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찾은 길(글/이영민)
신년의 벽두에 텔레비전에서는 첫 해가 솟아오르는 광경을 연이어서 보내주고 있었다. 지난 해 초에 난생 처음 해돋이를 보았다. 남편의 성화로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깜깜한 어둠을 헤치고 가파른 산길을 앞사람의 등만 보고 정신없이 올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상에 올랐을 때 어둠은 안개 걷히듯 슬며시 물러나고 발갛게 달아오른 쇳조각 같은 태양의 일부분이 먼 산 위로 솟아오를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찼다. 해맞이를 하면서 신년의 계획과 다짐을 했었고 새해 첫날 부지런히 움직였다는 이유만으로도 한 해를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올해는 우리 가족의 발이 되어 주어야 할 남편이 신정에 당직을 서야했기 때문에 아무런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해맞이를 대신해 산행이라도 다녀오자고 했다. 산을 좋아하는 남편은 물론, 아이들까지 신이 나서 멀지 않은 갈라산으로 향했다.
갈라산 등산로를 오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 한 쪽은 완만하고 길이 넓어 오르는데 무리가 없을 듯한 길이었고, 또 하나는 계곡을 지나는 좁다란 오솔길이었다. 남편은 오솔길을 선택했다. 나는 아이들도 어린데 처음부터 너무 힘든 길을 택하면 중도에서 내려와야 할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여 쉬운 길로 가자고 했다. 자기를 믿고 오라는 말에 초행길인 나는 남편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길은 처음부터 계곡을 건너야 하는 난관에 부딪혔고 지난해 장마 때 패인 길이 복구되지 않아 험하기까지 했다. 처음 산길을 올라보는 딸아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오르면 좋은 길이 나올 거라며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와 봤다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길 놔두고 이런 길을 안내하느냐고 투덜대니 남편은 오히려 산은 험할수록 오르는 맛이 나는 거라며 훈계를 했다. 이미 오른 길이니 어찌하랴. 아들아이는 저도 남자라고 힘든 내색을 않고 멀리 앞서 달려가 뒤돌아보며, 나무뿌리가 툭 튀어나와 있으니 조심하라는 둥, 큰 돌이 있으니 앞을 잘 보라는 둥, 하며 길 안내를 도왔다.
한참을 오르다보니 오솔길은 푸른 소나무 숲에 둘러 싸여 터널처럼 뚫려 있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모처럼 만난 평탄한 길을 숲에 묻혀 걷고 있었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맞은편 산길은 도로처럼 트여있어 숲 속을 거니는 운치는 없을 것 같았다. 딸아이를 안고 성큼성큼 앞서가는 등 뒤를 따르며 내심 남편이 든든했다.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한 나의 안일함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기에 부부로 맺어져 살고 있는가보다. 살다보면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혼자서는 어떤 결정도 내리기가 어려울 때에 함께 고민해 줄 수 있는 사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충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살아가는 힘이 된다.
산허리를 타고 꼬불꼬불 이어져 있는 계단을 오르면서 우리는 한번도 보지 못한, 든든한 통나무로 이 길을 만들어 준 그 누구의 인정이 한없이 고마웠다. 정상은 다다를 것 같으면서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부터 다 와간다는 아빠의 말을 이제는 아이들이 믿지도 않을 무렵 우리는 산마루에 올라앉았다. 몇 가지의 운동기구가 놓여 있고 여러 개의 평상이 숨차게 올라온 등산객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마루에 누워 빈 나뭇가지 사이로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평지에서 보는 하늘보다 맑아 보였다. 남편은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발로 뒤적여 도토리를 주워서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서로 찾아보겠다고 신발과 옷자락에 먼지를 뒤집어쓰며 뛰어 다녔다.
산 아래로 보이는 시가지는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주택들과 아파트 건물들 중에서 우리가 사는 아파트를 찾았다. 성냥갑 만 한 아파트의 작은 구멍 안에서 시기하고 욕심내며 살아가는가 생각하니 내가 바로 우물 안의 개구리구나 싶었다.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내가 좀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면 넉넉한 마음으로 사랑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마루에서도 진정한 정상은 조금 더 높은 곳, 돌탑이 크게 쌓여져 있는 곳인 듯 했다. 아이들에게 돌을 하나씩 올리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했더니 납작한 돌을 찾느라고 분주했다. 아들아이는 공부를 잘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 줄 알았던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여가시간을 많이 달라는 기도를 해서 어미의 가슴을 뜨끔하게 했다. 딸아이는 아빠와 주운 도토리를 납작한 돌 위에 올려놓으며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꼭 감고 간절한 기도를 했다.
“하느님! 이 도토리를 토끼가 먹지 말고 다람쥐가 꼭 먹게 해 주세요.”
여섯 살 딸아이의 예쁜 마음과 아들아이의 미안한 기도는 언제까지나 내 가슴의 한 켠 에 남을 것 같았다. 남편과 나도 돌을 하나씩 얹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슨 기도를 하였는지 묻지 않았다. 열 두 해를 함께 한 세월만큼 서로의 마음을 읽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산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인사하고 웃는 얼굴로 기운이 솟는 말 한마디를 안겨주며 지나갔다. 내가 정상에서 넓은 마음을 찾은 것처럼 저 분들도 산을 올라 가슴속에 새로운 에너지를 채웠으리라.
하행하려 할 때 ‘내려가는 길’이란 안내판의 방향이 우리가 힘들게 올라왔던 길이란 것을 알고 남편에게 물으니 천연스럽게 하는 말이 지금 올라 온 길은 가팔라서 힘이 좋을 때 올라야 하고 우리가 내려갈 길은 평탄한 능선이니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남편의 말대로 ‘올라가는 길’의 표지판이 붙은 길은 내려가는 데 별 무리가 없을 만큼 평탄해서 걷기가 좋았다. 내 남편이 자신의 확고한 줏대도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는 사람이 아닌, 옳은 길이라고 믿는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이 고마웠다.
비록 신년의 벽두에 떠오르는 장엄한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첫 태양의 붉은 기운 못지않은 따뜻한 산행을 했다.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며 올 한해도 남편과 나는 말하지 않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씩 우리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