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과 언어의 가교로 태어나다(글/이효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사진
안동사진동호회가 ‘가일마을 일년의 영상기록보고서’로서 『가일 2003』을 출간하였다. 1981년 이래 매년 회원전을 해온 안동사진동호회는 여느 사진동호회와 다른 나름대로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이 회원전은 회원 각자의 자유로운 작품 활동 중 가장 좋은 것만 모아 전시하는 게 아니라 미리 주제를 정하고 일정한 원칙 아래 작품을 협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기획 작품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호회의 기획은 작품대상으로서 ‘안동’을 겉모습으로서 아름답게 옮겨 담는 게 아니라 안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데서 출발한다. 과거를 가장 많이 간수하고 있으면서 지금 그 과거를 한창 잃어가고 있는 안동의 역사와 자연환경, 과거의 기억이 소용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기억에 머물 수밖에 없는 안동사람들, 현재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고 미래 속에 과거의 자부심을 이어갈 수 없는 텅 비어버린 전통의 마을, 이러한 ‘안동’은 아무 준비 없이 영상에 잡히지 않는다. 『가일 2003』은 역사의 눈을 가진 준비된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특이한 영상기록물이다.
사진을 바라보는 이 동호회의 기본 입장은 책 서두에서 밝힌 바 있듯이 사진을 또 하나의 언어라고 하는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언어가 문자언어든 음성언어든 궁극적으로 의사소통 수단임에 틀림없다면, 영상도 분명히 의사소통의 수단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영상을 채취하는 이 동호회의 태도는 피사체와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 과정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영상을 음성언어의 ‘현장성’과 문자언어의 ‘기록성’을 함께 공유한 발전된 의사소통 수단으로 보고 있다. 영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안목이야말로『가일 2003』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영상의 한계를 극복한
그러나 『가일 2003』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동호회가 밝히지 않거나 혹은 의식하지 않은 더 놀라운 성취를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현장성과 기록성을 공유한 발전된 매체로서의 영상은 도리어 치명적인 의사소통의 한계를 드러내는데, 『가일 2003』은 이러한 한계를 놀라울 정도로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상이 의사소통을 활성화 시키는 게 아니라 도리어 제약하고 있는 측면이라는 것은 영상이 사물의 내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외피만을 담아내어 사물이 가지고 있는 전체의 모습이나 살아있는 모습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약점 때문에 영상의 시대인 오늘의 문화가 사물의 겉모습에만 치중하여 단순한 ‘감성’에 몰입한 채 진실의 표면만을 끝없이 떠돌게 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물에 대한 이미지는 사물의 껍질을 드러낼 뿐이며 그것도 한 순간의 정지된 이미지는 껍질의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정지된 이미지로서 사진은 언어처럼 사물 내부의 의사에 접근하지도 소통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가 결코 실현할 수 없는 전체성과 맥락을 짚어낼 수 있다.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사물 내부의 생명성을 소통하는 수단이라면, 영상은 비록 겉모습일지라도 그 사물의 전체성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성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상에서 언어적 가치를 살리는 길은 전체성과 맥락을 담고 있는 영상이 어떻게 사물 내부의 의사에 접근하고 그 살아 움직이는 생명성을 끌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어떠한 사물의 모습도 그 순간 자신의 내부를 드러내는 가장 진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물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내부의 언어를 그 사물이 어떤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가를 포착할 수 있는 관찰자의 눈에 달려 있다. 그 일은 마치 사람들끼리 서로 대화할 때, 마음을 열고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인생이야기
『가일 2003』은 안동사진동호회원들의 열린 마음이 일년 동안 가일마을과 끈덕지게 대화하고 마침내 가일마을로부터 마을의 언어를 받아낸 집단적 영상언어의 기록물이다. 『가일 2003』은 사물의 외부를 담아내는 영상에 사물의 내부에 들어있는 언어를 동시에 녹음한 유성영상(有聲映像)이며 영상과 언어의 가교가 어떻게 놓여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그러나 『가일 2003』의 가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생명체이거나 사물이거나를 막론하고 대상의 참된 모습은 그 대상이 보여줄 수 있는 일련의 과정 전체를 통해서야 비로소 밝혀진다. 한 사람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한 번의 대면으로 알 수 없고 오랜 사귐을 통해 온갖 모습을 다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수백 년 동안의 생생한 역사의 지층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리고 지금도 살아 있는 안동의 대표적 전통마을인 가일마을을 ‘언어가 있는 정지된 영상’으로 담아내는 일이 어찌 간단하랴! 사계절의 변화 속에서, 자연과 환경, 역사와 흔적, 살아가는 모습, 가일사람들을 세부 주제로 하여 일년 내내 구성원들의 자유롭고 다양한 시각을 통해 접근해나간 안동사진동호회의 전략은 매우 훌륭했다. 그들은 자연과 환경을 보면서도 가일사람들이 자연과 관계하는 방식을 찾으려 했으며 앞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어떻게 지키려 했던가를 읽으려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 피사체 속에 숨겨진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함께 읽어내는 동안 동호회원들끼리 어떻게 영상으로 대화할 수 있는가를 배웠던 것 같고, 그러다가 마침내 가일마을의 영상이야기는 결국 끝나지 않는 우리의 인생 이야기라는 사실을 발견한 듯 보이는 점이다.
안동사진동호회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