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사람의 긍지와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허봉환할아버지(글/김영희)
서울 사당동 대로변에 명신서점이라는 20여년 된 작은 서점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거물급 인사들이 꽤 드나드는 곳이다. 안양에 있는 서울구치소로 가려면 꼭 지나야 하는 길에 있기 때문이다. 한다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감옥에서 공부하는 것이 유행이라 면회 가는 사람들은 꼭 책을 한 아름씩 사들고 간다. 이 서점 주인장도 좀 남다른 데가 있는데 아무리 많이 사도 한 푼 깎아주는 법이 없고, 책값 비싸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을 제일 싫어하고, 경우 없는 손님에게는 일장 연설을 해서 돌려보내는 책밖에 모르는 고지식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오랜 단골이기도 하면서 토론의 상대이기도 하고 존경의 대상이기도 한 사람이 바로 ‘안동 할아버지’로 통하는 허봉환 할아버지(82세)이다. 주변에 안동할아버지로 통하는데 안동이 고향이어서 그렇기도 하고 안동선비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향에 도움 못 드려 죄송하다는 할아버지
더운 여름날 명신서점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안동에서 허씨 성을 만나기 어려운데 고향이 안동 어디입니까?
“안동 남선이 고향이요. 남선 백일리. 고향은 남선이고 내가 태어나기는 안동 시내에서 태어났지. 동부동도 살았고, 당북동도 살았고, 옛날 중앙초등학교 교장 사택 바로 남쪽집이 120평 짜리 한옥인데 그거 내가 지어가지고 살다가 6.25 동란 이후 처분했지요.”
“집안사람들이 많았나요?”
“몇 집 안됐어요. 내 있을 때 남선에 일곱 집 있었지. 그때 까지는 외자를 썼는데 손이 너무 귀해 항렬 무시하고 두자를 쓰기 시작했어요. 지금 남선에는 노인들 몇이만 있지만 전국에 자손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지금은 많아요. 길흉사 때도 우리집안 식구들만 모여도 충분하지요.”
본관은 양천이고, 미수 허목(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의 13대 손이란다. 문정공파 후손으로 문중은 안동에서 자주 모임을 갖는다. 조상이 안동에서 살게 된 것은 약 300년 전으로, 서울에서 벼슬하던 조상이 건강이 좋지 않아 내려와 자리를 잡은 곳이 안동이다.
“전에는 안동엘 자주 갔는데 요즘은 나이도 많고 건강도 좋지 않아 자주 가보지 못해요. 지난 봄에 가고는 아직 못 갔어요. 항시 고향은 생각하고 있지만 말뿐이고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하지요.”
도움을 못줘서 죄송하다는 그 말에 솔직히 좀 놀랐다. 나는 이때까지 안동을 위해 무슨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는데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 씀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6.25 동란 후 지금까지 서울살이
유복한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던 허봉환 할아버지는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와서 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안동에 돌아온 것은 20대 초반으로 안동 남후면에서 선생일을 시작했다. 선생일을 몇 년 하다가 시험을 쳐서 경찰에 들어가게 되었고, 6.25 동란이 나고 얼마 후 서울로 올라와 그때부터 지금까지 서울살이를 하고 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뭐 벼슬이랄 것도 없고 대단치도 않는 경찰신문사 사장을 오랫동안 했고, 과학기술처 산하 해중개발기술협회(현재 해양연구소의 모태가 됨) 회장을 지내다가 60여세가 지나 직장을 그만두고 집안을 돌봤다.
직장을 그만두게 된 데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데, 맏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크게 다쳐 꼼짝을 못하게 된 것이다. 맏아들이 사무관이라 관용차로 출퇴근을 했는데 젊은 사람이 관용차를 이용하는 게 민망하게 보여 자가용으로 직접 운전하게 했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본인 때문이라 생각한 할아버지는 아들만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그때부터 본인이 직접 아들을 돌보기 시작해 아직까지 아들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는데 딸 셋과 아들 둘은 가정을 이루었고, 할머니는 1년 반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아들과 둘이서 지내고 있다.
학문에 대한 열정, 안동의 선비정신
아들의 사고가 계기가 되어 일을 그만두면서 허봉환 할아버지의 선비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미수 허목 선생이 쓴 비에 새겨져 있는 비결(秘訣)을 제대로 풀기로 결심하고 한문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비가 세워진 이후 300여 년간 수많은 학자들이 해석을 했지만 어딘지 미흡하고 부족해 제대로 된 해석이 나오지 않았다. 비결을 비결로 풀지 않고 한자 뜻풀이만 하려니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혼자서 한문 공부를 하면서 그동안 발표된 모든 자료들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10년도 더 걸려서 마침내 올바른 해석을 하기에 이른다. 평생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 자부한다.
1999년 12월 ‘양천허씨대종보’에 그 내용을 발표했다.
‘강원도 삼척시 육향산 정상에는 두 주(柱)의 신비(神碑)가 서 있습니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허목 선생이 1661년 3월에 낙서(洛書)의 도리를 이용하여 치산치수와 영원한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빌고 236년 후에 희자 이름을 가진 황제가 나오면 이씨조선의 왕조가 끝나고 국난을 맞이하게 된다는 천기를 담고 있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다.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는 약 4.000년 전 우 임금이 세운 형산 신우비(衡山 神禹碑, 지금은 비문은 없어지고 탁본만 남아있음) 문(文)의 77자 중 48자를 골라 서기 1664년 갑진년에 미수 허목선생이 수전(手篆)으로 써 두었던 것을 나라가 국난을 맞게 되자 1904년 9월 고종황제는 국가의 안위가 위급함을 느끼고 칙사(勅使)를 시켜 세운 비로서 그 뜻은 국가와 국민이 힘을 모아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잘살게 해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서 그 글의 성격과 목적이 척주동해비문과 상호 공통점이 있으며 서로 고증을 위하여 같이 다루었습니다.’
우선은 비문의 자구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은 비결의 올바른 해석이 따라야 한다. 미수선생의 글이 워낙 오래된 고체라 글자 자체를 오역한 경우도 많았다.
처음에는 종친회에서조차 완전한 해석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2년여가 지나서 결국은 학계에서 제대로 된 해석을 한 것으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평생에 그거하나 잘한 일이지. 그 내용은 일본이 쳐들어오니까 조심하라 그런 얘기지. 나라 임금은 어떻게 하고 백성은 어떻게 하고. 이게 비결인데 비결로 해석안하고 그냥 한문으로 뜻풀이하니 될 리가 없었지. 삼백년 동안 해결 못한 걸 내가 했지. 종친회에서는 알아주지. 대단한 걸 했구나 하지. 내가 안동사람이니 안동에서 이걸 해결했다고 그래 이해를 하지. 안동 사람들 학문이 진짜 대단하다고.”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한 가지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이루어 내려는 학문적 열정은 학자뿐 아니라 누구나 본받아야 할 선비정신이 아닌가 한다.
대학교수인 두 사위의 권유로 이 비문의 해석내용은 고증과 함께 곧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현재 출판사에서 마지막 교정 작업을 하고 있다.
수백 번을 또 물어도 나는 안동 백일리 사람
허봉환 할아버지의 호는 우백(又白)이다. 무슨 뜻이냐고 하니 ‘수백 번을 또 물어도 나는 안동 백일리 사람이다’라는 뜻이라고 했다. 촌사람이라는 말이란다. 안동에 대한 긍지가 대단한데 처음 본인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박정희 대통령때 안동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데모에 동참한 일에서였다. 당시 안동을 신안동으로 바꾸려는 일이 있었는데 안동사람들 모두가 반대를 하고 나서서 안동이라는 이름을 지켰단다. 서울에서도 사람들이 모두 내려가서 동참을 했는데 할아버지도 그때 비행기를 타고 오르내리며 꼬박꼬박 동참했다고. 그 많은 안동 사람들 속에서 안동인의 고집과 긍지를 느꼈다고 한다.
또 하나 안동을 위해 한 일 중에 자랑할 만 한 것은 1948년도의 일이다.
“안동이 습격당했어. 그때가 1948년인가 안동이 인민군 빨치산한테 습격당해서 안동이 숯바다가 되었어. 그때 총지휘한 사람이 나요. 그때 경찰서장이 송광선씨라고 군대 전쟁경험이 없었어. 내가 일본군대에 좀 있었거든. 그때 안동을 많이 살려놨지. 형무소하고 경찰서 등 중요한 데 바리케이트를 치고 막고 그랬지. 인민군들이 들어왔다가 저지래를 더 못하고 돌아갔어요. 안동경찰서에 기관총이 한 대 있었는데 그걸 발사할 사람이 없어. 그걸 내가 가서 교육을 시켜서 양성을 해놨어. 총소리나고 습격하고 있는 와중에 시내에 나가서 정찰을 했어요. 인민군들이 그때 청량산에 있었는데 시내를 습격했다고.”
젊은 시절 얘기야 더 있지만 자꾸 하면 자랑 같아서 그만하겠다고 했다. 올해 나이가 팔십둘이라 이제 안동에 내려가도 친구들 선배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몇 분 남지 않아 지난 일들을 얘기할 사람들도 없다고 하시면서 서운해 하셨다.
“안동사람들이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지. 새로운 뭔가를 만들려고 하지 말고 있는 것을 잘 지켜야 돼. 안동사람들이 예의가 얼마나 바른지 몰라. 그걸 지켜야지 하찮게 생각하면 안되지. 안동의 진미를 알려하고 이해하려고 해야 해.”
안동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일을 많이 하지만 안동 피알은 빵점이라며 걱정도 하셨다. 좋다고만 얘기하지 뭐가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는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안동시가 좀 더 적극적으로 자세히 일해 줄 것을 바란다고 했다.
또 각각의 동창회나 모임들이 많이 있지만 안동을 도울만한 단체나 모임이 없는 것이 아쉽다고 하면서 안동에 대한 여전한 애정을 나타내셨다.
얘기를 마치고 명신서점에 들러 짐을 챙겨서 돌아가려 하자 점심을 사주겠다며 붙드셨다. 차 대접을 받았으니 충분하다고 사양해도 그런 법이 없다며 기어이 데려가신다. 명신서점 주인장이 ‘봉제사 접빈객’ 그런 규범적인 것들을 뛰어넘는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고 한마디 거들자 전혀 주눅들지 않고 대꾸하신다.
“서점 문 닫아걸고 자네도 따라나서게”<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