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기(分財記), 재산을 상속하는 문서(글/정진영)재산을 상속하는 문서
분재기란 말 그대로 재산을 상속하는 문서이다. 재산의 주인인 재주(財主)는 대체로 부모이고, 이를 분배받은 이들은 그 자녀들이니, 결국은 아들?딸들이 부모의 재산을 상속한 문서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는 과정은 대체로 두 유형이 있다. 하나는 부모가 생전에 그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직접 분배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자녀들이 합의하여 부모의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작성되는 문서를 일반적으로 허여문기(許與文記)라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화회문기(和會文記)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면적인 분재와는 달리 재산의 일부를 재주가 수시로 특정인에게 특별히 분재해 주는 경우에 작성되는 문서로 별급문기(別給文記)라는 것이 있다. 별급의 대상은 아들, 딸 뿐만 아니라 사위, 손자녀, 조카, 심지어는 혈연적으로 무관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별급의 사유로는 과거급제생일, 혼례, 병 치료, 득남 등을 기념하거나 축하하기 위해, 혹은 빈곤하기 때문에, 혹은 병중에 자주 찾아오니 기특하여, 어릴 때부터 기른 정 때문에 등으로 다양하다.
이들 분재기의 형식은 대체로 분재 혹은 별급하게 된 사유가 서문격으로 나오고, 다음에 분재, 별급의 구체적인 목록이 자녀의 출생순에 따라 기재된다. 마지막에 재주(허여와 별급문기), 혹은 상속 참여자(화회문기), 글쓴 이(筆執), 증인 등이 착함(着銜) 수결(手決)함으로써 문서로서의 요건을 갖추게 된다. 물론 재주가 사대부가의 부녀자라면 도장을, 평천민의 경우라면 손마디를 그려 확인 증명하게 된다. 분재의 대상은 대체로 토지와 노비, 가옥이 주를 이루나 솥 등 가재도구가 포함되기도 한다. 이러한 분재기는 대체로 형제자매 수만큼 작성되어 각기 보관되었으며, 노비와 토지를 별도의 문서로 작성하기도 하였다.
분재기의 유형은 대체로 문서 첫머리의 제명에 허여, 화회, 별급 등으로 표기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쉽게 식별된다. 설사 이러한 표기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쉽게 구별된다. 우선 허여와 화회문기의 경우에는 대부분 재주의 전재산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일부만을 대상으로 삼는 별급문기에 비해서 문서가 큰 편이다. 물론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지만 3-4m에 이르는 것들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분재기의 마지막 부분에 재주(財主)가 착함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형제자매가 모두 착함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서도 구별된다. 전자라면 당연히 허여와 별급의 경우이고, 후자는 화회문기가 된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조선시대 양반들은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을까? 나물 먹고 물 마시고, 그래도 대장부 살림살이 그만하면 족하였을까? 양반들의 삶은 흔히들 ‘안빈낙도(安貧樂道)’로 표현된다. 분재기가 재산 목록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양반들의 경제적인 규모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분재기를 통해 15-16세기 안동과 인근 양반가문의 노비와 토지 규모를 보면 아주 다양하다. 노비의 경우 적게는 10여 명에서부터 많게는 7백여 명을 훌쩍 넘어서고, 토지의 경우는 최소 2백여 두락에서부터 많게는 그 열 배가 넘는 2천4백여 두락에 이른다. 이러한 차이는 재주(財主)나 조부(祖父)의 관직의 고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양반들의 재산 규모가 이렇듯 큰 편차를 가지지만 적어도 안동 양반들이 양반으로서의 이른바 체통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규모는 노비 60-80 명 정도, 전답 5백-7백여 두락 정도였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정도의 토지는 자작(自作)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래서 일정부분은 노비나 농민들에게 소작지로 대여되기도 하였고, 일정부분은 소유 노비를 사역하여 직접 경영하기도 하였는데, 여기서 얻어지는 수확은 대략 200석 내외가 된다. 이 같은 규모는 하급신분의 양인이나 노비 등이 대체로 50-100여 두락 정도 경작하였던 것과 비교할 때 결코 적은 것이라 할 수 없다.
물론 이것은 15, 16세기의 사정이다. 18, 19세기에 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집약화가 이루어지면서 토지 소유와 경작 면적은 크게 줄어들었다. 만석꾼으로 불리는 대지주가 출현하는 반면에 생계조차 이어가지 못하는 몰락양반들이 양산된다. 나물 먹고, 물 마시면서도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실재로 궁핍하였던 몰락양반들이 아니라 일정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부유한 양반들이었다. 부유한 양반들이라 하더라도 늘 풍족할 수는 없었다. 한발과 풍수해 등 자연재해 앞에서는 양반이라도 속수무책이었다. 비록 현실의 형상은 참담하더라도 어찌 선비로서 마음까지 궁핍해 질 수야 있겠는가!
상속, 딸도 동등한 자격을 가지다
상속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시의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에는 적첩(嫡妾) 소생에 관계없이 형제간의 평균 분집(分執)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던 같다. 처와 첩의 구분이 없었으며, 재혼이 법적 사회적으로 보장되었으니 그러한 상속제도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다가 여말선초 성리학의 보급과 더불어 점차 어머니의 신분에 따른 차등과 가계 계승자인 승중자(承重者)에 대한 가급(加給)이 별도로 설정되었다. 다시 말해 적서(嫡庶)에 대한 차별과 함께 승중자에게는 1/5을 더 지급한 다음 여러 자녀에게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조선의 기본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대전〉의 규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속제도를 일반적으로 자녀균분상속제(子女均分相續制)라고 한다.
물론 이 같은 상속제는 조선후기에 이르면 크게 변하는데, 이를 차등상속제(差等相續制)라고 한다. 차등상속이란 특정자녀 즉 종자(宗子)?종손(宗孫), 혹은 아들에게 특별히 더 많은 재산을 분배해 주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딸에 비해 아들이, 중자(衆子)에 비해 장자(長子)가 더 많은 재산을 상속받는 제도이다.
이러한 상속제도는 당시의 가족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적어도 가정에 있어서 아들 딸 차등이 없었던, 남자가 장가를 가던 시대에는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아들딸이나 장자와 차자의 차등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점차 주자학적 혹은 종법적 가족제도가 정착되면서부터는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아들과 딸, 장자와 차자의 차등이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상속제도의 변화는 부모의 사후 봉양, 즉 제사관행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균분상속제 하에서는 제사 또한 균분될 수밖에 없었다면, 차등상속에서는 당연히 장자의 몫이었다.
분재기 속에서, 혹은 이러한 조선시대 상속제도의 관행 속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여성의 재산권이다. 즉, 균분상속제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차등상속제하에서도 부녀자의 재산권은 철저히 보호되고 인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딸이 부모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상속받은 재산에 대한 처분권도 보호되고 인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과 달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처분도 가능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남편 사후에는 재주로서 권한도 행사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 부부별산제(夫婦別産制)가 실시되고 있지만, 부인의 재산에 대해서는 세금을 높게 매김으로써 여성의 재산권 행사를 상대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것과도 비교된다.
상속제의 변화, 공존에서 경쟁의 시대로
이렇듯 분재기는 그것이 작성되던 시대의 현실을 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분재기를 통해 역사를 읽어낼 수 있고,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 여기서 우선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균분상속과 차등상속이 역사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부모의 재산이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면,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것은 적어도 가정에서는 아들과 딸의 차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사위의 처가살이가 일상적인 것이었으니 딸을 가졌다는 것은 곧 사위를 얻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쫓겨 날 일도, 남의 아들을 빌려올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조선전기의 사회였고, 균분상속이 만들어낸 사회상이다.
반면에 차등상속제 하에서는 철저히 아들 중심, 그것도 적장자 중심의 세상이 된다. 물론 이 같이 된 데에는 이제 남녀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남자는 하늘이고 근본이며, 여자는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에게 종속된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어린 시절부터 성현(聖賢)의 가르침으로 훈육되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부인이 아들이 낳지 못하면 죄를 짓는 것이고, 가계의 계승을 위해서는 남의 아들을 빌려와야 했던 것이다. 종통(宗統)이란 이렇게 형성되고, 종가(宗家)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뿐 아니다. 균분상속제는 부의 재분배를 확실하게 보장한다. 당대에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았더라도 자녀가 많으면 다음 대에는 그 수에 비례하여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富)란 크게 보면 개인적이기보다는 그들의 혼인 대상 가문 곧 양반지배층의 공유물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세상에서는 양반들의 특권도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의 것이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추구되어야만 했다. 양반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중소지주라고 한다면, 향촌사회에 조직되고 마련된 다양한 양반들의 조직은 결국 양반으로서의 신분적 특권과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고 보호하고자 한 공존의 장치였던 것이었다. 고을 단위에서 향약이 실시되고, 향안이 작성되었던 것 등은 그 좋은 예가 된다.
그러나 차등상속제에서는 부란 계속적으로 세습될 수 있다. 이제 수대에 걸친 대지주가 생기는 반면에 몰락하여 양반의 대열에서 이탈해 버리는 경우도 생기게 된다. 대지주와 몰락양반은 더 이상 함께 누릴 공동의 이익이란 없다. 대지주가 획득한 특권은 더 이상 공동의 특권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반들의 공론을 모으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진다. 더 이상 고을단위에서 향약이 실시될 수 없고, 향안이 작성될 수 없게 된다. 이른바 토호(土豪)라고 불리는 문벌(門閥) 가문의 권위는 수령권을 압도할 만큼 강력하지만, 몰락양반의 경우는 상천민들의 멸시와 능욕을 감당해 내기도 어렵게 된다. 이제 경쟁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경쟁의 단위는 집안과 가문이다. 가문과 집안간의 경쟁은 향촌사회에 다양한 대립과 갈등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병호시비(屛虎是非)도 여기서 시작된다.
상속 방법, 조각조각 나누다
이제는 분재기를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자. 분재기는 재주(財主)의 재산 목록이다. 그런데 이들 재산은 어떠한 방식으로 분배되었을까?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분할주의(分割主義)라고 할 수 있다. 재주는 각처에 산재에 있는 토지와 노비를 여러 자녀들에게 소재지 혹은 거주지역별로 배정하지 않고 자녀수대로 분할하여 분급했던 것이다. 가령 한 골짜기에 다섯 마지기의 전답이 있고, 한 노비에 다섯 명의 소생이 있다면 재주는 이를 특정한 아들이나 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수만큼 분할하여 주었던 것이다. 결국 다섯 마지기의 전답과 노비 가족은 분재 받는 자녀수만큼 갈기갈기 찢기어 분배되는 셈이다. 다른 골짜기의 논밭과 여타의 노비 가족도 마찬가지로 분할 분배된다. 이것은 마치 형제자매 수만큼의 형형색색 조각으로 어우러진 조각보를 연상하게 한다.
분할 분배의 방식은 무척 복잡하고도 번거롭게 보인다. 그러나 재산을 물려주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한편에서는 조상의 유업(遺業)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녀간 공동 관리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여러 위험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는 안전장치를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미래에 닥칠 어려움에 대해 공동체적인 대응 방안을 제시해 준 것이다.
공동체적인 대응, 이것은 조선사회, 또는 전근대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사회의 법적 제도적인 장치는 늘 불완전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의외의 경우도 자주 발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자연재해도 빈번하다. 어느 것이나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문제이다. 형제자매간, 혹은 일족(一族)이 함께 대응한다면 훨씬 수월해 진다. 예를 들어보자. 한 노비 가족이 도망을 하거나 주인에게 항거를 한다면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노비 가족이 형제자매에 의해 분할 상속되어 있다면, 이것은 당연히 형제자매 공동의 문제가 된다. 이러한 공동체적인 대응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다. 혈연과 촌락단위에서, 크게는 군현단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양반사회를 유지한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체적인 삶은 양반 지배층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하층농민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도 그들 나름의 다양한 공동체적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들은 하층농민들의 조직을 파괴하거나 그들의 조직 속으로 흡수하고자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촌락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농민과 함께 생활하였던 양반의 입장에서는 하층민이 조직을 갖는다는 건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조선사회의 말단에는 하층민의 공동체 조직을 둘러싸고 이를 파괴하려는 힘과 자신을 지켜내려는 생존적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평화롭고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던, 그래서 도리어 정체된 듯한 우리의 옛 마을에서도 지배와 저항의 거친 몸부림들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분재기를 통해 보는 조선사회는 이렇듯 생생하다. 고문서는 더 이상 한 장의 낡은 종이가 아니라 우리 과거 삶을 비쳐보는 거울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