면서 궁시렁거려 봅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