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을 따라 청량산 그림속으로 들어간다(상)(글/이성원)퇴계종택-이육사생가로 이어지는 코스를 따라 원천동을 지나면 좌측은 단천(丹川)이고 우측은 천사(川沙)이다. 단천은 단사(丹砂)라고도 했다. 지명처럼 온통 붉은 흙의 마을이다. 『한국의 오지마을』-'이런 곳도 있네' 라는 책자에 소개된 바 있는데, 원천동 고개를 넘으면 한 눈에 강을 낀 멋진 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 앞 강변이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옛날 선인들은 여기서부터 청량산 산행을 시작했다. 그 길은 천사-단사-매내-올미재-가사리-너분들-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이다. 그 가운데 매내-올미재-가사리 지역은 무인지경의 협곡으로 지금도 뚜렷하지 않는 강변길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길의 아름다움을 어찌 표현하랴! 퇴계는 이 길을 바로 '그림 속'이라 했고, 자신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퇴계는 이 길을 따라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했다. 이 길을 퇴계가 그리던 이른바 '예뎐길'이라 이름해본다.
<'예뎐길'>
지금부터 우리는 그 길을 따라 한 폭의 그림 같은 청량산으로의 입산을 시작한다. 예뎐길 초입에는 야영장으로 변모한 도산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필자의 모교로, 9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안동댐으로 인해 위치, 원형이 변모했지만 초등학교는 그 이름만 들어도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드는 감정의 원형 같은 곳이다. 그 원형 속에는 중학교 진학을 위한 과외수업과, 그로 인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학교의 빈방에서 자취를 했던 일은 추억의 피안으로 남아있다. 석발기(石拔機)가 없던 시절, 석발이 안된 쌀은 돌이 무척 많았다. 쌀을 이리지 못한 우리는 그대로 밥을 했고, 그 밥은 끼니마다 이를 손상시켰다. 그래도 우리들의 자치생활은 재미있었다. 그 결과, 나는 안동중학교에 합격했고, 김건소 교장선생님, 이재곤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아마 기억력의 기능이 사라지지 않는 한 두고두고 생각날 것이다.
지난해 우리는 33년만에 몇 몇 동창들을 만났으며, 오는 8월 24일은 처음으로 이 모교에서 다시 감격적인 만남을 가지려고 한다. 댐의 수몰은 마음의 거리를 호수의 물 속처럼 아득한 천리의 저편으로 멀어지도록 작용했다. 모두들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왕모당
도산초등을 지나면 동남쪽으로 병풍 같은 단애가 나타나고, 그 단애를 낀 산을 오르면 지금도 그 모습이 완연한 산성이 남아 있다. 왕모산성(王母山城)이라 한다. 왕은 공민왕이고 왕모는 왕의 어머니다. 안동으로 몽진을 온 공민왕이 이 산에 어머니를 피신시켰던 것이다.
안내판을 따라 등산로가 다듬어진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보니 과연 산세가 천혜의 요새였다. 뒤는 험준한 산이 둘러싸 있고 앞은 사방이 트여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강과 단애로 막혀 있어 마치 단종이 유폐된 청령포를 연상하는 그런 지세였다. 어제 쌓은 듯, 완연한 산성의 모습을 뒤로하고 조금 나아가니 아늑한 뒤편에 뜻밖에 조그만 집이 있었는데, 바로 왕모당(王母堂)이었다. 왕의 어머니가 피신했던 곳이다. 당 안에는 지금 2개의 목각 인형이 모셔져 있고, 사방에 금줄이 처져 있다. 목각인형은 왕과 왕모의 형상이며, 금줄은 이곳 주민들이 당제(堂祭)를 지내고 남긴 추모의식의 한 단면이다. 동행한 창원문화재연구소 김선태(金善泰) 소장은 주변에 깨어진 기와조각을 만져보며 건물의 년대 추정이 가능하다고 했다.
공민왕의 안동몽진은 이곳 청량산 일원의 동리에서는 신화가 되었다. 지금 이 일대는 단천리의 왕모당과 가송리의 공민왕당, 공주당이라고 불리는 3곳의 추모공간이 있는데, 7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그 추모의식이 계속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조금 뒤에 다시 하기로 하고 다시 왕모당 뒤를 지나 얼마간 올라가 보니 관청에서 설치한 듯한 갈선대라는 간판과 더불어 까마득한 수직암벽이 나타난다. 대가 위치한 공간은 너무 협소하여 현기증이 나서 잠시도 있기가 어려웠다. 조심조심 엎드려 오르니 도산9곡의 제7곡인 단사곡(丹砂曲)이 한눈에 조망되었다. 신선은 정령 이런 곳에 사는 것인가!
갈선대
나는 이 곳, 아니 이 말을 떠올리면 너무나 멋있는 한편의 편지를 떠올리곤 한다. 그 편지는 나만 가만히 숨겨놓고 보는 것인데 이제 공개하게 되니 마치 감추어둔 애인을 공개하는 것 같아 쑥스럽기까지 하다.
그 편지는 퇴계의 편지이다. 친구 벽오(碧梧 李文樑)에게 보낸 것이다. 나는 퇴계의 수많은 글 가운데 이 한편의 편지글이 가장 아름다운 글이라 생각한다. 편지글이라 제목이 없기에 필자가 외람되이 능운, 갈선대 유상遊賞이라 붙여 보았고, 원문을 몇 번이나 써 보았다. 정말 아쉽지만 그 편지를 공개하고 그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대성에게 드림(答李大成)
일전에 틈을 내어 홀로 길을 나서 산수를 두루 구경하였더니, 무르익은 가을풍경과 들국화의 산뜻한 향기가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흐뭇하게 하여 당나귀가 지쳐 절룩거리는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능운대(凌雲臺)의 선명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한나절을 걸었습니다. 부근의 여러 벗들을 불렀다면 반드시 마음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 돌아갈 길이 낭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늙고 병든 사람이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런 연고로, 대나무만 구경하고 주인을 묻지 않는 격이 되었으니, 만약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렇게 되었다고 알려주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갈선대(葛仙臺)의 놀이는 늘 염두에 두고 있는데, 스무날이 넘으면 늦은 감이 있다해도 말씀하신 대로 따를 것입니다. 다만 들리기는 근일 안동의 두 관원이 온다고 하니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만약 흥(興)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滉-
이 편지는 갈선, 능운대 현장으로 나를 유혹했고 그 곳을 찾아 나섰다. 고서를 찾아보니 능운대는 그 위치가 부포리 고통(高通)이라는 지역 아래였고, 갈선대는 왕모산 부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능운대는 퇴계의 동서인 청암(靑巖 李元承)께서 사신 곳이기에 이 글을 쓰고 난 다음 꼭 찾아보려고 하고, 우선 왕모산 부근의 갈선대를 찾았다.
그런데 왕모산 안내판과 현장이 왕모당 뒤편 수직벼랑으로 되어 있었다. 안내문에는 또한 이 대를 바위로 그리고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문득 잘못된 고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계의 가을 산책 행로는 그런 가파르고 좁은 단애의 바위 꼭대기일 수 없었다. 갈선대는 "흥이 일어나면 훌쩍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의문을 갖고있던 96년 5월, 퇴계종손 이근필(李根必) 선생을 모시고 월란척촉회(月瀾 會) 모임을 위해 이곳을 지나는 기회가 있어 물어보니, 바로 여기다 하셨다. 선생께서 지목해준 곳은 왕모산성을 오르는 초입의 왼쪽 언덕을 말했다. 산성을 오르기 직전 하나의 훌륭한 대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갈선대였다. 퇴계의 시와 대조해보니 그럴 듯 했다.
갈선대
丹砂南壁葛仙臺 단사 남 벽 갈선대,
百匣雲山一水回 겹겹 구름 산 시냇물 구비.
若使仙翁今可見 신선들이 이를 본다면,
願洪薪水乞靈來 땔나무, 샘물을 구하려고 신령님께 빌었으리.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능운대", "흥이 일어난다면 혼자도 갈 수 있는 갈선대". 나는 이 능선의 가을 단풍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거대한 고독의 형상을 한 분이 바로 퇴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 고독을 누가 알았으랴!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퇴계의 고독을 반추했다. 그리고 가끔 편지 원문의 抽身孤往 玩水尋山이란 표현과, "若不禁興發則 或作孤往 亦未可知耳"이 진정 어떤 경지에 가야 가능한 일일까 생각하곤 했다. 퇴계는 이러한 홀로 걷기 고독의 즐거움을 뒤로하고 1564년 다시 친구 벽오와 함께 청량산으로 들어갔다. 이때는 제자들과 함께 했다.
선비들의 이 같은 레저일반을 당시에는 유상(遊賞)이라 했고, 산행과 관련해서는 유산(遊山)이라 했다. 그 속에는 步, 思, 酒, 歌, 詩, 唱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좀더 고상하게는 풍류(風流)라는 용어가 마련되어 있다. 바람처럼 흐른다인데, 바람처럼 흐르는 인생을 구가함이 어디 쉬운 일인가. 풍류의 개념은 높은 인격적 수양을 전제한 까닭에 쉽사리 쓰지 않았고, 유상이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그 때의 기록을 상기하면서, 우리들 역시 당시 선인들의 유상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함께 하기로 한다.
단사협
이제 우리는 갈선대를 내려와 장장 1Km 달하는 바위 병풍의 단사협을 지난다. 누가 억겁의 세월을 생각하랴만, 원시 지구의 용솟음치는 거대한 물길은 소(沼)를 만들고, 못을 만들고, 내(川)를 만들고, 구비(曲)를 만들고, 협(峽)을 만들었다. 그때 강은 산을 마음껏 제압했다. 그러나 그 이후 강은 산을 이기지 못하고 영원히 복종했다. 강은 이제 체념한지 오래이며, 조상의 그런 위업마저 잊어버렸다. 단천의 붉은 내는 천년 전에도 그러했고 천년을 지난 후에도 저렇게 흘러 우아한 도산9곡의 한 곡인 단사곡의 구비를 지켜줄 것이다.
도산9곡은 사실 전설 속의 명칭이었다. 전설의 명칭을 『선성지』의 저자 늑로 권시중( 老 權是中)이 최초로 기록했다. 그 후 아무도 이를 말하지 않았다. 이런 명칭이 19세기에 들어와 후계 이이순(後溪 李 淳)과 더불어 새롭게 명명한 사람이 광뢰 이야순(廣瀨 李野淳1755-1831)이다. 광뢰는 퇴계의 후손 가운데 최고의 학자로 평가되는 인물인데, 그의 단사곡 시를 잠시 감상하고 떠나기로 한다.
丹砂曲
七曲 廻一水灘 한 줄기 구비 7곡을 감아 돌아
葛仙高世更回看 다시 갈선, 고세대를 돌아본다
丹砂萬斛天藏寶 단사 만곡 하늘이 보배를 감추고
靑壁雲生相暎寒 푸른 벽 구름일어 서늘하게 비추네
다시 눈을 돌려 단천동을 바라본다. 포근하고 평화로운 인가들이 산 아래 엎드려 있다. 저런 마을에 무슨 일이 있으랴 생각되지만 거기에도 인생의 문제는 있는 법이다. 단천리는 원천리와 모두 퇴계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마을이나 오랜 세월 조상들의 서차(序次)문제의 관계로 긴장이 끊이지 않았고, 최근까지도 서로를 시(是)라 하는 공방이 공개적으로 거론된 바 있다. 이런 현상은 많은 문중이 안고있는 과제로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세월이 그 치유의 약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건 그렇고, 다시 동리를 둘러보면 산아래 잘 보이지 않은 곳에 ㅁ자의 멋진 고가 한 채가 있고, 언덕 위에는 단아한 정자가 보인다. 계남경주댁이고 서운정(棲雲亭)이라는 정자이다. 원래 토계동의 계남(溪南)에 있었는데 안동댐으로 이건 했다. 가까이 가보니 안내판이 있는데 거기에는, 安東土溪洞溪南故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8호로 쓰여있다.
계남고택
나는 초등학교 시절 등하교 길목에 있던 이 집에 들려 고래골할매라고 불리는 아름답고 인자한 할머니로부터 여러 가지 음식을 얻어 먹은 기억이 난다. 할머니 역시 예안 장을 가는 걸음 우리 집에 들리곤 했다. 당시에는 계남경주댁이라고 불렀고, 막연히 인척관계의 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할머니의 외가였다.
경주댁은 이른바 3대이조참판댁이라고도 하는데, 책을 보니 4대이조참판댁이었다. 경주댁이란 택호는 이조참판 쌍취 이만운(雙翠 李晩運)이 경주부윤을 역임했기에 얻어진 이름이다. 계남참판댁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를 모를 일이나, 아무튼 퇴계의 후손 가운데 향산댁(響山 李晩燾 家門)과 더불어 최고의 명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런 연유인지 안내문에도 "안동지방의 일반적인 주택의 형태를 따르고 있으나 기둥 간격 등이 당시에 지어진 다른 건물에 비하여 큰 편이다"라고 쓰여있다. 둘러보니 과연 명성에 걸맞은 화려하고 멋진 집이었다. 고 건축 연구자에게는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
고래골할매는 그러니까 당대의 학자였던 효암 이중철(曉庵 李中轍)의 손부였는데, 효암이 곧 쌍취의 조카였고, 할머니에게는 외종조부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거의 무심할 정도의 인척이었지만 당시의 인정은 그렇지 않았다.
최근 제일은행상무이사를 역임한 주손 이원강(李源康)씨가 이 집의 영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승(『溪南煙霞閣家乘』)을 편찬했는데, 효암과 더불어 매제(妹弟)인 벽사 이우성(壁史 李佑成) 선생이 여러 글을 썼다. 그 가운데 서운정기문(棲雲亭移建記)이 있어 읽어보니, "내가 처음 계남의 처가를 갔을 때 장인어른은 아직 건강하셨고, 문호와 문염(文艶)의 훌륭함은 영남의 제일이었다"고 했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지금 계남댁은 비어있다. 처마 끝 문살에 햇살만이 정겹다. 안채로 들어가니 후드득 박지가 놀라 달아나고, 마루에는 옛 영광을 증언하듯 화려한 가마 1체가 휑하니 남아있다. 마치 언젠가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많은 고가들이 그렇듯이, 계남댁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가고 있다. 집은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은 잊혀지기 마련이고, 잊혀진 집은 서글픈 세월의 잔영만을 남길 뿐이다. 나는 계남댁의 후손들이 늘그막에 이곳에 와서 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고향을 지키는 또 다른 우리들의 고래골 할매가 계시기를 기원한다.
백운지
계남댁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잠수교를 중심으로 동쪽은 백운지(白雲池)이고, 서쪽은 매내라는 곳이다. 매내 위의 산허리 지역이 삽재이고, 그 앞 강 건너 넓은 개괄지는 맹개라는 곳이다.
백운지는 선성12곡 가운데 제6곡으로 보통 배오지라 부른다. 지대가 조금 낮아 예전엔 강의 범람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글을 쓰는 도중에 또 범람했다는 보도가 있어 무척 안타깝다. 예안읍지인『선성지』에 의하면 "역동서원에 소속된 대장장이 10여 집이 살고 있는데, 만약 이 대장간이 없었다면 역동서원의 향사가 초라했을 것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백운지에는 두 가지 유적이 있다. 하나는 성재 금란수(惺齋 琴蘭秀)의 묘소와 제사이고, 다른 하나는 선성김씨비석이다. 동편 산밑에 제사가 숨은 듯이 보이고, 이 곳을 나와 조금 오르면 밭 기슭에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는 비석과 7개의 상석(床石)이 보인다. 비석전면에는 宣城金氏七世墳瑩傳疑碑라 쓰여있다. 해석하면 "선성김씨 7세까지의 분묘라 전해짐을 표하는 비"라는 뜻이다. 확실하지 않은 전해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후손들이 세웠다. 요컨대 수수께끼의 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동 선성김씨의 뿌리를 이해하는데는 결정적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뒷면 비문일부를 해석해보니 이렇게 쓰여있다.
"우리 김씨는 고려 때부터 대대로 예안현에 살았다. 시조 호장공(戶長公)으로부터 다음 3세가 모두 호장을 역임했고, 다시 봉익, 중?, 봉선공에 이르기까지 무릇 7세까지의 묘소가 예안현의 북쪽 백운산(白雲山)에 있다고 전해졌는데 지금은 타인이 점령하여 위 아래로 2개의 묘가 있다. 그 위에 퇴락한 묘 1기가 있는데 가장 먼저 묻었음을 알 수 있고, 그 아래 여러 갈래에 10여기의 분묘가 있으나 모두 비지(碑誌)글이 없어 증거할 수 없다. 봉선공의 아들은 낭장벼슬을 했고, 낭장공의 아들은 현령을 역임했는데 그때 영주로 이사했다. 영주와 예안은 겨우 하루의 거리였고, 아들 형제는 교리(校理)와 총재( 宰)가 되었다. 총제공의 둘째 아들이 현감이 되어 산아래 10여 리의 거리에 와서 살았지만....어느 때부터 수호하지 않고 타인에게 점취당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안동지방 씨족의 정착과정 연구에 천착하셨던 고 소극 서주석(小極 徐周錫)선생의 글을 보니, 안동의 선성김씨는 16세기 이미 이조판서 문절공 김담(金淡), 이조, 형조참판 등을 역임한 민절공 백암 김늑(栢巖 金 )을 배출한 명문이었고, 문절공댁은 3판서댁이라 했을 정도의 명가였다. 『백암집』을 보니 충재( 齋 權 )의 후손인 하당 권두인(荷塘 權斗寅)이 외손으로 묘지명을 쓰기도 했다. 비문의 글처럼 선성김씨 7세까지는 백운지에서 살다가 8세 김로(金輅)의 아들 김소량(金小良)이 영주거주의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집을 물려받음으로써 영주로 가게 되었다. 이후 영주가 새로운 선성김씨의 전거지(奠居地)로 자리하면서 고향의 선영은 잊혀져 갔던 것이다. 이를 도표로 해보면,
.....輅-小良-澮(校理_
-淡(吏曹判書, 문절공)-萬鈞-佐
-佑-士文(正言)- (參判, 민절공)
비석을 뒤로하고 되돌아 나와 매내로 가는 강기슭을 따라 올라가면 상류에 커다란 강의 호수가 나타난다. 이것이 사실 백운지(白雲池)다. 못(池)처럼 생겼기에 얻은 이름이리라. 그러니까 백운지는 강이면서 마을인 것이다. 단천이 단천리고, 원천(遠川)이 원천리인 것처럼. 전에 동쪽 강변으로 갔을 때 강 바위, 모래 위에 알 수 없는 짐승의 발자국과 배설물이 여러 곳에 보였다. 주민들은 수달의 흔적이라 했다. 나는 수달이 있고도 남을 곳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수달이야기는 쓰지 말까 생각하다가 공개하기로 했다. 5년 전 이 일대에 엄청난 은어 때 출현이 있었는데 그때 몰지각한 사람들의 난리법석을 생각하면 쉬쉬하고 감추어버릴 일만도 아닌 것 같다. 그야말로 물 반, 은어 반이라 했는데, 지금 그 은어들은 어디에 있는가? 안동댐을 회귀하는 그 은어는 육봉은어라 하여 연구의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약에 쓸 정도도 보이지 않는다. 은어의 소멸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상류지역의 오염을 그 주범으로 지목하나, 나는 그때 전기 배터리의 과다사용이 원인의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당시 가또라는 일본인 은어낚시매니아가 왔는데, 그는 청량산은어를 한 말로 세계적이라 했다. 그리고 잘 관리하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있을 것이라 하며, 전기배터리 사용을 너무 안타깝게 여겼다.
지리산의 반달곰 서식을 공개하고 왜 보호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설악산 반달곰도 그렇게 했으면 지금 수렴동 계곡을 지나는 수많은 등산객 중에 일년에 한 두 명은 등산도중 경이로운 조우를 가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걷는데 갑자기 지축을 흔드는 무한괘도의 굉음이 들려온다. 이 산중에 왠 일인가 했더니 곧 수 십대의 지프차가 열을 지어 험한 강변을 따라 내려온다. 최근 출몰하는 이른바 오프로드차량들이었다. 가송리-단천리 구간 협곡은 이들 동호인들에는 최상의 코스였고, 나 또한 한두 번 이들을 만난 바 있다. 나는 처음 그들이 자본주의시대의 선택받은 귀족들이 아닐까 했는데, 뜻밖에도 내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갑남을녀들이어서 무척 놀랐다. 바야흐로 우리는 지금 개국이래 최고의 태평성대에 살고있으며, 그 모습들은 거침없는 문명의 전진이고 장관이었다. 또한 인간광기의 현장이기도 했다.[안동]
다음호에 계속됩니다.