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가산 정상에서(글/윤천근)
욋재에 부는 바람
학가산을 밑으로 돌며 멀리서 한번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학가산 위에 올라가서 주변을 둘러보는 글을 써 보자는 계획을 잡은 것은 두 달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일이 언제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급한 일이 생기기도 하고, 또 나의 게으름이 원인이 되기도 하여, 학가산 정상에 올라가 보는 계획은 차일피일 미루어지기만 하였다. 결국 나의 게으름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된 사랑방장이 우격다짐으로 끌어내고 나서야 나는 할 수 없이 학가산 정상을 오르는 취재 길에 나서게 되었다.
6월 11일. 날씨는 후텁지근하였다. 일찍 찾아 온 한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려서 밖으로 나설 엄두조차 나지 않는 날이었다. 오후가 되면서 태양이 흐릿한 구름 속에 가리워진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기는 하였지만, 무더위는 마찬가지였다.
옹천에서 월전리를 지나 신전리로 접어드는 고갯마루에는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욋재. 위에 있는 고개라는 뜻일까, 아니면 외롭게 두 세상을 가르며 서 있는 고개라는 의미일까? 그 뜻은 잘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욋재 위에서 차를 멈추고 주변을 돌아볼 마음이 생긴 것은 순전히 고갯마루에 부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신전리 입구의 고갯마루는 화가의 캔버스 같은 느낌이 들게 하므로, 언제나 길을 멈추고 한 번 호흡을 가다듬어 볼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길손인들 이런 기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래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불타는 태양이 중천에 떠올라 불화살 같은 빛살을 내리쏘는 날씨였다면 고갯마루 위에서 서성거릴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산 속 세상을 지키고 섰는 고개인 탓일까? 욋재에는 무더위와 시원함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불 옆에 선 것처럼 뜨거우면서도 동시에 피부에 선뜻함이 느껴질 정도로 시원한 감각의 이율배반은 한 여름 산 속에 이는 바람이 아니고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리라. 그 혼란스러운 느낌은 욋재 안 세상, 바닥으로부터 힘차게 솟구쳐 올라와 하늘을 찌르고 서 있는 학가산까지 생경하게 보이게 하였다. 여름의 학가산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인 것일까?
내가 욋재 도로 한쪽에 서서 학가산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 사랑방장도 새삼스럽게 욋재 주변의 산기슭에 올라가 서성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방장은 새로운 발견을 한 듯 나를 불렀다. 방장의 생각은 욋재 왼편 산기슭의 좁직한 산길이 2차선의 아스팔트 도로가 생기기 전의 옛 길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딴은 그럴 것 같기도 하여 우리는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좁직한 산길을 타고 내려가 보았다. 산굽이를 돌아들고 나서 바로 2차선의 아스팔트 도로와 다시 만나는 짧은 산길이었지만, 소나무들이 양쪽으로 벌려 서 있는 산길을 돌아들자 눈앞에 썩 나서는 학가산을 보는 재미는 색다른 것이었다. 그러한 색다름은 아마도 아스팔트와 2차선 도로를 통행하는 자동차가 연상시키는 현대성을 걷어내고 풀과 나무들의 세상 속에서 하나로 어울려 있는 학가산 주변의 세상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숲길이 끝나는 곳, 완만하게 흘러내리던 길이 갑자기 급하게 아래로 미끄러져 내리는 지점에 사람 키 만한 크기의 개복숭아 나무가 청자알 같은 복숭아들을 여럿 매달고 외롭게 서 있었다. 산길에 사람이 통행할 때였다면 이 개복숭아는 길손의 목을 축여줄 시원한 과일을 만들기 위해 분주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길손이 끊긴 산 속 숲 주변에서 무슨 목적을 위해 홀로 복숭아를 키우고 있는 것일까? 그러한 질문은 산길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노란 기린초 꽃, 자줏빛 꿀풀 꽃 같은 것들에게도 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정말이지 6월,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욋재 주변의 자연은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치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런 질문은 누구에게 제출하여야 하고, 어디에서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것일까? 하릴없이 짧은 산길을 되돌아 나와 욋재 고갯마루에 다시 섰을 때, 고갯마루 위 하늘에는 유성이 흐르듯 월전리 쪽을 향하여 흐르는 구름의 대열이 떼를 이루고, 학가산 쪽 하늘은 흐릿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흐릿한 하늘 때문일까? 학가산의 녹음이 더욱 짙게 내 두 눈에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
욋재 쪽 신전리 윗마을 주변을 어정거리다가 고갯마루의 언덕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니 낯설은 안내판이 시야를 막고 섰다. 식당 안내판, ‘한국통신 대구 통신망 운용국 학가산 중계소’ 라고 씌여있는 철제 표지판, 아마도 입산관리를 위해 쓰이는 듯한 작은 초소, 산불조심 안내문이 씌여있는 표지판 같은 것들이 왼쪽으로 뻗은 작은 샛길의 초입에 몰려있다. ‘산불 발생 시 3년 이하 징역, 1500만원 이하 벌금’이라고 적혀 있는 안내판의 글씨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표지판들은 학가산을 배경으로 죽 늘어서서 샛길을 향하여 팔을 뻗고 있다. 학가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객은 이 샛길을 이용하여야 한다. 이 길이 정상 주변까지 뻗어 있기 때문이다.
샛길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고, 주변에는 담배밭과 과수원이 많다. 샛길 쪽에서 보면 학가산은 측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욋재에서 볼 때 학가산 우측으로 펼쳐져 있던 밭들, 밭들 사이로 풀어져 있던 농로가 샛길에서는 바로 지척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길은 그런 밭들을 양 쪽으로, 또는 한 쪽으로 벌려 놓으면서 숲 속으로 잦아든다.
유난히 많은 솔방울을 매달고 있는 소나무들이 1차선의 시멘트 도로 위까지 양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길 가는 이들을 굽어본다. 시멘트 포장 위로 솔잎과 솔방울등이 떨어져 갈색으로 말라가고 있다. 길은 좌로 우로 조금씩 굽어 돌기도 하고, 위로 아래로 솟구쳤다가 내려서기를 반복한다.
길 위에서 쉬고 있는 한 무리의 등산객들을 만났다. 75세의 윤기동 할아버지가 포함되어 있는 창녕산악회 노인들이다. 여기저기 높은 산들을 찾아다니는 어른들인데, 학가산 등정 계획은 지도를 보고 우연히 잡았다고 한다. 대부분 직장에서 퇴직하고 등산으로 취미를 삼는 어른들인데, 저 아래 신전마을에 버스를 대 놓고 걸어서 학가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참이란다. 한 두어 시간 정도 걸리는 산행이라는데, 시멘트 포장길이 영 마땅치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토로하신다.
“등산객으로서는 세멘 포장이 삭막하고, 아래서 화기가 받치고, 딱딱해서 걷기 어렵고, 영 안 좋아요. 오솔길이 좋지. 흙이 있어야 걷기가 편해요.”
한 노인이 말씀 하셨다.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불만일 것이다.
“그래도 정산에 올라가니 좋습디다.”
다른 노인이 말씀하신다.
“정상에서는 사방이 다 훤히 보입디다. 뚜렷한 특징은 없지만 정상에 바위가 좋고… 많은 산에 올라가 봤지만 사방이 탁 트이는 데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왜? 화왕산도 사방이 다 훤히 트이지 않았습디까?”
“화왕산은 푹 꺼져 있어서 사방이 탁 트여 보인다는 느낌이 없지.”
노인들은 이제 자신들끼리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상 부근 송신소 구조물은 보기 싫습디다.”
“그런 점은 있지.”
“정상 다 가 갖고 로프를 타고 오르는데, 로프가 삭아서 위험합디다. 그거 믿었다가는 일 치를 수도 있겠어요. 시에서 관심을 갖고 교체를 하던지 해야지….”
노인들은 우리가 사진 찍고 말씀하시는 것을 수첩에 적고 하니까 당신들의 말이 학가산의 좋은 등산환경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지 않을까 여기는 눈치였다. 제발이지 이 글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그러나 그런 기대는 오래 품고 있을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불행하게도 나는 이미 깨닫고 있다.
노인들과 헤어져 다시 길을 타고 오르니, 학가산 어깨쯤에 이르러서 길은 둘로 갈라진다. 왼쪽의 길은 여전히 단정하게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고, 오른쪽의 길은 비포장이다. ‘한국방송공사 학가산 송신소, 한국통신 학가산 중계소라는 표지판 사이에서 등산로라는 작은 표지판이 잔뜩 위축된 자세로 오른쪽 비포장길을 가리킨다.
비포장 길로 들어서니 굽어 돌며 오르는 곳만 부분적으로 거칠게 포장되어 있다. 몇 번을 굽어 돌았을까? 길은 한국통신 학가산 중계소의 아래쪽 시멘트 축대를 타고 돈다. 그리고 조금 넓은 공지를 만났을 때, 돼지 머리를 받쳐놓고 징을 두드리며 고사를 드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장은 그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은 눈치이다. 당장 차에서 내려서 사진도 찍고, 취재를 하려고 달려들 눈치이다. 나는 그렇게 대담하지도, 적극적이지도 못하다. 치성을 드리는 곳에 불쑥 들어섰다가 부정 탔다고 욕이라도 얻어먹으면 어찌할까? 나는 주저하다가 방장을 눌러 앉힌다. 내려오면서 취재하자고 꼬드기자 방장이 겨우 납득을 하고 자동차의 페달을 밟는다.
문화방송 중계소 아래 좀 넓은 터에서 우리는 차를 멈추었다. 신전 마을에서 샛길로 들어서며 눌렀던 메타기는 5키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위쪽으로는 문화방송 중계소가 올려다 보이고, 아래쪽으로는 한국방송공사 중계소, 한국통신 중계소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조금 넓은 공지가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보다 조금 아래에 차를 멈춰 세웠지만, 원래는 이곳이 주차장으로 쓰이는 곳인 모양이었다. 공지의 한켠에는 쓰레기가 담긴 비닐봉지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쓰레기 더미 위쪽으로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냈다.
20분의 등산
차를 타고 올라왔으니 우리의 등산은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셈이었다. 정상은 고개를 들면 바로 올려다 보였다. 그 정도를 등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2시간을 걸어 정상에 이르렀다는 창녕산악회 노인 회원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목적이 등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 속 변명만으로 그 부끄러움은 잦아들지 않았다.
길은 문화방송 중계소 한쪽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문화방송 중계소의 철제 구조물이 위압하는 듯한 몸짓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규모의 바위들이 줄지어 나타났고, 길은 급하게 위로 솟구쳐 올랐다. 경사면에 용케 버티고 서서 덩치를 키운 참나무들이 여기저기 뿌리로 바위를 움켜쥐고 서 있었고, 누군가의 배려인지 급한 경사면이나 험한 바위 길에는 어김없이 동아줄이 매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먼저 산을 올랐던 이들이 뒤에 오를 이들을 위해 마련한 시설물이었다. 손때가 잔뜩 묻은 밧줄과 밧줄 한쪽에 버티고 서서 오르내렸던 사람들의 손자국만으로 반들반들 윤기를 얻은 굴참나무의 두터운 수피가 무슨 역사라도 되는 것처럼 감동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하긴 역사가 별 것이고, 사상이 무슨 특별한 물건이겠는가? 두 나무 사이에 묶여 있는 밧줄이야말로 어떤 무엇보다도 위대한 사상이고, 반들반들 윤기를 얻은 굴참나무의 숲이야말로 어떤 기념비보다도 값나가는 역사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위와 나무, 거기에 남은 발자국과 손자국들은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의 본 모습을 웅변으로 들려주고 있었다. 우리는 그 속에 하나의 발자국, 하나의 손자국을 더해주려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손자국, 발자국이 그 속의 자연, 그 속에 남겨진 인간의 흔적들과 잘 어울리는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급하게 오르는 길이면 어김없이 한쪽에 매어져 있던 밧줄이 정상 목 아래의 위험한 경사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곳을 네발걸음으로 조심하여 오르면서 나는 절절하게 밧줄의 의미를 추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밧줄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으며, 나 스스로 얼마나 겉멋만 잔뜩 든 자연주의자인가, 기실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인문주의자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내가 네발걸음으로 올라선 곳에는 바로 정상의 바위절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냥은 오를 수 없는 바위절벽에는 밧줄이 매어져 있었는데, 창녕산악회의 한 노인이 고발하였던 예의 위험한 밧줄이 그것이었다. 바위의 각진 면에 부딪곤 하였던 탓인지 밧줄은 반절쯤은 헤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밧줄을 의지하지 않으면 정상 바위 위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나는 몇 번 잡아당겨 안전성을 시험해 보고는 그 헤진 밧줄에 체중을 싣고 바위 면을 기어올랐다. 20분의 등산. 그 20분의 등산으로 학가산은 내가 정상에 서는 것을 허용하였다.
정상에 서서
정상은 10여평 남짓한 바위 위였다. 학가산 꼭대기에는 세 개의 바위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우리가 올라간 것은 그 가운데 것이었다. 등산로는 그곳에서 끝이 나므로, 모든 등산객이 오르는 곳은 이 가운데 봉우리인 셈이었다. 위쪽 봉우리는 문화방송 중계소가 점령하고 있었고, 아래쪽 봉우리는 좀 나지막하게 숲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창녕산악회 노인들 말처럼 정상에서는 사방이 환히 한 눈에 들어왔다. 동쪽 멀리 밀집된 아파트 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안동이었다. 그 남쪽으로는 풍산 들이 보였다. 서북쪽 멀리, 안동보다는 조금 더 떨어진 거리에 역시 아파트 군의 각진 선을 보여주고 서 있는 것은 영주였다. 영주 아래쪽에서 서쪽을 타고 흐르는 내성천의 흔적은 예천 쪽에서 고속도로의 직선과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목요연. 그 말의 뜻은 학가산 정상에서 사방을 돌아볼 때 절절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양은 학가산 정상에서도 여전히 흐릿한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시계는 크게 방해를 받지 않았지만, 약한 안개를 흩뿌린 듯, 원경이고 근경이고 조금은 뿌옇게 퇴색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녹색의 산천이 주는 신선하고 약동적인 느낌이 약화될 수야 있는 일이겠는가?
어떤 산의 정상이든, 정상에서 얻는 가장 큰 선물은 시원한 바람이다. 욋재의 고갯마루에 서성이고 있던 선들바람이 어느 사이엔가 우리를 앞질러 학가산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20분의 등산도 등산이랍시고,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에게 바람은 선들거리며 쉬임없이 부채질을 해 주었다. 거기다 목을 적셔주는 한모금의 물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보다 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찌 모두를 다 갖출 수 있는 것이던가? 조금 부족한 것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행복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리라.
우리는 오래 학가산의 정상바위 위에 머물렀다. 우리가 마지막 방문객인지, 우리 뒤를 따라 산을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면서 제일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줄지어 서 있는 방송용 철구조물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우리가 산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 산꼭대기에 오르는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인간의 속기를 떨쳐버릴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위해서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의 시선으로 멀리 인간을 대상화 할 수 있는 지점, 인간을 작게, 아주 작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지점, 그곳이 산꼭대기라고 한다면 잘못된 판단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그런 이유로, 산이 산다우려면, 산 속에서 인간은 멀리, 아스라히 멀리, 구체가 아니라 추상이 될 수밖에 없는 먼 곳에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산은 인간의 남루를 보여주고, 인간의 남루를 호흡하게 하는데서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위절벽과 키 낮은 소나무들
돌은 세월을 삭혀낼 수 있는 인고의 미덕을 천성으로 갖추고 있는 물건이다. 집채만 한 바위 덩어리들은 무심한 얼굴로 역사의 의미를 드러낸다. 여린 육신일랑 두터운 살갗 속에 깊이 담아두고, 작은 변화 같은 것에는 꿈쩍하지도 않으며, 수천 년 살아 내린 흔적 정도는 되어야 겨우 그 살갗 위에 선 하나를 그려낼 수 있게 허용하는 듬직함이 갖추어져 있어야 산 하나를 눌러 앉히는 바위의 권능을 행할 수 있는 것이리라.
안동, 영주, 예천 경내의 모든 산과 산줄기들을 중심에서 눌러 앉히는 위업을 발휘하고 있는 학가산 정상의 바윗돌들은 여느 바위보다 더욱 무겁고 듬직한 권능을 갖추어야만 하였을 터이다. 그 중압감으로 3군 경내의 모든 자연물들을 제자리 잡고 머물러 있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무심으로 그런 능력을 발휘하고,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다는 듯 물러나 있는 품성, 이것이야말로 정상에 선 자의 미덕, 어떤 것을 정상에 설 수 있게 하는 미덕이리라.
10여평 남짓한 바위 절벽 위 세상, 그 세상에 인간은 오래 버티고 서 있을 수 없다. 인간의 품성은 그만큼 넉넉하고, 그만큼 여유롭고, 그만큼 듬직할 수 없는 탓이다. 인간은 이 위에 올라 서성이다가, 몇 번 여기저기 시선을 던지고, 들고 온 김밥 나부랭이나 까먹고, 때로는 심호흡 한 번 늘어지게 하고는 다시 총총히 떠나갈 뿐이다. 바위 절벽 위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있는 미덕, 바윗돌의 품성을 익히기에는, 인간은 너무 약하고, 너무 영악하다. 바윗돌의 품성을 익혀 학가산 정상의 열평 남짓한 공간을 제 집으로 삼고 있는 것은 몇 그루 소나무들뿐이다.
학가산 정상을 지배하고 있는 소나무들은 여느 소나무가 아니다. 미끈한 몸매, 짙푸른 색감을 선망한 소나무라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 외양의 미덕은 포기하고, 비틀리고 옹이진 모습으로, 메마르고 빛 바랜 자태로, 바위처럼 하나의 화석이 되어버린 키 낮은 소나무만이 이곳의 주민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학가산 바위절벽 위, 정상의 소나무들은 이미 소나무가 아니라 바위절벽의 숨결이고, 바위절벽의 살점이다. 그곳에는 흐르는 세월을 헤아리는 것조차 잃어버린 바위절벽과 바위의 자태와 숨결을 닮아버린 몇 그루 소나무들이 산다.
숨 헉헉대면서 거기에까지 올라온 인간은 어디 머물러 있는가? 내려오는 길에 나는 이 길을 오르고 내린 무수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문해 본다. 길 가 작은 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리본들이 대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내 시야 속에서 나풀거린다. “전국 명산 300개 정상 등정기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오도다” 리본들 위에서 글자들이 흔들린다. 겨우 이 정도 미덕을 갖는 것이 전부인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버리기 위해 산을 오르지 않고, 얻기 위해 산을 오른다. 키 낮은 소나무처럼 다 버리고 산 위의 주민이 되기에는 인간은 너무 머리가 좋은 생물인 것인가?<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